• "혁명가는 거리에서 죽는 법"
    [여운형 70주기⑥]통일정부의 마지막 희망 사라지다
        2017년 10월 30일 09:2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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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운형 70주기⑤] 좌우통합의 꿈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의 첫 회동이 열린 3일 후인 1946년 1월 19일, 좌파정당 및 조직들의 전선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의 발기인 대회가 개최됐다. 미소공동위원회에 대응하자는 여운형의 제안에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화답한 형식이었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준비된 각본에 의한 전선체의 색채가 짙었다.

    미군이 국내에 진주한 초기에 박헌영은 치명적인 실책을 하고 말았다. 일제의 잔재와 친일파를 청산하는 것이 1순위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미군도 동일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예단한 것이다. 이를테면, 이 문제에 관한한 미군과 대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박헌영의 정세판단은 완전히 빗나갔다. 미군은 국내에 들어오자 준(準)정부에 해당하는 미군정을 선포하고 여운형의 건준과 임시정부까지 불법조직으로 규정했다. 곧바로 조선공산당의 활동을 제약하고 당원들의 회합을 방해하고 불법적으로 연행하는 것을 반복했다. 위기에 빠진 박헌영은 좌파들을 전선체 형식으로 하나로 모은 다음, 조선공산당을 새롭게 탈각시키는 기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좌우합작운동

    민전의 공동의장으로 선임된 사람들은 여운형, 박헌영, 허헌, 김원봉, 백남운 5명이었다. 여운형은 건준과 조선인민당의 위원장이었고, 김원봉은 조선인민당의 부위원장, 허헌은 건준의 부위원장이었다. 평양에 중앙당(위원장 조만식)이 있는 남조선신민당의 백남운 위원장은 중립적인 행보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여운형과 친밀한 관계였다.

    의장단만을 놓고 보면 여운형이 주도권을 장악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민전의 실무를 총괄하는 사무국장은 조선공산당의 이강국이었고, 조직총괄 역시 조선공산당 창당의 주역인물 중에 하나인 홍덕유였다. 재정을 총괄하는 자리는 국내 상해파 출신인 정노식이 맡고 있었지만 이때는 이미 조선공산당에 가담하고 있었다. 중앙실무, 조직, 재정을 조선공산당의 인물이 맡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상 민전의 조직을 조선공산당이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급박한 정세이기도 했지만 여운형이 발 빠르게 움직인 다른 이유도 있었다. 2월 1일 임시정부의 김구는 준(準)정부에 해당하는 비상국민회의를 선포하고 곧바로 의회에 해당하는 대한국민민주의원을 조직한 후 이를 미군정의 자문기관이라고 선언했다. 김구는 미군정의 실체를 일단 인정하는 동시에 정권을 인수할 행정부와 의회를 통해 임시정부를 기정사실화하려고 한 것이다. 여운형은 미소공동위원회와 김구의 선제공격에 대응하는 조직을 결성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조선공산당에 비판적이었지만 민전에 참여한 것은 이런 배경이 작용했다.

    3월 20일, 공식적인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됐지만 소련이 3상회의 결정에 동의하는 정치세력에게만 정부에 참여할 기회를 주자는 안을 들고 나오면서 난항을 거듭한 끝에 결렬됐다. 미소공위에 냉기류가 흐르면서 차기 회의는 개최되지 못한 채 출처불명의 소문들만 떠돌았다. 이승만이 이른바 ‘정읍발언’을 들고 나온 것은 그때였다. 영·호남을 방문 중이던 이승만이 정읍연설에서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의 수립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발언은 정국을 단독정부 논쟁으로 치달았다. 여운형은 즉각 단독정부 수립은 “10년이 지나도 고칠 수 없는 (민족)분열의 원인”될 것이라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여운형은 박헌영에 반대하며 민전에 참여하지 않았던 안재홍과 김규식을 포함하여 본격적인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여운형은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유일한 방법은 좌우합작이라고 판단했다. 여운형에게 작은 희망을 실어 준 것은 예상외로 미군정청이었다. 군정청도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내며 지원할 의사를 비치기도 했다. 이때만 해도 군정청은 소련과의 불필요한 대립을 피하자는 입장이었다. 요컨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대해 ‘아직은’ 동의하지 않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좌우합작에 대한 군정청의 입장은 박헌영과의 단절을 조건으로 내걸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공산당을 배제한 좌우합작은 무의미한 구호에 불과했다.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은 시작부터 암초에 직면했다. 이른바 정판사 사건이 터지면서 군정청은 조선공산당을 배후로 지목하고 사실상 불법정치단체로 규정하며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위기에 직면한 박헌영은 그동안의 노선을 전면 수정하면서 막대기를 좌측으로 구부렸다. 그동안 박헌영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1주기 추모식에 참여해 추도사를 하는 등 군정청체제에서 합법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기 위한 행보를 계속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정판사 사건을 기점으로 박헌영은 때 이른 전면전을 선택했다.

    박헌영과의 대립과 정계은퇴의 위기

    박헌영은 좌우합작의 5대원칙으로 토지의 무상몰수와 무상분배, 군정청의 사실상 폐지와 행정부의 기능을 인민기구에 넘길 것을 주장했다. 박헌영의 극단적인 회전은 조선공산당의 결속을 강화할 수 있었지만 대중정치의 장악력을 급속히 상실했다. 여운형은 5대원칙을 반대하면서 박헌영을 설득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허사였다. 여운형이 대외활동에 주력하는 동안 1인 대주주 정당에 가까운 조선인민당이 안으로부터 붕괴하고 있었다. 박헌영은 여운형의 조선인민당을 필요에 따라 흔들기 위해 당 조직을 조선인민당에 계속해서 침투시키고 있었고, 상층 중심인 조선인민당은 점점 유명무실해지고 있었다.

    1946년 8월, 조선인민당을 사실상 장악한 조선공산당은 조선신민당과 3당 합당을 결의하는 당내 쿠데타를 실행했다. 여운형은 군정청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실패한 후 당수직을 사임하며 후퇴해야 했다. 좌우합작을 위한 마지막 회한이었을까? 박헌영에 저항했던 여운형은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위원장을 고민 끝에 수락했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을 계속 주장했지만 남로당을 장악하고 있는 박헌영 부위원장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당을 점점 극단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갔다. 1946년 12월, 여운형은 남로당 탈당과 함께 잠정적으로 정계은퇴를 선언하며 기회를 모색했다.

    잠정적인 정계은퇴를 선언한 것은 여운형에게 위기를 불러왔다. 여운형을 둘러싸고 있던 조직이라는 보호막이 사라지자 극좌와 극우세력 모두가 그를 겨냥하기 시작한 것이다. 1947년 3월 새벽 여운형의 계동집에서 폭탄이 터져 집이 반파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 군정청은 제대로 된 수사마저 진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계를 은퇴하고 고향인 양평으로 귀향하라고 압박했다. 모두가 남로당이 배후라고 주장했지만 여운형이 죽은 후 극우단체의 소행으로 드러났다. 여운형에 대한 위협은 그치지 않았다. 불과 한 달 후 여운형은 혜화동 로터리에서 권총 저격을 받았지만 극적으로 위기를 피했다. 사건과 범인은 미궁에 빠졌고 이를 계기로 여운형은 자신의 두 딸을 북한으로 보냈지만 살아서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제2차 미소공위 회의를 앞두고 공위 관련자들과 환담하고 있는 여운형

    1947년 봄이 되면서 개점 휴업 상태였던 미소공위가 재개될 조짐을 보이자 여운형은 다시 전면에 나섰다. 여운형은 영·호남을 순회하면서 강연을 통해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로 유명한 그의 연설능력으로 지지기반을 재건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남로당에 흡수된 조선인민당이 어느 정도 건재한지 직접 확인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여운형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지방을 순회하면서 확인한 결과 상층부만 형식적으로 흡수된 경우가 다수였고 기층당원들은 남로당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서울로 돌아온 여운형은 즉시 남조선신민당의 백남운과 회동했다. 우파정당만이 아니라 남로당과도 거리를 두고 있던 백남운은 여운형의 신당 결성에 동의했다. 여운형에게 원군이 되어준 다른 인물이 있었다. 김구의 임시정부에서 탈퇴한 후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던 장건상이 합류의사를 밝힌 것이다.

    1947년 5월 24일 통일정부 수립과 좌우합작을 내건 근로인민당이 창당됐다. 위원장에는 여운형, 부위원장은 백남운과 장건상이 선출되었다. 노정객 홍명희가 참여하면서 근로인민당은 빠르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여운형이 정치활동을 재개하면서 좌우합작위원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좌우합작위원회는 “신탁통치는 새롭게 건설될 정부가 결정할 문제”라는 조건부 노선을 채택하고 미소공위 참가를 결정했다. 사실상 신탁통치를 반대한다는 의미였다.

    혁명가는 거리에서 죽는 법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은 IOC 가입을 기념하는 영국과의 친선축구경기를 참관하기 위해 서울운동장으로 향했다. 하루도 운동을 거르지 않는 여운형은 조선체육회 회장을 맡고 있었고 이듬해 열리는 런던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IOC 가입을 추진했다. 이날 오후에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민정장관 수락을 위한 면담이 잡혀 있었다. 축구경기가 끝난 후 옷을 갈아입기 위해 계동 집으로 향하던 중 혜화동 로터리에서 트럭이 여운형의 자동차를 가로막았다. 그때 골목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한지근(이필형)이 자동차로 다가와 권총을 발사했다. 심장과 복부를 관통당한 여운형은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절명했다.

    1947년 8월 3일 여운형 장례식. 60만여명의 추모인파가 몰렸다.

    여운형 배후라고 주장한 백의사의 김영성(맨 앞)

    평안북도 영변출신인 한지근은 서울로 내려왔지만 번번한 벌이가 없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같은 영변출신으로 먼저 월남한 중학동창 김훈을 찾아가자 그는 숙식이 가능한 집을 소개해주었다. 집은 ‘격몽의숙’이라고 자칭했고 집주인은 송진우 암살범으로 극우테러 조직을 이끌던 한현우였다. 감옥에 있는 한현우를 대신해 백의사를 유지하며 집에 기거하던 인물은 신동운이었다. 신동운은 송진우의 경호원이었다.

    신동운은 파시즘 내용이 다분한 한현우의 옥중수기를 한지근에게 읽도록 권유하며 민족의 분열을 유도하는 자들을 처단하는 것이 애국이라는 논리를 주입시켰다. 신동운은 한현우의 결심공판에 한지근을 데려가는 등 테러요원으로 양성했다. 한지근은 신동운이 지어준 가명이었다. 여운형 암살은 한지근의 단독범행이라고 발표되었다. 하지만 1974년 김흥성, 김영성, 김훈, 유용호 4명이 자신들이 배후라고 공개 기자회견을 열었다. 공소시효가 지난 탓에 이들에 대한 조사와 처벌도 이뤄지지 않았다.

    여운형이 죽으면서 좌우합작은 표류했다. 중간지대가 사라지자 정국은 찬탁과 반탁으로 대립하면서 출구를 찾지 못했다. 미소공위는 공전을 거듭했고 미국은 철수를 결정하고 단독정부 수립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김규식이 좌우합작위원회를 이끌고 있었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고 그해 겨울 위원회는 해체되고 말았다.

    일제 강점기부터 죽을 때까지 여운형은 10여 차례나 테러를 당했다. 해방 후부터는 테러가 더 빈발했고 좌우합작노선으로 활동하면서는 극우와 극좌 모두에게서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테러와 암살위협을 동지들과 측근들이 걱정할 때마다 여운형은 “혁명가는 침상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는 거리에서 죽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끝>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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