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라디보스톡 소감,
    ‘소비에트’ 향수의 근원은?
        2017년 10월 25일 09:3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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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며칠 전에 특강 건으로 해삼위, 즉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으로 갔다 왔습니다. 러시아혁명 100주년 되는 해에 러시아에 가게 된 까닭인지, 해삼위 분들과의 이야기는 자꾸 소비에트 시대와 현재에 대한 “비교”로 쏠리곤 했습니다. 100년이 지났지만 러시아에서 여전히 혁명은 “뜨거운 감자”입니다.

    통계를 보면 혁명을 긍정시하는 인구와 부정시하는 인구는 각각 46%쯤 되는데, “혁명”이라고 할 때에 보통 혁명 그 자체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시대를 송두리째 이야기하는 거죠. 그래서 “국민 단결”을 외치는 푸틴 정권의 기억정치는 다소 “중간적”입니다. 한편으로는 레닌 동상의 철거 등은 없으며 향토사박물관 전시는 여전히 백군과 결탁한 일군 등 외국 간섭군의 잔혹행위에 중점을 두지만, 또 한편으로는 정교회가 “성인”으로 간주하는 최후의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이름을 딴 거리 등은 생겨납니다.

    푸틴도 – 비록 본인은 보수적 세계관의 소유자긴 하지만 – 어쩔 수 없이 수렴해야 했던 소비에트 시대에 대한 긍정적인 민중의 기억들은 왜 하필이면 이렇게 공고할까요?

    일면으로는 좀 불가사의한 일이죠. 사실 해삼위만 해도 – 비록 소비에트 시대의 기계공장이나 선박수리 공장 등은 거의 다 망했거나 망하기 직전이 상태가 됐지만 – 후기자본주의적 개인소비의 붐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해삼위의 인구 1천명 당 자동차 수는 550대 정도인데 이건 러시아 전국 최고의 수준이고 대한민국(460대)보다 더 높은 수준이죠. 운송업과 서비스업(특히 관광업), 그리고 목재 등 자원판매를 위주로 하는 무역 등은 제조업을 대체한 셈이 되고, 개인소비는 무역과 함께 성장의 하나의 버팀목이 된 셈이죠.

    자동차를 구입하자면 10년 정도 줄 서서 기다려봐야 구식 이태리 “피아트”를 거칠게 모방한 “라다” 하나 겨우 살 수 있었던 소련시대와 달리, 이제 해삼위 사람들은 차를 갈고 싶을 때에 일본에서 차를 아예 인터넷으로 구입할 수 있는 거죠. 10년은커녕 마우스 클릭 몇 번 가지고 되는 거죠.

    개인소비의 폭이 늘어난 것과 함께 국경 개방은 상당수 해삼위 사람들의 삶을 더 다채롭게 만든 것이기도 합니다. 이빨을 고칠 일이 있으면 치과치료가 더 싼 중국으로 가고, 옷 쇼핑을 하자면 의류 가격이 괜찮고 질이 좋다는 동대문, 남대문으로 일 년에 몇 번씩 갔다 오곤 하는 거죠. “도시”라기보다는 군수산업과 해군기지 중심이었던 소비에트 시대의 해삼위보다 더 살기 편해졌다고 할 수도 있는데, 왜 그토록 소비에트 시절에 대한 향수가 강한 것일까요?

    박정희 향수의 핵심어는 “성장”일터인데, “소비에트 향수”는 좀 다릅니다. 성장률 그 자체로 봐서는 후기의 소련(80년대)보다는 차라리 푸틴 시대의 평균치는 더 높을 겁니다. 성장보다는 레닌 동상을 향수어린 눈으로 보게 만드는 것은 자본주의적 소비사회와 함께 찾아온 “격차”에 대한 불편함입니다. 소련은 노동자들이 민주적으로 경제를 통제할 수 있는 “사회주의 사회”까지는 아니었다 해도 소득 불평등은 비교적 적은 사회이었습니다. 서방 경제학자들이 추산한 1974년 당시 소비에트의 지니계수는 약 0,288이었는데, 이는 스웨덴보다는 좀 높은 수치라 해도 노르웨이보다 좀 낮고 당대 미국 (0,376)보다는 훨씬 좋았습니다.

    비록 – 사회주의 이상과 달리 숙련공과 장관의 임금액은 약 3-4배의 차이를 보이긴 했지만, 자본소득(주식 배당금)과 부동산 소득(주택 임대료)은 불가능했거나 매우 제한적이었기에 사회에서 나름대로 “평등”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고급간부와 일선 노동자의 소득이나 생활조건은 많이 달랐지만, 전자의 자녀들은 부모의 위치를 세습할 수 없었으며 보통 일선 인테리로 알아서 스스로 출발해야 했습니다.

    오늘날은요? 세계 주요 경제 중에서는 러시아에서의 격차와 불평등은 최악입니다. 믿어지지 않지만 한국보다 더한 수준이죠. 10%의 부자, 중상층들이 국부의 87%나 독점하는 곳은 러시아인데, 미국만 해도 76%밖에 안되죠 (관련 기사 링크). 세계에서 가장 평등에 가까운 사회를 살았다가 이제는 가장 불평등한 사회를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체감은 과연 어떨까요?

    격차와 함께 서민들을 멍들게 만드는 것은 개인소비 아닌 사회적 서비스 질의 경향적 저하입니다. 자본주의를 키우고 있는 관료국가는, 비록 교육이나 의료를 전면 유료화시키지 않지만, 교육, 의료 부문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는 과정에서 실질적인 대민 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립니다. 의사가 기입해야 할 서류의 양은 소비에트 시대보다 훨씬 많아졌기에 이제는 환자와 대면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은 보통 10-15분에 불과합니다. 한국 같은 “빨리빨리”는, 특히 노인 환자들을 더 아프게 만들죠.

    주당 수업 시간은 많으면 30시간에 달하며, 한 과목당 약 300면의 계획서와 강의노트, 보고서 등을 상부에 제출해야 하는 대학교원은 학생들에게 개인 지도할 시간도, 연구에 전념할 시간도 인제 없습니다. 치료도 “빨리빨리”, 교육도 “빨리빨리”…개인 소비의 양은 늘어나도 삶의 질이 떨어져가는 것을 러시아의 많은 서민들이 뼈저리게 느끼고, 그 만큼 위계질서 사회이었음에도 적어도 시장적 자본주의와 달랐던 소비에트 시대를 향수하게 됩니다.

    향수는 물론 계급의식도 전투적 의지도 아직 아닙니다. 그러나 향수와 같은 소극적 형태라 해도 시장자본주의에 대한 대중적인 “불편함” 그 자체가 매우 중요합니다. 바로 이런 불편함을 기반으로 해서 언젠가 다음 변혁, 다른 레벨의 혁명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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