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록길도서관 두 번째 이야기
    [나의 현장] 우리 동네 작은도서관 만들기의 즐거움
        2012년 08월 27일 11:2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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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봄은 참 잔인한 계절이었다.

    함께 당을 만들고 열심히 일했던 동지들이 통합, 독자 논쟁 속에서 서로에게 날을 세우고 상처를 주고받는 아픔의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당을 중심으로 한 지역 활동과 진보정치의 거점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정치적 혼란을 겪으며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고 모두들 지치고 힘들어하고 있었다.

    함께 했던 이들이 하나 둘 떠나고 나 또한 마음이 떠나버린 상황에서 또 하나의 계절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진보정당은 방황하고 있었지만 지역의 시민사회는 어느 때보다 활기차게 움직이며 크고 작은 성과를 내고 있었다.

    두레생협, 의료생협 등은 조합원을 확대하고 마을모임과 소모임을 활성화하며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고 지역의 풀뿌리 언론 지역신문 또한 안정적으로 종이신문을 발행하며 안착되어가고 ‘은평지역사회네트워크’는 관이 주도하던 구민축제의 방향을 틀어 주민들이 주도하고 참여하는 가을축제를 2년째 성공적으로 치러내고 있었다.

    지치고 힘들 때 새로운 동력을 만들기 위해선 마냥 쉬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란 걸 가을 쯤에서야 문득 깨닫게 되었다.

    어차피 사람들을 만나 술 마시는 게 즐거움인데, 과거의 사람들을 만나 답도 안나오는 논쟁을 되풀이하며 힘든 술자리를 갖느니 뭔가 새로운 시도로 새로운 사람들과 술 먹는 게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월 초 동네에 작은도서관을 만들자는 제안을 10여 명에게 했고 처음 모임을 가졌다. 사실 오래 전부터 우리지역에도 ‘작은도서관’운동을 해보자는 이야기가 술자리에서 오고가기도 했고 동참하겠다는 분들이 있었다.

    나는 이를 기억하고 그 분들을 불러냈고 다행히 그 분들은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다. 지역 생협의 활동가, 지역 언론사에서 활동하는 동화작가, 주거복지운동과 마을 만들기를 하는 사회적 기업의 대표, 학부모네트워크의 운영위원, 초등학교 교사와 학부모 운영위원, 그리고 양 진보정당에서 탈당하거나 방황하고 있는 친구들….. 누가 봐도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빵빵한 추진위원들이었다.

    이 분들이 한맘으로 제 역할만 해주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겠다 싶었다.

    누구는 도서관을 통해 협동조합을 제대로 하고 싶었을 것이고 누구는 풀뿌리 언론, 누구는 교육문제를, 누구는 마을 만들기와 관련된 사업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각자 조금씩 그리는 모습은 달라도 ‘작은 도서관’을 통해 소통하는 마을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것은 일치된 마음이었다.

    아이들은 학교를 나서면 갈 곳이 없고 친구는 곧 경쟁자가 되어버리는 것이 현실이고 책을 읽는 이유는 즐겁게 삶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학습에 도움을 받기 위함이 되어버렸다.

    경쟁 속에서 나만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협동하며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곳, 그 곳이 학교가 되어야하고 마을이 되어야한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선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작은 도서관 하나 만든다고 뭐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매개로 우리 이웃과 새로운 관계 맺기가 시작되는 곳, 그 곳이 작은 도서관이 될 수 있다는 마음과 다짐으로 작은 도서관 설립의 첫걸음을 함께 했다.

    도서관 운동에 대해 시간을 가지고 공부하고 타 지역의 모범사례들도 살피며 천천히 준비하려 했었는데, 추진위원 중 성질 급한 한 명 때문에 갑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첫 모임을 가진 후 바로 도서관 자리를 알아 봤고 아주 좋은 자리가 나왔다는 것이다. 주민센터와 학교가 가깝고 평수가 적당하며 무엇보다 1층이라는 것이다.

    장애인과 유모차의 접근성을 고려해야하는데 사실 엘리베이터 있는 건물에 도서관을 만들기도 쉽지 않고 1층과 2층은 심리적 거리의 차이가 상당하다. 더 이상 좋은 자리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도서관 만들자고 첫모임을 가진 후 5일 뒤 임대차계약을 해버리다니, 정말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주변에서 많은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서관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일을 벌이냐? 앞으로 임대료는 어떻게 감당하려하느냐? 책은 어떻게 채울 것이며 도서선정은 어떻게 할 것이냐? 정말 다행인 것은 이런 걱정, 잔소리하신 분들도 나름 크고 작은 도움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한 주변의 말들은 묵묵히 감내하며 구체적인 성과로 보여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더 열심히 뛰었다.

    바로 벽돌기금 모금 통장을 만들고 홍보물을 만들어 지역사회에 돌리고 추진위원들은 각자 모든 인맥을 동원해 후원금을 모았다. 많은 분들이 벽돌기금을 보내오고 책을 보내오고 정기후원자로 신청하였고, 후원주점엔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많은 이들이 찾아주었고 목수님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공사를 하고도 나중엔 재능기부까지 하셨다.

    동네에 도서관이 만들어진다는 소문을 듣고 골목길 사람들이 책을 한보따리씩 안고 찾아오고 , 자기 집의 책을 실어가라는 전화가 끊임없이 왔다. 또 하루에 몇 상자 씩 책이 배달되었다.

    지리산 아래서 작은 도서관을 운영하시는 분, 과천에서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시는 분, 청송에서 농사지으시는 분, 동화작가님들, 그리고 우리 동네의 많은 시민사회 활동가들…그리고 몇 몇 훌륭한 (?)출판사와 지역의 서점에서까지 책을 보내주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함께 해 주어서 우리는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좀 더 그럴 듯한 공간을 갖게 되었다. 지금까지 한 권의 책도 구입하지 않았는데도 현재 9천권의 책을 보유하고 있는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동네도서관이 되었다. 너무 오래되고 낡은 책은 고물상에 팔아 운영비에 보탰다.

    물론 재정적인 면에서 여유 있거나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정기후원금으론 임대료 내기도 빠듯하고 아직 처음에 진 빚을 갚을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너무 무리해서 비싼 곳을 얻은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듣지만 형편에 맞춰서 일을 시작하면 그 규모에서도 넉넉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고 나중에 넓은 곳으로 옮긴다하더라도 그 비용 손실이 너무 많다는 계산을 했다. 또 어느 정도 규모는 되어야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다. 처음엔 넓어보였던 35평의 공간도 이젠 좁게 느껴진다.

    12월 겨울방학을 맞춰 문을 열고 개관식은 1월에 동네사람들과 도와주신 분들을 초대해서 성대하게 치뤘다.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의 개그공연과 바이올린 연주, 고등학교 마술동아리 아이들의 공연, 동네가수의 공연이 있었고 많은 내 외빈들이 오셔서 축하의 인사를 해주었다.

    총선을 앞두고 초대하지 않은 의원님과 후보님들이 오셔서 다소 당황하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 도서관을 왜 시작했느냐? 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내가 ‘작은 도서관’을 만들고자 했던 개인적인 이유는 나와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과 그 친구들이 마을에서 함께 자라고 이 공간을 통해 이웃과 부대끼며 살고 싶을 뿐이다. 그동안 무수히 고민하고 외쳐왔던 진보정치, 지역정치, 이런 무성했던 말들의 잔치는 이제 그만하고 싶다.

    동네 아줌마들과 수다 떨며 집안이야기도 하고 함께 아이 키우는 고민을 하면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구체적인 삶의 현실이다.

    도서관을 열고 운영하면서 많은 격려와 과분한 칭찬을 들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고마웠던 이야기는 “초록길 도서관이 생기고 정말 좋은 친구를 얻은 느낌이에요.” 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웃동네에 살면서도 날마다 도서관을 찾는 엄마들이 이 골목길로 이사 오는 계획을 세우면서 나한테 주변시세 좀 알아봐달라고 했을 때 정말 기분이 좋았다. 작은 도서관을 친구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있고 도서관 때문에 살고 싶은 동네라고 느낀다면 절반은 성공했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얼마 전 우리 동의 동장님과 만나 초록길도서관 사람들과 주민센터가 함께 힘을 모아 이 골목길을 중심으로 마을만들기 사업을 해보기로 하고 경관가꾸기 예산을 신청하기로 했다.

    내년엔 도서관에서 도시농업교육도 하고 목공수업도 하고 동네 반상회도 하게 될 것 같다. 집과 집 사이에 담장을 허물고 나무를 심고 상자텃밭도 가꾸고 집안에 있던 사람들이 골목길로 나와 이야기 나누는 마을, 우리동네 작은 도서관 초록길이 꿈 꾸는 마을, 사람이 사는 마을이다.

     

     

    필자소개
    은평 작은 도서관 '초록길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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