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을 탈출한
식민지 조선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공간사반 2017여름만주답사 트래블로그②] 장춘
    2017년 10월 12일 11: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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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조선의 꿈이 시작되던 도시

헬조선. 이 신조어가 국가시스템의 비정상화, 경제불황의 장기화, 흙수저 계급을 극복할 수 없는 불평등한 사회를 가리키는 말이라면, 그래서 차라리 ‘탈조선’하고 싶은 절망이 낳은 사회에 대한 호명이라면,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던 2016년보다 더 잘 들어맞는 시대가 있었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80여 년 전, 1930년대 중후반이다.

1930년대 중반부터 1945년 해방까지 약 10년은 어둠의 시기였다. 식민지가 된 지 어언 30여년이 가까워지자, ‘독립’이라는 말은 몇몇 지사들이나 외치는 허황된 말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조선인으로 태어났다는 흙수저 계급을 원망도 해보지만, 식민지의 2등 국민으로 각자도생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타당하게 느껴졌다.

한일합병 이후 태어나 아예 독립국가의 경험이 없는 젊은 세대는 자신들을 ‘신세대’라고 부르며 등장하더니,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회를 물려준 기성세대를 무시하고 원망했다. 설상가상으로 1931년 만주사변에 이어 1937년에는 중일전쟁까지 시작되었다. 생활용품까지 징발 당하는 전시경제체제 아래서, 경제불황은 점점 더 심해지고 언제 징병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침범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과 좌절의 사회, 그야말로 헬조선의 시대였다.

1930년대 중후반에는 이 처참한 헬조선의 절망이 개척의 희망으로 전이되는 기이한 순간이 존재했다. 차라리 다른 곳에서 새 삶을 개척해보려던 사람들이 ‘탈조선’하여 우르르 달려갔던 곳이 있었으니, 바로 한반도와 인접한 만주였다.

만주는 본국에서 퇴로가 막힌 일본인들과 조선인들 모두를 부르는 신개척지였다. 그 배경에는 제국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필요성에 따른 프로파간다가 있었다. 일제는 동남아시아(남방)을 하나씩 식민지로 만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광활한 중국 대륙까지 집어삼킬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에, 그 너른 땅에 사람들을 새롭게 보내야 했다. 대한민국이 텅텅 빌 정도로 가라던 박근혜의 ‘중동 취업 대박론’은 조롱거리에 불과했지만, 1930년대 중후반 일제의 ‘만주 이민 대박론’은 절망에 지친 사람들을 정말로 현혹시켰다.

한반도와 바로 붙어 있던 만주에서 넓디넓은 황야가 개척을 기다리며 손짓하고 있다는 제국 일본의 프로파간다는, 절망에 빠져 있던 조선인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희망의 메시지처럼 다가왔다. 지금의 ‘탈조선’이 좌절의 말에 그쳤다면, 1930년대의 만주행은 좌절을 희망으로 바꾸려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이십 년 넘게 식민지 생활에 지쳐 있던 조선인들은, 어쩐지 만주에 가면 적어도 조선과 같은 빈곤의 굴레는 벗어던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만주국에는 제국 일본의 2등 시민인 자신들보다 못한 3등 시민들이 있으니, 조선보다는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편중독자들이 있고 마약을 밀매하는 비적들이 때로 출몰한다지만, 그런 일이 꼭 자신에게 생기리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만주는 예전부터 조선인들이 독립운동을 하러 가던 곳이 아니던가. 만주에서는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풍요롭고 자유롭고 당당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꿈이, 좌절에 허덕이다 못해 차라리 새로운 곳에서 새 출발을 꿈꾸던 조선인들을 사로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꿈을 좇아 간 만주 땅에서 사람들이 거의 예외 없이 거쳐 가는 곳이 있었다. 광활한 만주 벌판에 일제가 오족협화와 왕도낙토를 기치로 세운 괴뢰국 만주국의 수도, 이제는 이름조차 생소한 신경(新京)이라는 도시였다. 일본인들이 ‘신쿄’라고 부르고 중국인들은 ‘신징’이라고 발음했던 이름 ‘신경’을 지우고 오늘날 장춘(長春, 창춘)이라는 옛 이름을 되찾은 이 도시는, 한때 조선인들에게는 희망과 개척의 상징이었다.

신경은 새로운 만주행 루트의 목적지이자 시발점이 되었다. 1900년대 이후 만주는 이미 조선인들이 이주해서 살고 있던 땅이었지만, 그때 만주로 간다는 것은 대체로 현재 ‘연변’으로 불리는 북간도 지역으로 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윤동주의 고향 ‘용정’이 있는 연변의 동쪽 끝에는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는 도시 훈춘도 있었다. 그런데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가 1932년 만주국을 세우고 수도를 신경으로 삼기 시작한 즈음부터, 기존의 북동쪽 루트보다 안동(현재의 단동), 봉천(현재의 심양), 신경(현재의 장춘), 하얼빈으로 이어지는 북서쪽 루트의 만주행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그 루트의 한가운데에 바로 새로운 수도 신경(장춘)이 있었던 것이다.

1930년 재만 조선인의 숫자는 60만 명이었지만, 1940년에는 145만 명 정도로 급속히 늘어났다. 이 기간에 연변 지역의 조선인 증가는 다른 지역의 3분의 1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지만,(1) 봉천, 신경, 하얼빈 등으로 이주한 조선인의 숫자는 그 이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늘어났다. 그 중 장춘(신경)은 이미 큰 도시였던 대련, 봉천, 하얼빈 등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도시였지만, 1932년 이 곳이 만주국의 수도로 정해지자,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물론 만주국 건국 이전에도 장춘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없지는 않았다. 1931년 조선인과 만주인이 충돌한 것으로 유명한 만보산 사건은 바로 장춘시에서 차로 겨우 30분 떨어진 ‘장춘현’ 안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장춘이 만주국 수도라는 정치적 상징이 되자, 이 도시의 장소적 의미는 이전과 달라졌고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1930년대 이후 최남선, 염상섭, 진학문 같은 지식인들은 만주건국대, 만선일보, 만몽일보 등에 취직하여 신경에 자리를 잡았다. 원래 간도 지역이 기반이었던 안수길 같은 소설가도 신경으로 이주했고, 시인 백석은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서 잠시 측량기사로 일하다가 그만 두고 만주를 유랑했다. 박정희가 이곳의 신경군관학교를 다녔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지만, 김일성도 1930년대 초반 장춘감옥에서 복역한 적이 있었다. 그만큼 이곳은 다양한 사람들이 거쳐 가는 곳이었다. 물론 이 시기에 만주로 떠난 대다수의 이주민들은 가난한 농민들이었다. 그 이름 없는 필부들은 우선 신경으로 갔다가 개척지로 이동했다.

오늘날 한국에 처음 정착하는 사람이 일단 먼저 서울에 와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듯이, 만주 어딘가에 정착하려는 사람들에게 신경은 출발점과 같은 곳이었다. 정착을 꿈꾸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이 새로운 땅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파악하기 위해 만주로 여행, 시찰, 답사를 떠난 사람들도 이 도시를 들렀다.

그리고 1945년 일제가 패망했을 때 재만 조선인과 일본인들 중 상당수가 신경으로 모였다. 해방 이후 ‘귀환 서사’를 담은 허다한 소설들은 바로 신경에서 출발하여 조선으로 귀환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허준의 <잔등>, 엄흥섭의 <귀환일기>, 전홍준의 <귀환>, 이금남의 <이향>부터 시작하여, 의사가 되어 신경에 갔다가 돌아오는 주인공을 다룬 손소희의 「남풍」이나 전후 한국의 베스트셀러였던 재만 일본인 후지와라 테이의 수기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에 이르기까지, 신경은 1930년대 이후 한동안 만주에서의 생활과 귀환을 다루는 이야기들의 출발선에 있었다. 신경이 철도교통의 중심이자 만주생활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장춘이라는 이름으로 되찾은 이 도시를 찾는 한국인들은 많지 않다.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만주를 방문한다는 것은,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있는 용정, 연길, 백두산 일대, 또는 압록강 주변의 고구려사 유적지로 가는 정도를 뜻한다. 간혹 대련이나 하얼빈을 가는 경우는 있다. 대련은 중국인들에게도 세련되고 어여쁜 아가씨들이 있는 현대적인 도시, 그리고 해변과 휴양의 도시로 통하지만, 한국인들에게는 골프를 치러 가는 도시다. 하얼빈은 누구에게나 러시아가 백년 전부터 건설한 이국적인 정취가 살아 있는 ‘동양의 파리’로 유명하다. 아무리 따져 봐도 한번쯤 가고 싶은 도시들의 목록에 장춘이라는 이름을 올리기 힘들다.

오늘날 장춘은 중국의 자동차 생산 기지이자 열차 생산기지, 과학문화도시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1950년대 이후 중국이 장춘을 자동차와 열차 생산의 중심 도시로 삼은 것은, 이 도시에 새겨진 만주국의 역사를 지우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한국인들이 더 이상 장춘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도, 만주에 진출해야 했던 조선인들의 좌절과 희망의 여정을 잊어버리는 것인 동시에 그 좌절을 일본 제국의 프로파간다에 동조하는 개척의 에너지와 맞바꾼 ‘자기기만’의 역사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장춘(신경)으로 간 조선인들은 일본 제국의 주변인이기도 했지만, 이미 그 땅에 살고 있던 한족과 만주족들에게는 무단으로 끼어든 제국의 협력자들이었다. 다행히 장춘에는 만주국 시절의 흔적이 허다한 건축과 도시계획으로 아직 남아 있다. 한때 희망과 개척의 도시였다는 사실마저 잊힌 도시 장춘을 보러가는 것은, 독립운동과 수탈의 기억으로만 채색된 식민지 시기의 역사를 다른 방향에서 보기 위한 것이다.

장춘 가는 길

현재 장춘으로 가는 길은 고속철도로 시원하게 연결되어 있다. 대련에서 장춘으로, 장춘에서 다시 하얼빈으로 이어지는 기차에서 누구나 기대하는 것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 넓고 넓은 만주 벌판이다. 그러나 과거에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이 보았던 만주의 황량한 광야는 더 이상 없다. 빠르게 질주하는 기차의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초록의 지평선뿐이다.

대련-장춘-하얼빈으로 이어지는 고속열차 안에서 바라본 만주 벌판.

동북 지역은 일제가 물러간 이후 공산당이 중국 대륙에서 처음으로 ‘해방’시킨 지역이었고, 정부는 수많은 소수민족이 공존하는 이 불협화음의 땅이 가진 정치적 중요성에 주목했다. 만주 벌판을 농지로 바꾸어 생산력을 높이고 다양한 소수민족들이 불만 없이 살 수 있게 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전후 몇십 년간 지속된 이 녹화사업의 중요성은 하얼빈 외곽의 북대황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만주의 벌판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들의 기억은 초록의 농지로 바뀐 평야에서는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어쩌면 중국 공산당 정부의 녹지화 프로젝트는 만주국 관료들의 프로파간다를 대신 실현시켜준 것인지도 모른다.

북대황박물관(北大荒博物館)에 전시된 작품과 사진. 각각 황금빛 평야로 변신한 만주 벌판, 황야를 개간하는 민중들을 형상화한 대형 부조물, 개간 과정을 담은 전시물.

1937년 소설가 이태준도 만주벌판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이 기차 길을 달린 후, 신경을 비롯하여 봉천, 하얼빈 등 만주지역을 답사한 만주기행문 <이민부락견문기>를 남겼다. 생전 처음으로 만주를 방문한 그는 거대한 대륙으로 간다는 기대에 흥분되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봉천으로 가면서 “산은 물론 언덕 하나 보이지 않는다. …(중략)… 아득한 안개 어디를 보나 땅과 하늘의 경계선은 흐려지고 말았다.”고 썼다. 그리고 봉천에서 일정을 마친 후 다시 “대련 하얼빈 간의 특급 ‘아세아’”를 탄 그는, “창밖은 그저 밍밍한 벌판”임을 확인하고, “내일 이민촌(移民村)을 찾아 끝없는 벌판에 외로운 그림자가 될 것을 걱정”하며 신경에 도착했다. 그가 신경을 방문한 목적은 소설가 염상섭, 시인 박팔양, 기자이자 평론가 이태우 등을 만나서 장자워후의 이민촌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만주로 간 조선인 이주민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설가 이태준은 신경에 가면서 아시아 유일의 고속철도 ‘아세아’를 탔다. 그는 이 고속열차 식당 칸에 점심을 먹으러 가는데, 급사가 모두 러시아인 소녀인 것을 보고 “희고 야위고 반듯한 이마가 영화 <죄와 벌>에서 본 쏘냐 같았다.”면서 “국적이 없는 백계로인(백인계 러시아인)”에 대한 동정과 감상을 남겼다.

이태준이 탔던 특급열차 아시아는 일본 철도의 새로운 상징이었다. 부산에서 경성, 평양을 가로질러 신경역까지 이어지던 원래 기차의 이름은 ‘히카리’(빛이라는 뜻)였고, 나중에 ‘노조미’(희망이라는 뜻)도 이 노선에 투입되었다. 이 기차들이 시속 47km, 60km 정도로 달리던 것을 생각하면, 시속 100km 이상의 속도로 질주하며 대련-봉천-신경-하얼빈을 잇는 남만주철도 노선의 ‘아시아’ 열차는 일본의 자랑거리이자 한번쯤 타보고 싶은 신문물의 상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장춘은 한반도에서 출발하든, 대련에서 출발하든 만주로 이어지는 열차 노선의 핵심에 있었다.

장춘은 북으로는 러시아가 만주리와 블라디보스톡을 연결하기 위한 건설한 동청철도의 중심지 하얼빈과 연결되고, 남으로는 동북지역의 최대 도시 심양과 요동반도의 대련으로 이어지는 남만주철도와 연결되며, 동으로는 1933년 길림을 거쳐 두만강까지 건설된 철도의 기착지였다. 러일전쟁 이후 포츠머스 조약(1905)을 통해 일본은 요동반도와 동청철도 남부선을 획득하고 이를 관리하기 위해 다음 해 남만주철도회사(일명 ‘만철’)를 세웠다. 그런데 이 조약에서 일본과 러시아는 ‘장춘 이남의 철도를 일본에게 양도한다’고 합의했지만 정작 그 경계지점이었던 장춘이 어느 나라로 귀속되는지 명확하게 표기하지 않았다. 분쟁과 협상 끝에 결국 장춘과 그 주변의 철도 부속지를 양국이 공유하는 것으로 합의를 본 것이 1910년이었다.

게다가 장춘은 만주 최대의 군벌 장작림과 그의 아들 장학량의 본거지인 봉천이 인근에 있었기 때문에, 군벌의 위세가 1920년대 후반까지도 뻗쳐 있었다. 특히 장작림은 남만주철도와 만철 부속지의 경제적 이권에 대해 호시탐탐 욕심을 드러냈기 때문에 일본인들에게 껄끄러운 상대였고, 결국 일본인들에게 암살까지 당했다. 장춘은 만주를 둘러싼 러시아, 일본, 군벌의 힘겨루기에서 치열한 경합지였던 셈이다. 한반도 북쪽의 동쪽 끝과 서쪽 끝에서 납작한 삼각형이 그려지는 지점에 있는 위치를 보면, 장춘이 왜 교통의 요지이자 정치세력 간의 각축장이 될 만한 지정학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만주국 만주철도 노선 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춘이 만주국의 수도로 선정되었던 것은 다소 의외였다. 그래서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이 건립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장 큰 도시이자 관동군사령부가 있던 봉천이 수도로 선정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열흘 뒤 예상을 뒤엎고 장춘이 수도가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얼빈은 너무 북쪽에 있고 러시아의 거점이었으며, 봉천은 남쪽에 치우쳐 있고 게다가 군벌 장학량 정권의 거점이었다. 이에 반해 장춘은 만주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고, 아직 상대적으로 덜 발전된 도시이므로 땅값이 높지 않았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장춘이 토지를 좀 더 쉽게 매수하여 마음껏 근대 도시의 이상을 펼쳐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관동군은 극비리에 장춘 시내의 건물들을 조사하고 장춘과 그 인근 구역에 토지매매 금지령을 포고하여 지가의 앙등을 사전에 방지한 후 도시건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2) 만주의 중심이라는 지리적 위치, 철도교통의 중심지, 상대적으로 저렴한 지가(地價)의 삼박자를 모두 갖춘 도시가 장춘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차가 만주벌판을 달리고 달려 장춘에 가까워질 무렵 다시 떠오르는 것은, 유진오가 1942년에 발표한 소설 <신경>이다. 제목부터 도시의 이름을 따와서 지은 이 소설의 주인공 ‘철’은 만주사변이 일어나기도 전에 신경을 다녀간 적이 있지만,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다시 만주 출장을 위해 신경을 방문하는 소회를 이렇게 묘사한다.

“철은 사변 후 십년 동안에 신경이 훌륭한 근대도시가 된 것을 글로 이야기로 사진으로 실컷 듣고 보고 하였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실제로 보는 신경에 대한 그의 호기심은 여전히 컸다. …(중략)… 그 기대하던 신경은 과연 철의 예상에 어그러지지 않았다. 남신경(南新京) 근처부터 벌써 벌판 이곳저곳에 맘모스 같은 거대한 건축물이 우뚝우뚝 보이더니 이내 웅대한 근대도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건설 도중이라는 느낌은 있었으나 갓 나온 연녹색 버들 사이로 깨끗한 콘크리트의 주택들이 깔리고, 멀리 보이는 큰 건축물들의 동양적인 지붕도 눈에 새로웠다. 이 건축의 새로운 양식도 동양이 서양의 영향에서 벗어나서 자기의 것을 창조하려는 노력의 한 나타남일까 하고 철은 생각하였다.

철이 만일 처음으로 신경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었다면 그만 광경에 그다지 신기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철은 열두 해 전 장춘 시대의 신경을 알고 있었다. 그때의 장춘은 정거장만 커다란, 보잘 것 없는 초라한 시골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남만주철도의 종점인 동시에 중동철도의 종점이어서, 일본과 러시아와 장학량의 세 세력이 부딪치는 지점이라, 정거장에는 낫과 마치가 엇갈린 모표를 단 중동철도 사원과, 피스톨을 찬 장학량의 헌병과, 만철사원이 제각각 어깨를 뻐기고 어지러이 걸어 다니고 있어서, 분위기는 몹시 무시무시하였으나, 한 발짝 정거장 문을 나서면 납작한 집들이 헛되이 큰 도시계획의 실패를 말하고 있고, 넓은 마당에는 잡초가 제법 우거져 있었다. 곧장 시베리아 본선으로 연락된다는 ‘인터내셔날 왜곤리’의 침대차가 이곳까지 들이닥쳐 있었고, 그 차를 타고 한 걸음 북쪽으로 나가면 정거장마다 벌써 소련의 붉은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고.

그때의 그 장춘과 지금의 이 신경과의 대조. 장학량의 헌병도 중동철도의 사원도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신경역. 그것만으로도 철의 신경에 대한 호기심은 만족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유진오, <신경>, <<춘추>>, 1942년 10월호.)

옛 도시 장춘과 새로운 도시 신경의 대비에 대한 실감을 이렇게 극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이 또 있을까. 만주 벌판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중국 동북 지역 교통의 요지로서 장춘이 러시아, 일본, 만주군벌 간의 경합지로서 겪어야 했던 근현대사의 충돌이 잘 요약되어 있다. 신경은 그 경쟁 속에서 솟아난 새로운 개척지였다.

신경은 러일전쟁 이후 접수한 남만주철도의 끝이었고,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내린 일본인들이 기차로 한 번에 올 수 있는 곳의 종점이었다. 1932년 만주국 성립 후 러시아가 신경 북쪽의 철도까지 일본에게 팔게 되자 신경은 하얼빈으로 갈 수 있는 철로도 열어주었다. 그것은 일본이 시베리아 철도를 거쳐 유럽까지 갈 수 있는 대륙의 육로가 열렸다는 것을 뜻했다. 새로운 수도 신경을 향하는 기차 안에서 조선인들은 제국 일본이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지 상상할 수 있었고, 더불어 자신들의 삶의 반경이 어디까지 넓어질 수 있을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장춘역과 춘의빈관

열차는 어느덧 장춘에 들어서는데, 이 역은 고속철도용으로 원래의 장춘역과 먼 외곽에 새로 건설된 역이다. 현재 중국은 도시개발의 방식 중 하나로 외곽의 허허벌판에 새로운 역을 건설한 다음 인근에 아파트와 건물이 들어오게 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고속철도 역이 신도시 개발의 거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외곽에 멀리 떨어진 이 역으로는, 그 옛날 조선인들이 신경역에 처음 다다를 때의 흥분을 느끼기 어렵다.

옛 장춘역 일대는 1900년대부터 이미 개발되기 시작한 곳이었다. 러시아는 1901년 동청철도(만주리-하얼빈-블라디보스톡 노선)의 남부지선을 부설하면서, 현재의 장춘역 북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곳에 ‘관성자역’을 설치했다. 일본이 1905년 장춘 이남의 남부지선 경영권을 획득하고 관성자와 장춘시 사이에 새로운 역을 설치하기로 했는데, 그것이 바로 현재의 장춘역이다. 장춘이 러시아와 일본의 사실상의 국경이 된 것이다. 장춘역 주변에는 만철이 다른 도시에서도 그러했듯이, 역 주변의 만철 부속지를 개발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장춘이 근대도시로 변화하는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도시계획은 1932년 만주국 수도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과거의 신경역 외관과 한자, 영어, 러시아어가 같이 적혀 있던 플랫폼. 이 건물은 1994년 역사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사라졌다.

춘의빈관에서 바라본 현재의 장춘역. 현재 건물은 2014년 다시 리노베이션 작업을 진행하여 확장한 것.

장춘은 중국의 오랜 전통과 역사가 살아 있는 옛 도시가 아니라, 일본인들이 당시까지 일본 본국과 대만, 조선 등의 식민지에서 수행해온 도시 건설의 역사를 되새김질하면서, 새로운 땅에 근대 도시의 이상을 마음껏 펼쳐볼 수 있는 도시였다. 장춘에도 러시아인들이 많았지만, 그들이 개발한 대련이나 하얼빈에 비하면 도시화는 거의 진행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관동군, 만철, 만주국의 관료들은 이 곳에서 야심찬 도시계획을 마음껏 펼쳐볼 수 있었다. 당시 인구가 20만 명도 되지 않았으나, 도시계획은 장차 인구가 50만 명 이상이 될 것을 바라보고 건설되었다. 새로운 상·하수도 시스템도 갖추었고, 1940년대 초반에는 아시아 최초의 지하철 건설계획도 수립되었다. 전쟁을 치르느라 자본과 물자가 부족하여 비록 건설되지 못한 것도 많았지만, 이 새로운 도시는 온갖 새로운 시스템을 구상하고 적용시켜볼 수 있는 빈 캔버스처럼 여겨졌다.

1939년 봉천과 신경을 방문한 문인 함대훈은 <남북만주편답기>(<조광> 1939년 7월호)에서 새로운 도시계획에 따라 건설되는 이 도시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드러냈다. 그는 기차가 신경역에 정차하자 “여기가 국도 신경인가 하고 다시금 감격된 가슴의 파동으로 역에 제 일보를 내어디뎠다.” 그는 계속해서 그 감동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역광장 앞에 서서 높다란 건물과 유난히 넓은 길을 바라보고 다시금 대륙 만주국 국도 신경의 면목에 괄목하였다. 만주국이 건국한 지 6년 그 동안 여기 이 높고 큰 건물과 넓고 긴 도로가 질서정연히 짜였다. 이 건설이 만주인도 아니오 조선인도 아니오 일본인이다. 일본인의 위력이 이만치 크다. 이제 지나사변이 장기전에 갔으나 이 만주사변으로부터 8년, 건국으로부터 6년에 이만한 건설면을 보면 지나에 대한 것도 넉넉히 단시일에 건설할 것이라 보는 것이 여기 와서 더 느낄 수 있다.” 대동아공영권의 구상에 동조하는 이처럼 순진한 감상은, 신경이라는 도시가 대륙을 향해 뻗어나가는 일본인들의 계획성과 수행능력의 표본처럼 여겨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경역에서 내리자 마자 맞은편으로 보이던 대동대가. 13km가 넘는 이 길은 현재 ‘인민대가’라는 이름의 번화가로, 인민광장과 이어져 있다.

만주로 이주하려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숱한 전쟁물자와 학도병을 기차에 실어서 내려놓았던 신경역은 만주에 도래할 유토피아로서의 근대도시에 처음 발을 내딛게 하는 출발점이었다. 유진오의 <신경>의 주인공처럼 신경에 가는 사람들은 ‘맘모스 같은 거대한 건축물이 우뚝우뚝 보이는 웅대한 근대도시’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서양식 몸체에 일본식 지붕을 올린 건축양식을 보자마자 “건축의 새로운 양식도 동양이 서양의 영향에서 벗어나서 자기의 것을 창조하려는 노력의 한 나타남일까” 기대했던 것은,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반의 일본을 풍미한 ‘근대초극론’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던 심리일 것이다. 동양적인 것이 서양 근대를 넘어서고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일본 철학자들의 비정치적 사상은 바로 이 신경이라는 도시에서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에 협력하는 철저히 정치적인 사상이 되어, 눈앞에서 물질적인 실체로, 즉 건축으로, 거리로, 도시계획으로 현현했던 것이다.

그러나 직접 눈으로 직접 확인한 현재의 장춘도 사람들이 어디나 사람들이 북적이는 대련이나 하얼빈과 달리 한적했다. 외곽의 고속철도 역에서 예전 신경역 자리에 있는 장춘역 앞으로 이동했지만, 넓은 역 앞 광장은 공사 중이었고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 도시가 희망과 개척의 상징이었다는 사실은 완전히 잊힌 듯했다. 장춘역 바로 앞에 있는 호텔 춘의빈관은 가성비가 너무 좋아서 놀라웠다. 춘의빈관은 남만주철도회사(만철)가 직접 세운 야먀토호텔(大和旅館)의 후신으로, 당시 만철 부속지에 세워진 건물이다. 백년 넘은 건물을 호텔로 쓰고 있는 춘의빈관은, 비슷한 가격의 대련 야마토호텔(현재 대련빈관)보다 훨씬 더 더 좋은 시설을 갖추었고, 비슷한 시설의 하얼빈 모던 호텔 숙박비 반값에 불과했다. 좋은 시설에 훌륭한 가격이었지만, 그것은 이 도시가 이제 관광객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은 덕분인 것 같았다.

1909년 일본 남만주철도회사(만철)이 세운 장춘 야마토호텔. 현재 춘의빈관(春誼賓館)이라는 호텔로 영업 중이다.

위만황궁

오늘날 장춘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들르는 곳은 위만황궁이다. 겨우 2살 나이에 청나라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던 푸이(簿儀)가, 1934년 괴뢰국인 만주국의 유일한 황제인 강덕제(康德帝)로 즉위하여 1945년 일본 패망 때까지 살았던 황궁이다. 일본은 만주가 식민지가 아니라 독립국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만주국을 설립했고, 일부러 청 제국의 황제였던 푸이를 황제로 추대했다. 오늘날 중국은 만주국이 가짜국가였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만주국과 관련된 모든 단어에 ‘가짜’ 또는 ‘유사’라는 뜻의 ‘위(僞)’자를 붙인다. 그래서 장춘에서 만난 만주국의 모든 유적에는 ‘위만(衛滿)’ 또는 ‘위만주국(衛滿洲國)’의 ‘구지(舊地)’라고 쓰여 있다.

위만황궁은 위치상 신경에 건설된 여러 도시 중심지들과 동떨어진 동쪽 구석에, 그러니까 가짜 황제의 위상을 엿볼 수 있는 듯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도 위만황궁은 푸이가 원래 살던 자금성만큼은 아니더라도, 황제의 궁전답게 규모가 크고 화려했다. 황궁 입구 부근에는 푸이가 사용하던 경마장도 그대로 남아 있었고, 용도별로 나누어진 여러 건물들은 다양하고 특색 있었다. 그에게 실질적인 통치권한은 없었지만, 일본이 황제로서 대우를 해준 셈이다. 이곳을 다 둘러보는 데만도 몇 시간이 걸린다.

 

위만황궁 입구, 안내도, 푸이가 사용하던 입구 근처 승마장.

황제 푸이를 보필하는 기구들이 있던 위만황궁 궁내부의 모습과 회의실, 사무실.

사진: 근민루 전경과 관광객들. 이곳은 푸이가 강덕제(康德帝)로 취임한 뒤 정무를 처리하던 건물이다. 그는 여기서 의전을 집행하고 연회를 벌이고 내빈을 접대했다고 알려져 있다.

연회장과 접견실 등이 있는 위만황궁 근민루의 내부. 오래 전 심어졌을 중정의 나무가 지붕보다 더 높이 자라 있다.

창춘헌(暢春軒)과 집희루(緝熙樓)의 내외부 모습. 창춘헌은 푸이의 부친이 거주했던 곳이고, 집희루는 원래 다른 용도로 사용되던 건물이었으나, 1932년 푸이가 황제로 취임한 뒤 침궁으로 개조하여 사용했다. 푸이와 그의 부인들이 같이 거주했다.

동덕전(同德殿)의 외관, 푸이의 침실, 부인 이옥금의 침실 모습. 푸이가 정무처리, 거주, 오락 등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은 건물로, 위만황궁 내에서는 가장 큰 건물이다. 그러나 1938년 준공 후 푸이는 이곳에 일본이 도청장치를 설치했을 것이라 의심하고 이 건물을 정식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동어원(東御園)은 동덕전 앞의 정원으로, 크고 작은 연못과 정자, 폭포 등이 마련되어 있다. 그 외에도 터와 축대만 남은 건국신묘 자리도 있었다.

정원 뒤편에는 전쟁에 대비한 시설도 마련되어 있었다. 황제의 전쟁용 대피소로 만든 어용(御用) 방공호의 입구와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

관동군사령부와 관동군사령관저

봉천에 이어 장춘에도 건립된 관동군사령부는 장춘역에서 남쪽으로 일직선으로 뻗은 인민대가의 서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지 않지만, 당시 장춘역에서 관동군사령부까지 인민대가 아래로 무려 6km에 달하는 지하터널을 군사용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장춘역에서 바로 이어지는 인민대가의 한쪽 편 자리를 점한 관동군사령부의 위치는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위로는 장춘역, 서남쪽으로는 위만황궁, 아래로는 인민광장과 신민대가의 가운데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주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기구가 만주국 정부가 아니라 만철과 관동군이었던 만큼, 관동군사령부의 건축양식도 일본적인 것을 드러내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사령부 건물의 외관은 오사카성을 본 따서 설계했다고 하는데, 오사카성이 중국으로 가기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고 하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세운 성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이루지 못한 대륙 침략의 꿈을 관동군사령부 건물에 실현시킨 셈이다. 이 건물은 현재 공산당 길림성위원회로 사용되고 있어서, 공산당 건물이 일본의 전통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라는 점이 때로 논란을 일으키지만, 현재까지는 잘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사카성을 따라 지었다고 전해지는 관동군사령부 건물의 과거와 현재. 현재 공산당 길림성위원회로 쓰이고 있어서 일반인들의 출입과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사진: 중국 바이두Baidu http://bit.ly/2lPcvkl)

관동군사령부 바로 옆에는 사령관이 살던 관저가 지어져 있다. 현재는 송원빈관(松苑儐館)이라는 호텔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관동군사령관저의 현재 모습

관동군사령관저의 다양한 모습

인민광장

만주국 수도 신경은 크게 몇 개의 중심지가 있었는데, 이 중심지들은 현재도 유지되고 있다. 크게 보아, 앞에서 본 (1) 일본 점령군과 관동군의 행정지역, (2) 인민광장 중심의 금융과 상업 중심지, (3) 신민대가와 신민광장 중심의 관공서 중심지 등이 그것이다.

관동군사령부에서 인민대가를 따라 더 남쪽으로 내려오면, 장춘의 중심지 인민광장이 나온다. 장춘이 신경이었던 만주국 시절 이 길과 광장의 이름은, 대동대가(大同大街)와 대동광장(大同廣場)이었다. 대동대가는 1949년 중국과 소련의 우호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스탈린가로 불리다가, 1996년 지금의 인민대가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전체 길이 13.7km에 달하는 긴 도로다. 일본이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로 삼았던 전통은 현재도 남아 있어서, 이곳은 현재도 장춘시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남아 있다.

이 곳은 신경 도시계획의 핵심이자 상업, 금융, 유흥의 중심지였다. 시의 중앙에 위치해 있을 뿐만 아니라, 거대한 광장을 중심으로 방사형 도로가 뻗어 있고, 이 광장을 둘러싼 각 블록마다 전신전화회사, 은행, 백화점, 극장 등 주요 건물이 들어섰다. 인민광장이 장춘 도시계획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보기 위해서는, 장춘 지도를 봐야 한다.

지도에서 맨 위 가운데의 동그라미가 장춘역 광장이며, 아래로 일직선으로 뻗은 지도 한가운데 동그라미와 그것을 둘러싼 육각형이 인민광장(대동광장)의 위치다. 그 왼쪽의 ∩모양의 광장이 문화광장(순천광장)과 황궁(현재 지질궁)이 있는 곳이다. 인민광장은 남북으로 뻗은 인민대가(대동대가)와 동서를 가로지르는 해방대로(흥인대로)의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장춘역과 관동군사령부에서 남으로 일직선상에, 건설 중이었던 만황제궁(현재 지질궁)과는 동쪽 아래로 비스듬하게 같은 위치에 있다. 인민광장(대동광장)을 신경시의 통치, 행정, 일상생활의 중심으로 삼았다는 점은 위치 상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곳의 풍경과 현재 남아 있는 건물들은 아직도 흥미롭다.

인민광장의 현재 모습

만주국 경찰청 건물. 현재 장춘시 공안국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만주국 중앙은행. 현재 중국인민은행 길림성 분행.

만주국 전신전화주식회사. 현재 길림성전신공사 장춘시분공사

만주국 시절 미나카이 백화점

만주국 시절 봉악(丰乐)극장

신민대가, 팔대부, 문화광장과 지질궁

인민대가와 인민광장이 도시생활의 중심이라면, 그 남서쪽에는 신민대가와 문화광장이라는 또 다른 관공서 중심지역이 있다. 장춘이 신경이었던 시절의 신민대가의 이름은 순천대가로, 만주국의 핵심 과제인 ‘순천안민(順天安民)’에서 따온 이름으로 보인다.

신민대가의 북쪽에는 황궁이 될 예정이었던 건물이 있는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하 부분 외에 완성하지 못했다. 현재 ‘길림대학 지질궁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건물은 나중에 도면대로 완성한 것이다. 그리고 지질궁 바로 앞에는 거대한 문화광장(궁내부전광장)이 있어서, 신민광장(당시 순천광장)까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신민대가(순천대가)를 바라보고 있다.

만황제궁이 될 예정이었으나 지하만 건설되었다가 건물은 1945년 이후 세워졌다. 현재 길림대학 지질궁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지질궁박물관 남쪽의 거대한 문화광장(순천광장). 만주국 시절 건설될 당시부터 잔디광장이었다.

문화광장 아래로는 신민대가(순천대가)가 뻗어 있다. 이 도로의 양쪽으로는 소위 팔대 통치기구라고 불렸던 치안부(군사부), 사법부, 경제부, 교통부, 흥농부, 문교부, 외교부, 민생부 등 ‘팔대부(八大部)’가 모여 있다. 지금도 거의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는 만주국 관공서의 건물들은 각각의 건물이 거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지금은 헐리고 사라진 서울의 중앙청 건물만한 건축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만주국 수도 신경의 위세를 과시적으로 드러낸 곳이라 할 만하다.

중국 역사문화의 명소 장춘 신민대가.

신민대가는 이곳은 신경도시계획이 ‘녹지도시’를 표방했음을 가장 쉽게 알아챌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신민대가의 가장 남쪽 끝에는 옛날에 황룡공원이라고 불렸던 남호공원이 있는데, 호수가 있는 매우 거대한 크기의 공원이다. 그리고 신민대가의 넓은 도로 한가운데에는 녹지로 가득한 중앙 도로가 있어서, 이 가운데 도로로 들어가면 양 옆의 찻길조차 잘 보이지 않는 공원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오래된 나무, 벤치, 조그만 의자가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이곳은 장춘이 원래부터 ‘전원도시’로 설계되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설계 당시 공원과 녹지 면적은 시내 총면적의 21%에 달했는데, 이것은 유례없이 높은 녹지 비중이었다.(3) 덕분에 장춘에는 아직도 공원과 녹지가 시내 곳곳에 있다.

신민대가 한가운데를 쭉 관통하는 도로 공원이며, 양 옆으로는 차도가 있다.

만주국 문교부. 현재 동북사범대학 부속 소학교로 이용되고 있다.

만주국 흥농부.

만주국 사법부(종합법아) 건물. 현재 길림대학 의학부 소속의 461군사병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만주국 교통부. 현재 길림대학 공공위생학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만주국 군사부의 측면과 정면. 현재 길림대학 의학부 제 1 임상의학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만주국 경제부. 현재 길림대학 제 3 임상의학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만주국 민생부. 현재 길림성 석유화공설계원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 건물은 신민대가가 아니라 인민대가에 있다.

만주국 재정부. 현재 은행 건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 건물 역시 인민대가에 있다.

거대한 팔대부 건물들이 모여 있는 신민대가 거리의 하이라이트는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만주국 국무원 건물이었다. 중국을 위해 헌신한 캐나다 출신 의사 ‘닥터 노먼 베쑨’의 중국 이름 백구은(白求恩)을 따라 길림대 의과대학은 백구은의과대학으로 이름이 지어졌는데, 이 건물은 그 의대의 기초의학원 건물로 사용 중이다. 한국의 적산가옥들이 많은 경우 학교나 관공서 건물로 사용되었듯이, 팔대부의 대부분의 건물들은 현재 길림대 의대 건물들로 사용되고 있다. 덕분에 장춘은 길림대의 거대한 캠퍼스 도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제국 일본 의회(현재 일본 국회의사당)을 차용했다고도 전해지는 국무원 건물은 아쉽게도 공사 중이었다. 이 건물이 왜, 어떻게, 무엇을 공사 중인지는 모른다. 지질궁이 있는 문화광장 주변도 공사 중이었는데, 만주국의 역사적 기억이 담긴 곳이 변형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중국의 동북공정 속에서 만주국의 역사는 자리 잡을 방도가 없어 보인다.

만주국 국무원의 최근 모습과 2017년 7월 현재 공사 중인 모습. 현재 길림대학 백구은의과대학 기초의학원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 앞에 서 있는 닥터 노먼 베쑨(백구은)의 동상이 이 곳이 같은 곳임을 알려준다.

장춘전영제편창 (만영)

장춘이 오늘날 중국 영화의 요람으로 불리는 것은, 주식회사 만주영화협회의 후신인 장춘전영제편창(長春電影制片廠)이 있기 때문이다. 1937년 만주국의 국책영화회사로 설립된 주식회사 만주영화협회는 ‘만영’이라는 약자로 종종 불렸다. 일본인이면서 만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중국인으로 살았던 이향란 등은 만영을 통해서 스타가 되었다. 만영은 만주지역에 200개가 넘는 영화관을 운영했으며, 수백 편이 넘는 영화를 제작했고, 이탈리아 및 독일의 영화도 수입했기 때문에 식민지 조선의 영화광들에게도 중요한 회사였다.

그러나 직접 찾아간 과거의 ‘만영’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옛 기억을 되살려보기 어려웠다. 아직도 건물 앞에 서 있는 모택동의 동상이 문화대혁명 당시 영화 제작이 어떤 수난을 겪어야 했을지 짐작하게 했을 뿐이다. 거대한 건물 안의 전시는 매우 방대하고 화려했지만, 1945년 이전의 만영을 다룬 전시 내용은 단 두 칸에 불과했다. 1949년 중국이 하얼빈으로 갔다가 돌아온 만영을 접수한 이후의 역사만 가득했다. 1950년대 이후 자랑스러운 사회주의 중국 건설의 역사, 그 역사에 충실하게 복무한 장춘전영제편창의 역사만으로 채워진 역사였다. 마치 위만주국은 ‘가짜’라는 접두사가 없어도 원래 없었던 나라, 혹은 원래 크고 작은 나라가 성했던 중국 역사의 일부처럼 다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모택동 동상이 앞에 서 있는 장춘전영제편창 건물.

장춘전영제편창의 방대한 전시 중에서 유일하게 ‘만영’ 시기를 다루고 있는 2칸 중 첫 번째 부분. 전시 대부분은 사회주의 중국 건설에 복무한 영화의 역사로 채워져 있다.

만영 박물관 내부의 화려한 전시들을 포착한 3장의 사진.

장춘의 물난리

장춘에서 떠나기 전날 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는 비가 내렸다. 장춘공항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지만, 버스는 곧 움직이지 못했다. 장춘 시내가 물에 잠겨 도로 곳곳이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버스는 그나마 사정이 괜찮은 도로로 우회하기 위해 꽉 막힌 도로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으며, 곡예하듯 이 길 저 길을 찾아 움직였다. 비행기를 놓칠까 초조해하면서 바깥을 내다보았지만, 시민들은 익숙한 듯 평안하게 움직였다.

중국으로 오기 전, 하얼빈 시내에 한 번씩 소나기가 내리면 도시의 배수로가 좋지 않아 순식간에 물바다가 된다는 하얼빈 유학생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상황을 정작 하얼빈이 아니라 장춘 시내에서 겪게 된 것이다. 밤새 가랑비가 꽤 왔지만 폭우도 아니었고, 어디서든 충분히 올 만한 잔잔한 비가 계속 왔을 뿐인데, 도시는 완전히 물바다였다.

많지 않은 비가 왔지만 물바다가 된 장춘 시내.

물에 잠긴 장춘 도로를 건너다니는 시민들.

신경시가 건설될 때 인구 50만을 예상하되 최대 인구 100만을 바라보고 계획을 짰다고 한다. 당시 도시의 상·하수도 시스템은 최신식이었으며, 당시 실제 거주 인구를 훨씬 뛰어넘는 장기적인 계획 아래 설치되었다. 그러나 현재 장춘시는 더 확장되어 인구 7백만을 넘어 8백만 명을 향해가는 거대 도시가 되었다. 이미 만주국 수도 신경에 설치된 배수로가 제대로 기능할 수 없을 만큼 도시는 확장되고 비대해진 것이다. 공사를 해야 할 곳은 과거의 국무원 건물이나 문화광장 주변의 깨끗한 건물이 아니라, 이렇게 많지 않은 강우량에도 물에 잠기는 배수로와 하수도 같았다.

문득 일제의 신경 도시계획과 만주국의 유산이 여전히 장춘에 깊게 침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유산은 한편으로는 이제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는 하수도 시스템을 통해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만영’의 역사를 지워버렸으되 ‘만영’ 덕분에 중국영화의 요람이 된 영화산업에서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장춘을 대표하는 자동차산업이 영화산업의 상황과 비슷하다. 오늘날 장춘은 중국 최초의 자동차, 최초의 열차를 생산했으며 지금도 생산하고 있는 자동차의 도시로 유명하다. 장춘이 중국 자동차산업의 대명사가 된 것은, 도시계획 때 만든 만주국 황궁 소유의 거대한 예비용지에 1950년대 이후 자동차공장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것은 만주국의 역사를 간직한 신흥 근대도시를 기억에서 지우고 그곳을 사회주의 국가의 산업화 현장으로 채색하려는 국가적 기획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장춘은 여전히 ‘만영’ 덕분에 중국 영화의 요람이듯이, 제국 일본의 철도와 도시계획 덕분에 자동차산업의 대명사가 되었다. 각자 자신들의 역사를 지웠으나 그 역사적 유산 때문에 가능했던 근대산업들, 즉 자동차와 영화산업이라는 전혀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두 가지가 장춘을 상징한다.

최근 만주국의 유산이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과 국가건설에 미친 영향이 학문적으로 논의되고 있지만, 이제 만주국의 역사적 유산은 계속해서 공사를 통해 파괴되거나 변형되고 있고, 그곳에 갔던 조선인들에 대한 기억도 점점 더 옅어질 것이다. 그러나 제국의 철도와 근대도시계획으로 탄생한 이 도시의 역사는 당분간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것은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이 다 같이 잊고 싶어 하는 역사일 것이다. 우리에게 좌절을 희망으로 바꾸려던 각자도생의 개인적 선택으로 만들어진 그 시기는, 결국은 긴 역사의 시선으로 보면 제국주의 기획을 이용하려다 되레 이용당한 선택, 순전히 개인적이었으나 철저히 정치적이었던 것으로 판가름되는 선택들의 집합이었다. 장춘은 그 역사를 숨긴 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참고자료>

1. 김경일 외, <동아시아의 민족이산과 도시: 20세기 전반 만주의 조선인>, 역사비평사, 2004, 19쪽.

2. 越澤明, <滿洲國の首都計劃>, 日本經濟評論社, 1988, 90-91.

3. 취샤오판, <중국동북지역 도시사 연구: 근대화와 식민지 경험>, 박우 옮김, 진인진, 2016, 360쪽.

필자소개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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