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화는 왜 며느리 몫인가
[밥 하는 노동의 기록] 명절 곡소리
    2017년 10월 10일 06:5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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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 후 첫 명절은 추석이었다. 연휴가 시작되자마자 시가에 가서 어머님, 손위 동서와 함께 끝도 없이 일했다. 원래 손이 크신 어머님은 커다란 광주리로 일곱 개 가득 전을 부치고 자식들이 좋아한다며 별별 음식을 만드셨다.

냉장고에서는 재료가 계속 나왔고 음식을 만드는 사이사이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어지러워진 집안을 치우고 다시 음식을 했다. 어머님과 손위 동서는 일을 누구에게 미루는 성격이 아닌지라 나는 잔심부름이나 하는 정도였지만 부엌 주변을 서성이며 좀처럼 앉을 수 없었다.

명절 당일에는 남편의 할아버지 차례에 참석했다. 큰집의 첫째 며느리가 거부하는 바람에 둘째 며느리가 30년째 떠맡고 있는 차례에는 성인만 쳐도 30여명이 참석했고 그 절반은 여성이었다. 차례가 끝나고 늙은 남성들은 상 앞에 앉아 수저와 술잔을 받았고 조금 젊은 남성들은 그들의 술시중을 들었다. 어린 남성들은 방 안에 있거나 아예 오지 않았다.

며느리를 데리고 온 늙은 여성들은 쪼그려 둘러 앉아 근황을 나누었고 젊은 여성들은 계속해서 전을 썰어 담고 국과 밥을 푸고 과일을 손질했다. 방 안에서는 요구가 많았다. 늙은 남성들은 ‘조금만 달라’는 말로 염치를 차리려 했다. 국을 조금 담건 많이 담건, 사과를 한 쪽 썰건 열 쪽 썰건 일은 일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는 듯했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여성들 모두는 수저조차 받지 못했다. 늙거나 젊거나 여성들은 부엌 근처에 옹기종기 앉아 손가락으로 마른 송편과 식은 전을 집어먹었다. 일회용 젓가락조차 없는 것으로 봐서 이 집에선 이것이 당연한 듯했다. 손위 동서는 내게 가장 품이 많이 가는 꼬치전 중에서도 모양이 괜찮은 것을 골라 건넸다. “동서, 배고프지? 이거라도 먼저 먹어.”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어쩔 줄 몰랐다.

차례상 차림을 주관한 그 댁의 형님도 손으로 전을 집어먹다 웃으며 말했다. “아유, 명절에 한 번 이렇게 먹는 것도 재미지요.” 나는 웃을까 울까, 소리 지를까 화낼까, 망설이다가 건넨 손이 부끄러울까 싶어 몰래 전을 내려놓았다. 이 치욕은 무려 2003년의 일이다. 내가 열 살 때 쯤엔 2003년이면 달나라로 소풍 갈 줄 알았다.

나의 시가 식구들은 매우 유쾌하고 다정한 사람들이라서 나는 그 분들을 오래 뵐 수 있는 명절을 항상 기다렸다. 언제나 나를 먼저 쉬게 해주시는 어머님과 손위 동서의 배려에 감사했고 맛있게 먹는 식구들과 밥상을 나르고 치우는 남편이 보기 좋았으며 수고했다 말씀하시는 아버님의 한 마디가 고마웠다.

내가 힘들어도 좀 참고 양보하며 얻는 이 화목이 혼인이라는 제도 안에 편입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안온함이라 믿었다. 하루 종일 부엌을 서성이는 것이, 밥을 먹으면서도 설거지가 언제 얼 만큼 쌓이는 지 확인하며 ‘제가 할게요!’라고 먼저 외치는 것이, ‘에미야~’라는 부름에 살갑게 대답하여 기쁨을 드리고 가끔 되바라지게 답하여 시어른들께서 당돌한 며느리를 얻었다며 남에게 자랑할 거리를 드리는 것이, 어머님의 손맛을 열심히 배우려는 것이, 그래서 내 존재를 지우고 며느리로서 존재하는 것이 낫다 여겼다.

그것이 지겨워지기 시작한 것은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였다. 내 손으로 제사와 차례를 차리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어머님은 아버님의 의례에 오는 당신의 시가 식구들 눈치를 보며 며느리들을 닦달했다. ‘엄마는 너희들이 욕먹는 것이 싫구나’ 하시며 상에 올라가는 음식의 가짓수를 계속 늘리셨다. 종류에 맞춰 홀수로 준비하는 제수는 제기가 모자랄 정도의 양이었다.

나는 그 때부터 명절 내내 애곡성을 끊지 않았다. “어머님! 많아, 많아도 너무 많아, 그만 해, 가가례라는 말도 몰라? 원래 남의 제삿상엔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게 아닌데 왜 이렇게 눈치를 봐, 어머님이 늙은 시댁에 보는 눈치에 젊은 우리가 말라 죽을 지경이야, 자꾸 이러면 나 우리 엄마한테 다 이를 거야, 친정으로 가 버릴 거야, 조상 덕 본 사람들은 다 비행기 타고 해외여행 갔다고!”

남편이 옆에서 거들었다. “엄마, 아버지는 피자를 젤로 좋아했으니 그냥 피자 놓고 말자, 원래 차례라는 게 차 한 잔 올리고 마는 거야.”

그러나 어머님은 완강했다. 세상이 엄연하고 도리가 지엄한데 어찌 하던 것을 멈출 수 있냐고 하셨다. 나는 그제야 노동의 총량이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러나 어머님께 구조의 문제를 지적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이 가난한 어른은 너무나 다정하고 여렸다. 명절이 되면 내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알파벳도 모르면서 외국 맥주를 골라 사놓고 1초도 쉬지 않는 나의 ‘불평’을 웃으며 받아주었다. “그래, 그게 맞지. 그런데 엄마는 옛날 사람이라 아직은 그렇게 못해. 나 죽거든 그 땐 네 맘대로 해도 돼.”라는 말에 나는 “어머님, 언제 죽을 건데!”라 대꾸했다.

그렇게 내내 죽는 소리를 하면서도 나는 내 몫의 노동을 했다. 명절이 지나고 나면 애곡성하면서도 결국은 이 가부장제에 알뜰히 부역했다는 생각에 혼자 오래 괴로웠다. 그 괴로움이 잊힐 때쯤 다음 명절이 돌아왔고 나는 또 머리를 싸매고 들어앉았다.

이제 더는 이렇게 못 살겠다 싶어 남편에게 이번 명절은 좀 다르게 보내겠다 말했다. 남편은 대뜸 짜증스런 목소리로 “나는 명절 때 놀아? 나도 할 만큼 하잖아. 내가 안 해? 내 기억엔 내가 한 끼 떡볶이 해서 다 먹이고 치웠는데. 그래, 알았어. 시댁도 가지 말고 처가도 가지 말자.”라 했다.

한 두 끼를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밤을 치고 전을 부치고 청소기를 돌린 그의 노동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장 보고 손질하고 다지고 갈고 무치고 삶고 찌고 볶고 부치는 것도 노동이며 모든 것을 치우고 매조지하는 것도 노동이다.

명절에서 그의 노동은 호의고 나의 노동은 의무다. 그는 안 해도 되는 노동을 해서 칭찬받고 나는 해야 하는 노동을 해서 욕만 안 먹는 정도다. 그의 휴식은 명절이라 당연한 것이고 나의 휴식은 명절인데도 배려 받는 것이다. 맥락을 지우고 ‘나도 일했어, 왜 내 노력을 몰라주니’라고 말하는 15년 째 남편인 남성이 순간 낯설어져 말문이 막혔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다시 풀어나가야 하는 것일까 가만 앉아 이 얽히고설킨 매듭을 바라본다. 칼로 내리쳐 끊기엔 아직 아깝고 새로 등장한 매듭까지 풀기엔 너무 지친다. 왜 지혜는 나만 발휘해야 하는 것이며 울화는 며느리만 다스려야 하는 것인가. 이 와중에 대통령은 성묘도 못하고 고향도 못 가 아쉽지만 어머님을 모시고 차례는 지낼 수 있어 다행이라는 기사가 떴다. 얼마 전엔 대통령의 배우자가 직접 차례 장을 봤다.

그래, 시민 개인으로 살고자 하는 내가 문제다. 그냥 계속 노비로 살면 나 빼놓고 다 편한 것을. 2017년에도 명절이 내게 다가와 비웃었다. ‘까불고 있네, 세상 그렇게 쉽게 변하는 거 아냐.’ 이번엔 제대로 얻어맞았지만, 어떻게든 다시 길을 찾겠다. 그만 갈 수도 있고 달리 갈 수도 있지만 왔던 길을 이어 걷지는 않을 작정이다.

연휴 시작 전 날, 내 부엌에서 내가 먹고 싶어 만든 전. 삼색전, 호박전, 두부전, 전유어, 완자, 배추전.

필자소개
독자. 밥하면서 십대 아이 둘을 키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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