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딸의 일지,
    ‘겨울 지리산에 오르다’
    [누리야 아빠랑 산에 가자-26] 행복
        2017년 09월 22일 11:0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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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1월 1일 수요일. 혜인이가 준 이 공책은 사실 겁나 귀여워서 2학년 되면 공부 공책으로 사용하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일기장이 되어 버렸구려. 여튼 2014년의 첫 일기를 나는 지리산 산행 일지로 장식해 보겠어.

    2013년 12월 31일 천왕봉에서

    2013년 12월 30일 날 세은이네 학교 축제 갔다가 집으로 올 때 엄청 아쉬웠다. 역시 방송고라 그런지 마지막에 뉴이스트도 오고(별 관심은 없지만), 세은이네 무대도 멋있었고 훈내 나는 남정네들도 많았고…….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집에 오자마자 밥을 먹었다. 밥 먹고 아빠와 짐을 챙기고(내 짐만) 차안에서 오래 못 잘 것을 감안해서 쪽잠을 잤다. 1시간 자려고 누웠는데, 사실 잡생각이 많아져서 30분밖에 못 잤을 거다. 10시에 깨어나 머리 감고 세수하고 옷도 입고, 지리산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여기에 “그때 굉장히 두근거렸지.”라고 적고 싶지만 잠이 덜 깨어 ‘무뇌’ 상태였던 듯싶다. 택시를 타고 남부터미널로 가서 표를 뽑고 시간이 되어 12시에 고속버스에 승차했다.

    31일 날 새벽, 약 3시간 반 동안을 짧은 수면과 함께 고속버스 안에서 보냈다. 처음 타 보는 우등고속이었다. 좌석 간의 사이가 넓고 의자도 편하고. 엉덩이가 약간 배겼지만 그건 참을 만했으니 패스. 아무리 짧게 걸려도 서울에서 경남 진주인데. 새벽이라 그런지 3시간 반 만에 와 버렸다. 비몽사몽 한 상태로 진주 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리니 온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갑자기 깨어, 또 새벽이어서 정말 소름끼치게 추웠다. 사시나무처럼 떠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아빠가 오뎅을 사줬다. 2개를 흡입하고 국물도 마셨다.

    진주시외버스터미널 오뎅가게를 배경으로

    아, 오뎅 먹기 전에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어떤 택시 기사가 “지리산 가지요? 중산리!”라 하면서 택시에 어서 타라고 했다. 아빠는 그 기사를 물리치기 위해 일행이 있다는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약간은 따듯한 시외버스 터미널 안으로 가서 6시쯤부터 운행을 시작하게 될 중산리행 차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가난한 아빠는 텅 빈 대합실에서 딸아이가 추위에 떨며 지치게 만들었다.

    약 2시간 반의 시간 동안 버즈런처에 들어가서 홈팩도 바꾸고, 화장실도 두세 번은 들락날락거리고, TV도 보고(굉장히 지루했지만 그 당시엔 흥미로웠던). 차라리 잠을 잘 걸. 잠도 안 오고, 그래서 오뎅 2개를 또 먹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중산리로 가는 버스를 타고 약 1시간 동안 또 얕은 잠에 빠졌었다. 버스에서 내리고 지리산 입구까지 걷는데 정말 자면서 걸었다. 그 당시 얼마나 피곤했는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딸내미는 힘들어하면서도 묵묵히 걸었다

    입구에 다다라 음식점과 가게가 있었다. 상큼히 무시하고 쭉 걸어가다 내가 아빠한테 “아빠, 버너가스 산다며.”라니까 왜 이제 말했냐고 적반하장! 어이없었다. 다시 가게로 내려와 가스를 사고, 그냥 거기서 밥을 먹기로 했다. 아침은 라면! 밥 먹기 시작했을 때가 8시쯤이었다.

    우리는 중산리 매표소 입구의 길가에 자리를 잡고 아침으로 라면을 먹었다.

    하여간 9시 반에 드디어 본격 산행을 시작했다. 엄마(2년 동안 지리산 산행 유경험자)가 엄청 춥고 눈도 많다고 해서 핫팩 오지게 많이 챙겨 갔는데 로터리대피소 갈 때까지 눈을 찾기 힘들었다. 로터리대피소까지 가는 동안 차 안에서 쪽잠을 자 피곤이 누적되어서인지, 엄청난 피곤이 몰려왔다. 정말 힘들었다. 아빠의 해결책으로 육포를 먹었다. 그래도 입이 움직이니 정신이 약간 맑아져 로터리대피소까지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로터리대피소에서 참아왔던 오줌을 누러 화장실을 갔을 때 깜짝 놀랐다. 대피소가 해발 1000미터쯤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변기가 시골 재래식 변기였던 것이다. 발 빠질까, 덜덜 떨면서 오줌을 쌌다. 로터리대피소에서 점심을 먹는데, 밥이 설익어서 그냥 김치찌개에 넣고 김치죽을 만들어 먹었다. 꽤 좋았다. 밥 먹고 정리하는데 대피소 직원이 천왕봉 가는 길 1시부터 통제하니까 빨리 올라가라고 엄청 잔소리하고 닦달해서 올라갔다.

    엄마가 천왕봉까지 올라가는 길이 무척 지루하고 험난하다고 했는데 별로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험난하고 지루한 바위길이 새하얀 눈으로 포장되어 평평한 오르막길이 되었기 때문에 눈이 즐거웠다. 아주 천천히 속도를 일정하게 올라가서 천왕봉 밑까지 1시간 40분쯤 걸렸다. 천왕봉 급경사 코스 바로 전에 천왕댐(?)이 있었다. 아빠가 그곳 물을 꼭 먹어야 되는데 얼어 있을까 봐 걱정을 했다. 다행히도 물이 아주 눈꼽만치 나와서 물을 마실 수 있었다. 남강의 근원이라던데 사실 정수기 물과 큰 차이점을 느끼진 못했다.

    딸이 천왕샘에서 물 한 모금을 마신 뒤에 정상을 향하고 있다.

    물을 마시고 정말 미끄러질 것 같은 급경사 코스에 진입했다. 약 100미터밖에 남지 않았지만 괜히 힘쓰다 지치면 곤란해질 것 같아서 느릿느릿 걸어 올랐다. 아빠는 연신 “이 길이 엄청 힘든데, 눈이 도왔네.”라고 말했다.

    천왕봉에 다다르니 매서운 바람이 날 맞이했다. 비석 옆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잠시 장갑을 벗었는데 정말 손이 얼어서 부러지는 줄 알았다. 엄청 춥고 무서웠지만 사진에는 예쁘게 나와야 하니 열심히 포즈를 취했다. 아빠랑도 몇 컷 찍었는데 찍은 사진 모두 예쁘고 멋있게 나왔다. 이 사진들은 길이길이 평생!! 보관할 것이다.

    딸과 나는 지리산 정상의 살을 에는 강추위에도 굴하지 않고 예쁜 추억을 남겼다.

    천왕봉을 정복하니 가슴이 엄청 벅차고 나 자신에 대한 뿌듯함이 가슴에 넘쳐났다. 북한산 백운대 갔을 때도 뿌듯했지만 백운대 2배 높이인 천왕봉을 밟은 그 느낌은 나의 글발이 후달려서 이 공책에 표현할 수 없다. 천왕봉을 맘껏 누린 후 내려오는 편한 길을 따라 걸으며 장터목대피소로 출발했다. 장터목대피소까진 굉장히 편하게 가서 딱히 기억에 남은 사건은 없지만 내가 산을 밟고 있다는 그 느낌이 굉장히 포근했던 것 같다.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해서 오줌을 누고 잠시 쉬었다 세석으로 떠났다.

    딸은 무척 힘들었을 텐데도 전혀 투정부리지 않았다. 제석봉 고사목 지대에서

    장터목에서 세석까진 3.4킬로미터. 엄마 말로는 코스가 편하다고 했는데, 그때 몸이 지치고 피곤해서 그런지 나에겐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쉬는 주기도 굉장히 짧았고 걸음도 엄청 느렸다.

    체력의 한계에 다다른 우리는 걷다 쉬다 반복했다. 눈이 참 푹신했다

    세석산장에 도착했을 때 정말 감동이었다. 마치 산을 다 타고 내려온 느낌(?) 같은 게 들었다. 세석에서 방 번호를 뽑고 담요를 받는데 아빠가 어떤 아줌마 한 분을 만났는데, 알고 보니 그 분이 노동당 당원이셨다. 그 분께서 자리를 찾아 주시고 담요도 놔 주셨다. 자리를 정리하고 실내 취사장에 자리를 잡았다. 맛나는 목살을 굽는데 가위가 없어서 칼로 잘라서 먹거나 그냥 이로 뜯었다. 고기는 정말 꿀맛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내가 아파서 많이 못 먹은 것이다.

    대충 고기를 먹고 아빠가 뒷정리를 하는 동안 방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침낭을 펴서 그 안에서 바지를 갈아입어야 하는데 침낭 잠그는 법을 몰라 아빠가 만들어줬다. 뒷정리하는 아빠를 기다리다가 소등 시간인 8시가 가까워졌다. 애가 타서 방에서 침낭으로 들어가 팬티도 갈아입고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화장실에 가서 몸도 닦고, 방으로 들어와 바지까지 제대로 갈아입었다. 물티슈로 닦는데도 정말 개운했다. 내가 잘 준비가 끝나기 전에 소등이 돼서 사람들 눈치 보는데 옷 정리하고 짐 정리하느라 혼났다. 제대로 자려고 누웠을 때 나의 차림새는 내복 상의+체육복 상의, 레깅스+수면 바지였다. 새벽에 너무 껴입은 탓인지 계속 깼다. 그래서 침낭을 반만 덮고 잤다. 엄마는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했는데 나는 9시쯤에 잠들어서 6시 반까지 잤다. 중간에 더워서 깬 것 말고도 어떤 여자가 주위가 꽤 시끄러웠는지 한마디 해서 나도 덩달아 깼다.

    그리고 아침, 2014년 첫 해를 보러 가는 사람들로 정신없어서 또 깼다. 6시 반에 일어나서 옷 갈아입고 짐 정리를 한 후 아빠와 만났다. 우리는 그냥 일출을 보는 대신 아침밥부터 먹었다. 인스턴트 된장국이었는데 김치랑만 먹어도 정말 꿀맛이었다. 아, 여담인데 일출 보러 간 사람들이 안개가 심해서 해를 못 봤다고 한다. ㅋㅋ. 여튼 밥을 먹고 밑에 똥이 가득한 재래식 변기에서 발 안 빠지게 힘 뙁 주고 응가도 했다.

    세석산장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다

    모든 준비를 하고 세석산장 앞에서 사진 한 번 찍은 후에 백운동 코스로 내려갔다. 처음에 가파른 계곡으로 갈 땐 힘들었지만 아빠랑 떠들고 육포 먹고 경치 구경하면서 내려가니까 금방 도착했다. 시멘트 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황홀함과 뿌듯함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대견함을 느꼈다.

    산행을 마친 딸아이는 황홀함과 뿌듯함과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으로 하늘을 향해 만세를 불렀다. 백무동 입구에서

    백무동 입구에서 또 인증 샷 찍고 아빠랑 표 산 다음에 응가를 했다. 오랜만에 양변기를 보니 살 것 같았는지 똥을 계속 싸댔다. 똥꼬가 아릴 정도로 응가를 싸고 밥집을 찾아 돌아다녔다. 가정집 같은 가게에 들어가서 흑돼지 주물럭이랑 두부를 시켰다. 아빠가 15년 전쯤 왔던 곳인데 그때는 엄청 크고 진짜 흑돼지를 잡고 그랬단다. 음식을 기다리는데 인심 좋은 주인 할머니가 직접 담그신 팥죽을 주셔서 맛있게 해치웠다. 메인 음식도 정말 대박이었다. 고기가 정말 쫀득하고 두부도 고소하고 김치도 시큼했다. 진짜 배 터지게 먹었다.

    딸아이가 맛나게 먹는 모습만으로도 나는 벅차올랐다

    아, 밥 먹기 전에 이빨을 닦았는데 찝찝함이 사라져서 정말 날아갈듯이 개운했다!! 여튼 버스를 기다리고 버스에 탔을 때, 벌써 집에 다 온 기분이었다. 차에서 자다가 중간 휴게소에서 오랜만에 휴게소 치킨팝콘도 먹고. 서울에 도착! 사실 택시를 타고 싶었는데 남부터미널이 아니라 동서울이어서 지하철을 타고 갔다.

    이 지리산 일지를 쓰는 게 사실은 약 2주일이 지난 뒤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기억이 생생하다. 아빠가 산에서 “지리산에서 힘들었던 것 기억해. 공부하면서 힘들 때 떠올려 봐.”라고 했던 것처럼 계속, 계속 상기할 것이다. 무엇보다, 지리산 산행은 나에게 굉장한 자신감, 잊을 수 없는 추억, 감각, 그리고 아빠가 감옥에서 어떻게 버텼는지 들으면서 나도 정신적으로 한층 성숙해질 수 있었다.

    아빠랑 고2 여름방학 때 설악산을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곳에서 또 한 번 좋은 추억 만들어 보고 싶다. 이런 기회를 준 아빠에게, ♡♡사랑해♡♡

    백무동에서

    꿈같은 일이었다. 딸내미와 지리산을 올랐다. 과연 대한민국 부모 가운데 고등학생 자식과 도란도란 지리산에 오르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내 마음에 무언가 한가득 들어찼다.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없었다. 행복이란 표현도 턱없이 부족했다.

    2013년 12월 30일 밤에 집을 나섰다. 양재터미널에서 12월 31일 0시 버스를 탔다. 진주에 도착해 기다리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중산리에 내렸다. 거기서부터 세석대피소까지 12.4킬로미터, 평탄한 땅에서도 쉽지 않은 거리였다. 피로가 배로 늘어나는 산길이고, 게다가 거기에 또 배가되는 눈길이었다. 애초엔 천왕봉 바로 밑의 장터목대피소 예약을 염두에 뒀다. 9킬로미터면 딸내미에게 적당하다 싶었다. 그러나 예약할 수 없었다. 해마다 12월 31일과 1월 1일의 지리산 천왕봉은 해를 보기 위한 순례지였다. 장터목대피소는 순식간에 예약이 끝났다.

    진주에서 택시를 탔어야 했다. 딸아이가 힘들어 하는데, 나는 곤궁한 처지를 걱정했다. 06시 10분 첫 버스가 운행될 때까지 2시간 30분이나 추위에 떨도록 만들었다. 딸애는 그때 마신 어묵 국물 맛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 했다. 배고픔이 반찬이라고, 춥고 떨리는 상황이 꿀맛으로 느껴지게 만들었을 터였다.

    힘들었지만 천왕봉까지는 견딜 만했다. 칼바람 맞으며 천왕봉의 풍경을 가슴에 담고 사진을 찍은 뒤에, 장터목대피소까지 가서 잠시 쉬었다. 딸과 나는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어깨는 아팠고 다리는 무거웠다. 하지만 충분하게 쉴 수 없었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딸애를 앞장세웠다. 나는 천근만근이었다. 아이도 몹시 힘들고 고통스러울 터였다. 종이 한 장 보태지는 것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배낭을 넘기라고 여러 차례 권유했다.

    딸아이는 끝내 스스로 짊어지고 갔다.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뛰어넘겠다는 굳은 심지가 아닐까 싶었다. 딸내미는 꿋꿋하게 앞서 걸었다. 그러다 한계에 도달한 우리는 어스름한 지리산 능선의 수북하게 쌓인 하얀 눈 위에 드러누웠다. 새하얀 눈은 푹신했고, 거무스름한 하늘은 푸근했다.

    “아~, 이대로 잠들고 싶다.”

    딸아이는 말했다. 내 마음도 굴뚝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얼마간 누워 있었다.

    “아빠 이제 가자. 배고프니까 빨리 가서 고기 구워 먹어야지.”

    딸아이가 먼저 재촉했다. 이번에도 딸이 앞섰다. 우리는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겼다. 어둠 속에서 저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가 구름 위에 섬처럼 떠 있었다. 멋진 풍경이었다. 딸과 나는 잠시 멈춰 감상했다. 마침내 세석대피소에 도착했다. 대피소 행정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조병하와 이애향을 만났다. 인천에서 사회운동을 하는 나의 동료들이었다. 2박3일 일정으로 종주를 한다고 했다. 딸과 나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 취사장으로 갔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대부분 마무리한 상태였다. 서둘러 고기부터 구워 딸아이의 배를 채우게 했다.

    “쩔어. 꿀맛이야.”

    아이는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다음날은 여유 있게 하산했다. 누적된 피로로 힘들었다. 마침내 백무동에 도착했다. 산길이 끝나고 포장길에 들어섰다.

    “만세! 아~, 드디어 해냈다!”

    딸아이는 감격해서 만세를 불렀다. 가슴이 뭉클했다. 아이를 따뜻하게 품어 주고 인내심과 추억을 선물해 준 지리산의 정령들에게 깊이 감사했다. 딸의 흥분은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아빠, 나 지리산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어떻게 잊겠어!”

    지리산 동반산행 이후 무척 바빴다. 각종 업무가 나를 따라다니며 죽이겠다고 덤벼들었다. 기록해야지, 기록해야지, 하다가 그예 놓치고 말았다. 순간순간의 그 많던 풍경, 그 많은 대화, 그 많은 아이의 표정들……, 내 머리에 고스란히 남기지 못한 채 가슴에만 남겨야 했다. 딸아이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일기를 부탁했다. 딸은 머뭇대다가 동의했다.

    필자소개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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