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체제와 노동운동: 회고·성찰·전망
민주노조의 재성장 및 대중적 정당성 확대를 위해
    2017년 09월 21일 11:4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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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부설 민주주의사회연구소가 주최하는 ‘6월 항쟁 30주년, 87년 체제와 부산지역 노동운동’ 토론회 발제문을 필자 동의를 얻어 레디앙에 게재한다. 논문 형식이고 다소 긴 분량이지만 나누는 게 적절치 않은 듯하여 한 번에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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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계급은 혁명적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마르크스, 『자본』

“높고 멀리 나는 새는/ 뼈 속까지 비우고/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
모든 것을 품는다.”
신용복, [하방연대] 중에서

87년 이후(87년 체제(1))의 짧은 역사

2017년 9월은 87년 노동자대투쟁 30주년 되는 해이다. 1987년 6월 항쟁이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위한 실질적인 진척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라면, 같은 해 7,8,9월 노동자대투쟁은 ‘노동 없는 민주주의’에서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향한 거대한 장정의 출발점이었다.

전두환 독재정권의 폭압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물밑으로 전개되던 노동자운동은 85년 구로동맹파업을 기점으로 잠재적 폭발력을 보여주었다면, 87년 노동자대투쟁은 노동운동 및 노동자들이 당당한 사회적 주체로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대엔진 노동조합 설립으로 시작된 87년 7,8,9투쟁은 전국적으로 3,749건의 쟁의와 연인원 1,262,000명이 참여하는 거대한 물결로 휘몰아쳤으며 이 투쟁의 파고는 1988년, 1989년으로 이어졌다(한국노동연구원, 2012).

공돌이 공순이들이라고 폄하되던 노동자들은, 이제 “작업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주체”가 된 것이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노동자의 자기선언, 인간선언이었으며, 임금노예로 살아왔던 노동자들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 노동자의 정체성을 드러낸 것이 87년 대투쟁”이었다(최영기 외, 2001)

그러나 한국 노동운동의 전성기는 짧게 지나가고 IMF 구조조정을 맞이하였다. 2000년대 이후 민주노조운동에는 지속적인 위기 담론이 나타나며 이를 타개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이 제시된다. 그러나 어느 하나 실질적인 개선 없이 문제는 지속적으로 누적되어 왔다. 윤진호 외(2013)는 민주노총의 위기를 정체성의 위기, 대표성의 위기, 동원력의 위기, 내부소통의 위기로 범주화했다. 정체성의 위기란 민중운동의 중심인 민주노총이 노동운동의 이념과 사회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진단이다. 대표성의 위기란 민주노총이 대기업 및 공기업 노동조합 정규직을 대표하면서 중소기업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표하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동원력의 위기란 노동자 대중의 보수화와 연대의식 약화를 의미하며 내부소통의 위기란 총연맹과 산별노조, 지역본부와 산별지부 및 지회, 노동운동의 주요 정파 간의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음을 지적한다.

노동운동은 대내외적으로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 2010년대 이후 한국 경제는 본격적인 저성장 국면으로 진입했다. 이는 한국경제의 수행능력의 약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와 세계수요 감소가 수출 감소로 이어지며 한국 경제성장을 이끌던 주력산업들이 위기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이는 항구적인 구조조정을 예견한다. 재벌 주도 성장과정에서 대기업-중소기업 간 격차 심화를 비롯하여 한국은 노동자 내부의 격차가 가장 빠르게 증가하는 국가가 되었다. 민주노총은 자본 측이 강요하는 구조조정에 대한 전략적 대응방안을 갖지 못하며 산별노조는 산별 내부의 노동자 간 격차를 줄이는 데 실패해 왔다. 민주노총은 대기업 정규직의 보호막이라는 비판에 갇혀 대중적 헤게모니를 상실해가고 있다. 노동운동의 미래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 글의 목적은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의미를 짚어보고 그 이후 노동운동의 전개 과정을 주요 쟁점별로 살펴보며 노동운동이 걸어온 길을 회고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1987년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한국 노동운동이 어떤 과정을 통해 항구적인 위기 담론의 대상이 되어 왔는가를 성찰해보고자 한다. 2장은 1987년 이후 노동자대투쟁의 의미를 살펴본다. 3장은 전노협 건설이후 노동운동의 전개 과정을 세 개의 쟁점을 중심으로 정리한다. 첫째 민주노총 건설과정에서 제기된 전투적 노조주의와 사회적 조합주의라는 쟁점, 둘째 구조조정 및 노동시장 유연화에 대한 노동운동의 대응, 셋째 산별노조와 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노동운동의 성장 및 대중적 정당성을 확대하기 위한 방안을 간단히 제시하고자 한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의 한 모습(사진=민주노총)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의미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1985년 대우자동차투쟁과 구로동맹파업은 전두환 폭압체제 하에서도 노동운동이 차츰 고개를 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1986년 인천 5.3항쟁은 그 연속이었다. 이 두 투쟁은 향후 노동운동의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임영일, 2001).

구로동맹파업은 학생출신 활동가와 노동자들의 연합된 행동이 만들어낸 노동운동 내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인천 5.3항쟁은 민민투와 자민투가 주도하는 대학생 조직, 인천지역노동자연맹(인노련),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등 학생출신 활동가들이 주도적으로 조직한 노동운동조직들이 결합된 대규모 투쟁이었다. 직선제 개헌 요구와 함께 대중들의 저항이 점차 고조되는 등 정세는 전환되고 있었다. 1987년 『실천문학』 봄 호는 “노동운동은 바야흐로 고양의 단계에 들어섰다.”고 평가했다. 1980년 중반 이후 노동자운동 내부에서 대중적 불만이 점차 고조되고 있었으며 이는 민주화에 대한 사회적 열망과도 연결되어 있었다(최영기 외, 2001).

6월 항쟁은 노동자대투쟁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직접적 계기였다. 6월 항쟁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대학생과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주도한 반면 블루칼라 노동자들은 주변적인 참여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일면적인 평가이다. 비록 6월 항쟁에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거리투쟁에 결합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항쟁기간 가두투쟁에 적극적으로 결합하고 있었다. 마산과 창원, 울산 등지의 거리투쟁을 이끈 주체들은 대학생이 아니라 노동자들이었다(김하경, 1999). 6월 항쟁 구속자의 50%는 노동자였다(배규식 외, 2008). 민주화 투쟁을 주도한 것은 중간계급이었으나 투쟁의 현장에 참여한 이들 가운데 노동자들이 많았다.

6.29 선언 이후 현장으로 돌아온 노동자들은 곧바로 현장 내에서 민주화를 요구하기 위해 노동조합 건설 및 사업장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돌입하게 된다. 당시 생산현장은 군사주의 문화, 노동에 대한 강압적 통제, 관리자들의 인격모욕 등으로 인해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문화가 일상화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6월 항쟁을 경험했던 노동자들 사이에서 작업장 내에서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확산되는 것은 항쟁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임영일, 2001; 노중기, 1997). 그러므로 7.8.9 노동자 대투쟁은 6월 민주화 항쟁의 일부분으로 해석되기보다는 작업장 내에서 불만의 고조, 저항의식의 성장과정에서 6월 거리항쟁에 참여한 노동자들의 투쟁 경험이 현장에서 노동조합 건설, 노동쟁의의 확산으로 전환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정당하다.

<표 1> 1987년 전후 노동조합 건설 및 노동쟁의 지표

<표 1>에서 보듯이, 19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 쟁의건수는 3,789건이며, 이는 1986년 쟁의건수 276건의 13.7배이다. 이 시기 노동조합법에서는 노동자들의 단체행동권을 제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쟁의들 대부분 불법이었으며, 농성, 시위 등 격렬한 대중동원을 이끌어 내었다. 쟁의발생 건수, 참가자 수, 노동손실일 모든 면에서 1987년은 한국 노동운동사의 질적 도약을 알리는 지표였다. 7.8.9 대투쟁을 겪으면서 울산, 마창, 부산 지역에서 민주노조가 폭발적으로 건설된다. 1995년 출범하는 민주노총에 소속된 이들 지역 노조 대부분은 노동자대투쟁 시기와 이후 2~3년 내에 건설된 노조들이다(배규식 외, 2008). 이 시기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 건설되면 임금상승, 노동조건 개선, 관리자들과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자주성, 비인간적인 굴종과 무시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표 1>에서도 보듯이 노동자대투쟁은 1989년까지 지속된다. 이 시기까지 대기업에서 노동조합은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그룹 소속 계열사들 내에서 노동조합 건설이 일반화된 것처럼 많은 대기업들에서 노동조합 결성은 꾸준히 지속된다. 비록 개별 대기업 내에서 노동조합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지 않았지만 노동조합의 존재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단위 사업장 내에서 노조 건설 및 노조 인정 투쟁, 노사관리에 대한 저항이 꾸준히 진행된 것이다.

작업장체제 내에서의 노조 인정과 노동법 개정 투쟁, 단결권 및 단체행동권 인정을 둘러싼 투쟁은 대정부 투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 기업과 지역을 넘어서는 노동자 내부의 단결을 위한 연합조직의 건설은 노동운동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그 와중에서 지역별로 지역노조협의회(지노협)가 건설된다. 지노협은 1989년 11월 전국 16개 지노협, 630개 노조, 26만 조합원을 포함하는 조직체로 발전한다. 지노협은 특정 세력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개별노동조합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협의하고 연대하기 위해 지역적으로 이뤄진 자발적인 노력의 결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1989년 지역 노동조합 운동의 성장에서 활동가조직들의 기여를 부정할 수는 없다. PD는 노동자정치 세력화를 중요한 화두로 삼았던 반면 NL계열은 한국노총의 민주화를,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등은 제2노총 건설을 주장했었다.

이런 점에서 87년 노동자대투쟁과 그 이후 3년간 지속된 투쟁은, 그 폭발적인 저항의 분출에 비해 노동자계급의 급진적 요구사항이나 사회변혁적 전망이 크게 반영된 투쟁의 결과는 아니었다. 87년 대투쟁은 노동자들의 생존권적 요구와 인간 존엄성을 요구하는 투쟁이었으며, 노조의 민주성과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이었다(김동춘, 1995). 그것은 작업장 수준에서의 시민권을 요구하는 투쟁으로서 노동자들이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집단으로서 사회적 존재로 인정받고자 하는 투쟁의 산물이었다. 이 시기 투쟁은 물리적 폭력을 동반하는 전투적 성향이 강했지만 그것은 체제 변혁을 지향하는 계급투쟁이라기보다 노동조합의 승인과 인정을 둘러싼 투쟁의 성격이 강했다. 1989년 공안정국이 펼쳐지고 노동운동의 투쟁이 점차 줄어드는 방향으로 진행되긴 했지만 1990년에 이르면 노동조합은 이제 거부할 수 없는 사회적 실체가 되었으며 사용자 측에서는 이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최영기 외, 2001).

이 시기 노동자운동의 투쟁과 이념을 ‘노동해방사상’이라고 단정하는 것에는 주의해야 한다. 노동해방사상은 가장 낮은 수준에서는 자주적, 민주적 노동조합의 쟁취, 임금인상과 노동자들의 사회적 권리의 인정을 의미하지만 보다 궁극적으로는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의 철폐, 노동자들이 정치적 주체로서 공동체 의사결정에의 참여, 생산현장에서의 노동자들의 자주적 관리를 포함한다. 1987-1989년 시기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에 등장한 노동해방이라는 표현은 낮은 수준의 요구투쟁, 노동의 시민권,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 개선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만 이 시기 노동해방은 노동자들의 단결권 인정, 노동조합의 자주성 실현, 개별 기업, 사업장을 넘어서는 노동자들의 연대를 표현하는 것이기에 장기적으로 노동자계급의 계급형성과 사회적-정치적 조직화를 내포하고 있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노중기, 1997; 최기영 외, 2001)(2).

1990년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 역사

1) 전노협에서 민주노총으로

1987년 노동법 개정을 통해 노조 설립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그러나 노동쟁의법은 3자 개입금지 조항 등 독소조항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노동조합은 기업을 넘어서는 형태의 조직을 만들지 못했다. 한국 노동운동의 출발점은 산별노조가 아니라 기업별 노조였다. 더군다나 당시 노동조합은 초기 건설 상황이었고 노동조합을 지켜내기 위해 노동법 개정을 중요한 목표로 설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조합 스스로 기업 단위를 넘어서는 조직형태를 구상하지는 못했다. 조합원들은 노동조합이 건설되면 노동조건이 개선되고 임금협상에서 유리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다. 노동조합은 이와 같은 조합원들의 현실적인 요구에 부응해야 했기 때문에 기업 수준을 넘어서는 조직형태를 만들고자 하는 문제의식이 현장 활동가 수준에서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1987년 이후 폭발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자주적, 민주적 노동조합들은 처음부터 기업별 조직에 갇혔다. 1989년 이후 당국은 공안정국을 조성하며 노동운동 탄압을 본격화했다. 기업별로 조직된 개별 조합들은 이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 지역노동조합의협의회라는 연대체를 꾸렸다. 마산창원 같은 곳에서는 금속계열의 노동조합들이 다수 모여 있었고, 사업체의 규모, 성별구성 등에서 유사성이 있었기 때문에 노동조합 간 연대의식이 매우 높았다. 반면 울노협은 89년 민주노조 건설을 위한 본격적인 준비단계에 들어갔지만 그 조차도 여의치 않았다. 1991년 만들어진 현총련은 전국노동조합협의회를 구성했던 주체인 지노협이라기보다는 재벌계열사의 노동연대체였으며 근본적으로 기업별 노조 형식을 벗어나지 않는 조직이었다. 지역노동조합협의회는 개별노조들의 고립된 활동을 넘어서기 위한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이를 지원하는 활동가들을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지노협은 한국노총과 별도의 제2노총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연대하는 것과 함께 임단투, 노동법 개정을 위한 공동투쟁을 수행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임영일, 2001).그러나 제3자 개입 금지, 복수노조 불허 등으로 인해 이조차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이 상항에서 전노협이 출범했다. 전노협 건설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1987년 이후 지노협들이 만들어진 상황에서 한국노총 가입이 대안이 아니라면 새로운 노총을 건설하는 것이 옳다는 활동가들의 정세인식과 1989년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 즉 공안정국에 대한 공동대응의 필요성이다. 전노협은 600여개 소속 노조, 14개 지노협, 독립노조 2개, 20만 조합원으로 출범했다(임영일, 2001).

전노협 창립대회(사진=노동자역사 한내)

전노협 건설을 주도했던 진영은 노동운동의 활동가 라인과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와 같은 정치적 노동운동 단체였다. 전노협 주력사업장은 80년대 초중반 이후 현장으로 투신한 활동가 그룹들이 위장취업한 중소규모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조합원들의 전투성과 계급의식은 여타 대기업 노동조합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반면 업종회의는 사무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졌고 대기업 노동조합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결과 현장 노동자들의 자발성이 크게 작용하여 만들어진 노동조합이었다.(3) 더군다나 대기업 노조들은 아직 민주파가 현장권력을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노조민주화 추진세력들이 주도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전노협은 87년 체제의 성립에서부터 시작된 한국 노동운동의 전투적 조합주의의 원형을 창출했다. 마산창원, 부산울산에서 만들어진 노동조합들은 주변 공단의 소규모 사업장에 투쟁이 벌어지면, 연대투쟁, 투쟁물품 지원, 공동가두투쟁 등을 통해 노동자 내부의 단결을 만들어왔다. 또한 연대투쟁을 통해 당국의 노동운동 탄압에 맞서왔다.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개별 사업장의 입장에서 노사관계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지역적, 전국적 시야 속에서 개별사업장의 투쟁을 바라보고자 했던 것이다. 제3자 개입 금지법 등 노동악법을 남용하던 시절에 노동운동이 보여준 연대의 기풍은 한국 노동운동의 큰 자산이었다(김하경, 1999).

반면 정권은 전노협을 고립시키기 위해 집중적으로 탄압했으며 업종회의와 대기업연대회의가 전노협에 결합하는 것을 봉쇄했다. 김영삼 정부는 업종회의를 합법적인 노조로 인정했으며 대기업노조연대회의 및 각 재벌노조의 연합체에 대해서도 허용했지만 전노협에 대해서는 결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1991년, 1992년 집중적인 탄압은 전노협의 동력을 약화시키는 원인이었다. 더군다나 전노협 자체가 소규모 사업장 중심으로 이뤄졌고, 기업 자체의 지속성이 크지 않아 노동조합의 지속가능성도 크지 않았다. 업종회의와 대기업연대회의는 공권력의 탄압이 거세지자 전노협으로 결합하는 것을 꺼렸다. 이런 저간의 사정이 전노협을 대체하는 새로운 노총을 건설하는 운동으로 귀결되었다. 노조의 규모와 영향력 등에서 전노협 중심성은 인정될 수 없었던 것이다(최영기 외, 2002).

1995년 민주노총이 건설되었다. 민주노총은 출발부터 대기업, 업종회의 및 공기업 중심의 노동조합으로 출발했다. 전노협을 이루었던 소규모 기업들은 의사결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민주노총 1기 지도부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기치로 내걸었다. 더불어 1기 지도부는 전노협이 추구하던 ‘전투적 조합주의’에서 ‘사회적 조합주의(합의)’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노동운동의 흐름을 이동시키고자 했다(4). 김금수 등이 주도하던 한국노동사회연구소는 이 시기 사회적 합의주의의 이념적, 정책적 토대를 제공했다.

전투적 조합주의는 노사 간의 갈등을 노동조합의 투쟁을 통해 정면 돌파한다는 점에서 노동자들의 힘을 과시하는 측면이 있었지만 과도한 투쟁, 정책적 대안의 부재, 노사정 합의를 통한 친노동자적인 입법 및 제도개선에서 한계는 지니기 때문에 노동운동의 성과를 제도화하고 모든 노동자들에게 그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사회적 토대는 만들 수 없었다. 반면 사회적 조합주의는 정부가 제시한 합의의 틀에 참여함으로써 노동조합이 정부의 노동운동 관리, 통제의 수단이 되며 최악의 경우 노동자의 이익에 반하는 정부의 정책을 노동조합이 합의하는 기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이현대, 2009; 노중기, 2008; 김영수, 2012).

민주노총 건설 시기 한국 노동운동은 사회적 조합주의조차 실현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없었다. 기업별 노동조합에 토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노총은 전국 단위의 계급정치를 실현시킬 제도적 틀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사회적 조합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기본적 토대라 할 수 있는 산별노조가 건설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사용자측은 노조를 기업단위로 묶어두고자 했기 때문에 산별 협상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기업별 노조는 노동조합 활동가들에게도 운동의 기반이자 도피처이기도 했다. 계급적 관점에서 노동운동의 성장과 전략적 대안의 형성을 위한 노력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활동가들은 현장 노동자들의 이익을 실현해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기도 했다. 기업 측의 현장권력을 둘러싼 개입전략과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선택에 의해 기업별 노조는 더 강화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임영일, 2001). 한국노동사회연구소나 한국노동연구원의 여러 보고서들이 가정하는 ‘사회적 조합주의’가 정부와 사용자 측의 노동통제를 정당화 하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민주노총의 건설은 한국노총을 대체하는 제2 내셔널센터의 건설이었다. 민주노총은 출발에서부터 산별노조 건설과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목표로 삼았다. 1997년 노동법 개악에 맞서 정치적 총파업을 성공적으로 이끌긴 하였으나 민주노총 스스로 내셔널센터로서의 전망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민주노총은 한국의 축적구조 내부에서 노동운동의 장기적 전망을 제시하고, 대안적 이념과 노동자 내부의 연대의 전통을 만들어 냈어야 했다. 노동자 내부의 단결과 노동조합의 조직을 강화시킬 수 있는 제도적 수단을 고안하고 구체적인 정세에 맞는 정치적, 사회적 전망을 제시해야 했다. 이것이 내셔널센터의 역할이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과제를 실현할 수 있는 총연맹의 구조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고, 재원도 할당하지 않았으며(못했으며), 활동자원의 축적도 이뤄내지 못했다. 총연맹 내의 내부정치는 내셔널센터로서의 총연맹의 장기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조차 했다.

민주노총 건설 이후에도 대기업 노조든 공기업 노조든 다수의 조합들은 임단투를 수행하는 단위사업장의 활동에 집중했으며, 노동조합의 전투적 기풍은 개별노조 내에서의 임금인상 및 노동조건 개선에 천착하고 있었다(조효래, 2005). 민주노조들은 조합원들과의 호흡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두고 있었는데, 노조 지도부는 조합원이 원하는 형태의 성과를 내야만 했고 이는 임단투에서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집약된다. 더군다나 집행부가 임단투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내지 못하면 노동조합 선거에서 다른 정파에게 노조 권력을 이양해야 했다. 이렇듯 노동조합 내부정치에서 민주주의는 노동조합의 경제주의적 활동을 더욱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87년 체제 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특징으로 자리 잡은 전투적 조합주의는 이제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익을 실현하는 전투적 경제주의로 고착화되어 간 것이다. 조합원의 경제적 실리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동조합의 투쟁력이 활용된 것이다(이현대, 2009).

특히 민주노총의 주력부대가 대기업-공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형성된 현실에서 이들 노동조합들을 중심으로 이뤄진 임단투와 그에 따른 실질임금 상승은 다른 노동조합들, 중소기업들의 임금성장 정체와 맞물려 노동자 내부의 격차를 확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전투적 노조주의의 유효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노중기, 2005; 조효래, 2005; 배규식 외, 2008).

이에 덧붙여 87년 체제 이후 ‘노동해방’이라 모호하게 표현되어 온 노동운동의 이념은 점차 퇴색되어 갔다. 소련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현장에 투신했던 많은 지식인 활동가들이 현장을 떠나고 대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구축된 현장출신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조합원의 경제적 이익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노동조합을 운영하면서 노동운동 내부의 연대주의, 이념적 지향성은 점차 약화되어 간 것이다. 노동운동의 성장과정에서 한국 노동운동은 “이념을 적절하게 변화,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완전히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변화된 것이다.(5) “계급형성, 계급문화의 정착을 통한 계급의식의 고양”으로 노동운동이 성장해 온 것이 아니라 운동 내부에서 이념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상황으로 노동운동이 전환된 것이다. 내셔널센터로서 민주노총은 노동운동과 이념을 정립하고 노동운동 전체의 방향을 제시해야 했지만 그럴 현실적 역량도, 비전도 보여주지 못했다(윤진호 외, 2011; 유범상, 2005).

2) IMF 구조조정과 노동자간 격차 확대

노동체제 연구자들은 한국 노동운동의 체제적 전환(축적체제, 노동시장, 노동통제방식, 노동운동 층위가 결합된 구조)을 1997년 총파업과 IMF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삼고 있다(임영일, 2003; 노중기, 2008). 1997년 총파업과 수평적 정권교체, 외환위기와 구조조정은 정부의 노동통제전략, 노동시장 구조개편, 노동운동의 대응 등 모든 면에서 한국 사회의 심대한 구조변화를 초래한다(6).

외환위기는 한국 경제관료들이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위기였기 때문에 초기에 이들은 어떻게 이 상황을 통제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정부는 IMF와의 협약에 따라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구조조정 사항에는 기업의 자기자본 비율을 높이고, 상호지급보증을 금지하며, 재벌(기업집단)의 결합재무제표 발표를 의무화하고, 은행의 민영화와 공기업 민영화가 단행되었다(7). 외환위기 이전 규모의 성장을 주된 축적전략으로 삼았던 재벌들은 규모성장 그 자체가 아니라 수익성 추구를 주된 경영 목표로 삼았다(이병천, 2014).

IMF 구조조정 과정에서 민주노총은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를 수용한다. 민주노총 1기 지도부는 노동시장 유연화를 위한 고용조정제와 근로자 파견입법을 수용하는 대가로 교원과 공무원 단결권 및 노동의 정치활동 보장 등 노동기본권을 확장하는 데 합의했다.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는 IMF가 요구한 사안이 아니라 IMF 구조조정 과정에서 한국 관료들이 이 합의안을 IMF와의 협약에 포함시킨 것이다(지주형, 2012). ‘IMF+α’라는 표현은 이에 유래한다.

김대중 정부는 IMF 구조조정을 빌미 삼아 김영삼 정부가 기획했던 구조조정을 제도화한다. 뿐만 아니라 1998년 정부의 구조조정은 노동조합과 합의에 기초해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이에 저항하는 사업장들에 대해서는 공권력 투입으로 맞섰다(8). 이 시기 구성된 노사정위원회는 노동의 동의하에 구조조정 및 노동시장 유연화를 실행하려 했다는 점에 있어서 코포라티즘의 노동통제 전략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다(9).

노사정위원회의 참여 문제는 한국 노동운동 내에서 정파적 갈등이 표면 위로 부상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한다. 1998년 2월 민주노총 대의원 대회는 민주노총 1기 지도부가 합의했던 ‘노사정 공동선언’ 및 ‘합의 내용’을 폐기하고 노사정 합의 종결을 선언했다. 같은 해 6월 김대중정부는 제2기 노사정위원회를 출범시켰지만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는 이를 다시 거부하고 1999년 노사정위원회 탈퇴를 공식화한다(김영수, 2012). 이 과정에서 소위 사회적 조합주의를 거부하는 ‘현장파’가 결집한다. 그 이후 노동운동은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을 표방한 국민파, 금속노조와 공공노조를 중심으로 활동가들의 네트워크로 구성된 중앙파(노사정위원회 부분적 활용), 노사정위원회 거부와 대중투쟁, 사회변혁적 노동운동을 주장하는 ‘현장파’로 분화된다(10). 현장파가 집권한 2기 민주노총 집행부는 노사정위원회에 대한 전면거부보다는 활용, 참여와 탈퇴를 병행하였다. 2005년 이수호 집행부가 노사정위원회에 복귀하자는 안을 대의원대회에 제출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현장파의 단상 점거와 지도부를 보호하려는 국민파 간의 폭력사태가 발발하였다. 노동운동 내부의 정파적 갈등이 언론을 통해 전면적으로 부각되는 시점이기도 하였다(김영수, 2012; 노중기, 2008). 그 이후에도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할 것인가를 두고 민주노총 내부에서 지속적인 논쟁이 진행되었지만 2008년 이명박이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이 논쟁은 종결 된다(11).

사회적 조합주의는 노동운동의 성과를 제도화하고 사회적 고립으로부터 노동운동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라는 면이 있다. 제도를 통해 노동조합, 노동자계급의 ‘요구’가 국가 정책에 반영되는 현실적인 제약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노동조합이 사회적 합의기구를 전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노동운동의 고립을 야기할 수 있다(임영일, 2003; 배규식 외, 2008). 더 나아가 노동운동의 투쟁성과가 특정 노동조합의 성과만이 아니라 다른 조합 노동자들 및 노동자계급 일반의 조건을 개선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투쟁 성과의 제도화가 필요하다. 이는 노동조합이 정부의 정책결정에 능동적으로 개입하여 노동조합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실현하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노동자들의 권익 실현을 위해 존재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노중기, 2008).

그러나 민주정부 10년간 진행된 노사정위원회는 노동의 요구는 제한적으로 반영한 반면 자본의 핵심적 요구는 대부분 수용하였다. 이 시기 민주노총과 노동조합들은 구조조정에 맞서 수세적인 방어투쟁을 하는 데 힘을 집중하던 시기였다. 반면 정부는 불법파업에 대한 손해배상을 전면적으로 활용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의 투쟁에 맞서 사용자측의 적극적인 방어권을 제도화하는 노사관계 로드맵을 제시하기도 했다. 특히 1기 노사정위원회의 합의 사안 가운데에는 입법과정에서 국회에 의해 거부되거나 법원 판결로 뒤집혀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노사정위원회는 노동의 참여를 통해 노동자계급에게 불리한 제도를 합의하도록 만드는 기제였던 것이다(노중기, 2008; 김영수, 2012). 노동시장 유연화를 제도화한 3대 악법인 정리해고제, 파견근로제, 변형시간 근로제가 노사정위원회에 의해 제도화된 점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12).

IMF 구조조정과 함께 진행된 노동시장 유연화는 노동자 내부 격차의 심화와 비정규직 일자리를 증가시켰다. 전체 피고용자 중 비정규직의 비중은 1997년 이후 꾸준히 상승해서 2002년 56.6%, 2007년 55.4%를 기록한 이후 2015년 현재 44.5%로 줄어들었다. 2016년까지 비중이 줄어든 이유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절대 수가 줄어들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비정규직의 절대규모는 2007년 875만명에서 2015년 873만명으로 소폭 감소했을 뿐이다. 고용 노동자 중에서 비정규직 비중이 감소한 것은 전체 피고용자 숫자가 증가했기 때문이다(김유선, 2016).

그림 1 제조업 종사상 지위별 임금격차(단위, 백만원) 통계청, 광업제조업통계조사(2016)

<그림 1>은 전국 및 부산의 종사상 지위별 임금격차 추이를 보여준다. 상용직에는 기간제를 포함 1년 이상 계약직이 포함된다. 그림에서 보듯이 상용직의 평균임금은 2914년 현재 3,845만원이지만 임시직 및 일용직은 1,738만원 받고 있다. 임금격차가 2배 이상이다. 부산의 경우 2008년도 경기 침체 후 임시직 및 일용직 노동자들의 평균임금은 더 감소했다. 임시직 및 일용직 노동자들의 임금과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격차는 확대된다.(13)

제조업의 경우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원청 사업자에 고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정고용 노동자들이지만 통계청 조사에서는 비정규직이 아니라 하도급 업체의 정규직으로 분류된다. 그러므로 사내하도급 노동자를 포함하면 비정규직의 규모는 상승할 것이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제조업에서 사용되는 파견근로자로서 불법파견을 대표한다. 현대자동차 비정규노동조합의 사례에서 보듯이 대법원은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원청이 고용한 비정규직 노동자라고 규정했지만 현대자본은 이들의 정규직화를 수용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박근혜 정부는 비정규직 사용연한을 4년으로 늘리고 사내하도급 법을 제정하여 불법파견 노동자들을 합법적인 파견노동자로 둔갑시키려 했다.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노동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5년 전략조직화 사업을 시행했지만 위력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50억 기금을 모아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 사업을 위한 활동가 생산 및 파견 등을 기획하였지만 기금액은 20억 모금에 그쳤고 이 조차도 제대로 집행되지 못했다. 전략조직화 사업은 2010, 2014년 꾸준히 지속되었지만 연맹 수준에서의 계획 부재와 지역, 산별 및 산별지역지부 등으로 책임과 역할이 분산된 체계 속에서 사업성과를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그 결과 비정규직 노동조합 조직률은 4%에 머물고 있다. 2017년 현재 문재인 정부는 공공부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부터 시작하여 비정규직의 규모를 줄이겠다고 공언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성과에 대한 회의가 만만치 않다.

1990년 이후 한국의 대기업들은 신규고용을 줄이고 유형자산투자를 통해 경제성장을 주도해 왔다. 대기업들은 설비자동화를 통해 1인당 자본집약도는 향상시키지만 신규고용은 하지 않았다. 대기업들은 신규고용이 필요한 경우 사내하도급으로 사용함으로써 노동비용 상승에 대응해왔다(홍장표, 2014).

또한 저부가가치 중간재를 중소기업에 외주함으로써 불필요한 생산설비를 확대하지 않았으며 협력중소기업들을 활용하여 경기변동에 효율적으로 대응했다. 세계시장이 불황일 경우 하도급 기업에 대한 납품 비중을 줄이고 단가 후려치기를 통해 비용을 절감하는 반면 세계시장이 호황국면이면 그 수익을 재벌대기업이 독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 대기업들은 세계시장의 위험을 중소기업에게 전가시키고 노동비용을 절약하면서 영업이익률은 크게 개선해 왔으며 세계시장에서의 점유율을 확대해 왔다. 더불어 재벌대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실질임금도 상승해왔다. 금속노조의 주력부대인 재벌 기업의 노조들은 매년 있는 임단투를 통해 실질임금을 향상시킴으로써 노동소득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

대기업과 공공부분 노동자들은 2000년 이후 꾸준히 실질임금을 상승시켜왔지만 여타 중소기업, 서비스업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은 상대적으로 지체되면서 노동자 내부의 격차는 확대되어 온 것이다. 노동자 내부의 임금격차 확대는 노동조합운동의 대표성을 약화시켰다. 한국 노동조합운동을 주도해오고 있는 대기업, 공기업 노동자들의 전투성은 작업장 내에서의 임금상승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노동자들 일반의 임금을 상승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 1996년 민주노총 평균임금은 월 137만원으로 임금계층 상위 40%에 속하였지만 2013년엔 월 372만원으로 임금계층 상위 25%에 들게 되었다.

민주노총 내부에서도 격차는 확대되었다. 노총 산하 100인 미만 사업장 평균임금 대비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임금은 1996년 1.6배였지만 2013년 2.6배로 늘었다(한지원, 2014). 주기적으로 진행되던 총파업 투쟁, 작업장 내에서의 임금인상 투쟁은 노동자 내부의 연대의 고양과 단위 사업장 조합원만이 아니라 미조직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실질적으로 개선시키지 못함으로써 대기업노동자들, 조직노동자들의 이익만은 높인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 것이다.

3) 산별노조와 노동자 정치세력화

앞 절에서도 썼듯이 민주노총 출범 당시부터 기업별 노조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은 산별노조 건설이었다. 더불어 민주노총은 노동운동의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해야 한다는 목표 아래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를 주요한 전략 사업으로 선정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들을 경주해 왔다. 노동시장 유연화가 지속되면서 노동자 내부의 격차 심화와 노동조합 운동의 대표성 위기, 구조조정과 고용문제에 대한 기업별 노조 대응의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운동의 전략적 선택으로 산별노조 결성이 이뤄졌다.

산별노조는 대중소기업 간 격차확대와 정규직-비정규직 임금격차 및 노동조건 격차 확대를 산별차원에서 조정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기된 것이다. 더 나아가 산별노조는 조직화가 용이하지 않은 중소사업장 노동자들이 지회 결성 및 노조가입을 가능하게 하는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노동조합 운동의 계급적 대표성을 높이고 노동자 내부의 격차를 줄이며, 단위사업장을 넘어 노동자운동의 단결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산별노조 건설이 제시되었다(김금수 외, 2001; 민주노총, 2000).

2017년 현재 민주노총 가입 노조의 산별노조 전환비율은 82%로 산별 전환비율은 매우 높다. 노총 가맹산별 16개 중에서 금속노조, 보건의료노조 등 8개 노조가 민주노총에 산별노조로 가입해 있고, 공공운수연맹과 화학섬유연맹이 재정과 인력을 통합해 운영하는 등 조직형식 측면에서 산별전환은 상당부분 이뤄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금속노조에서는 중앙교섭을 통해 손배 비적용, 주5일 근무제 등을 이뤄내기도 했고, 보건의료노조의 경우 임금 및 노동조건의 표준화를 위한 규약을 만들고자 시도하기도 했다(김태현, 2013).

그러나 민주노총이 자체적으로 발주한 연구용역에서도 현재의 산별노조는 무늬만 산별이지 실질적으로는 기업별 노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비판을 제기한다(윤진호 외, 2011). 2010년 민주노총은 통상임금의 1%를 조합비로 걷고 그 중 50%는 산별중앙으로 올리는 것을 통과시켰지만 금속, 화학섬유, 보건의료 노조만 이를 실행하고 있을 뿐이다. 민주노총 분담금(조합원 1인당 1500원)의 납부조차 70%대에 머물고 있다. 산별노조의 대기업 지회는 재정여력이 크지만 산별중앙의 재정은 열악하며, 총연맹의 재정규모는 산별노조보다 더 취약한 상황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배규식 외, 2011; 윤진호 외, 2011). 특히 이명박 정부하에서 복수노조 도입과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규정(타임오프제도)이 바뀌면서 각 산별 중소사업장 지부는 개별적인 활동을 지속할 여력을 상실했으며 일상 업무 처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 결과 조합원들은 산별 지역지부를 사업장의 일상적인 고충처리를 대신하는 기구로 알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활동가A, 인터뷰).

금속노조의 중앙교섭 현실은 민주노총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금속노조의 경우 조합원 17만 명이지만 현대자동차와 기아차 노조원은 8만 여명으로 현대중공업 노조원을 제외하면 금속노조의 1/2을 차지한다. 금속노조 위원장 후보는 언제나 현대자동차노조 아니면 기아자동차노조에서 나온다.(14) 노조원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당선을 위해서는 이 두 사업장 출신이 가장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 두 노조는 2006년 산별전환을 통해 금속노조의 일원이 되었지만 지금까지 금속노조 산별교섭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가 산별교섭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이 두 지회가 금속노조에 가입하지 전에 산별교섭에 임했던 대기업 노동조합들조차 산별교섭에서 이탈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재정여력에서 지회>금속노조>총연맹 순이기 때문에 금속노조 선거에서는 현자와 기아차 노조의 각 정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은 지회선거에 나가고, 금속과 총연맹으로 차출되는 후보들은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약한 인물들로 구성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총연맹, 금속노조의 결정사안은 현장지회에서 강한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활동가 B, 인터뷰). 산별노조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기업별노조의 관행이 크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산별전환에도 불구하고 기업별 노조의 관행은 그대로 남아 있고, 대기업이나 공기업 지회들은 기업별 교섭에 천착하면서 노동조합은 점차 조합원들의 경제적 이익을 대표하는 도구적 조직으로 전락했다. 대기업 노동자들이나 공기업, 공무원, 전교조와 같은 사업장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힘을 토대로 노동조건을 개선하며 실질임금도 꾸준히 올랐지만 오히려 경제적 실용주의에 더 집착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최근 기아자동차 노조가 1사 1노조 원칙을 거부하고 비정규직 노동조합과 분리를 결의한 점이나 전교조에서 기간제 교사 정규직 채용에 대해 공식적인 반대를 결의하고 이를 공개한 것은 대기업 노동조합, 공기업 및 공무원 노동조합이 노동자계급의 이익과 함께 노동자들 개인의 경제적 이익을 실현하는 조직이 아니라 상위 20% 이내의 노동소득 계층이 자기 집단의 이익을 실현하는 도구로 노동조합이 활용되고 있는 것 아닌가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상황을 복잡하게 하는 것은 타임오프제의 도입으로 소규모 사업장의 노조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고 비정규직 노조의 조직률도 매우 낮은 시점에 복수노조마저 시행된 것이다. 새롭게 등장하는 복수노조, 한국노총이나 민주노총에 가입하지 않으며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집단은 대부분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익집단이다(한국노동사회연구소, 2016). 최근 미가입 노조들의 숫자가 꾸준히 상승하는 것은 정규직의 이익만을 대변하며 노동조합 운동의 기본원리를 부정하는 집단들의 규모가 커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용노동부, 2015).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 산하조직들마저 대기업-공기업-정규직 이익만을 대변한다면 시민사회 내에서 기득권 집단으로 ‘매도’ 당하는 현실은 더 굳어져 갈 것이다.

1987-1997년 동안 한국 노동운동의 상근활동가들은 헌신성, 대중동원 능력, 전문성 등에서 세계최고 수준을 자랑했었다. 그러나 산별노조의 현실에서도 보듯이 오늘날 상근활동가들의 역량은 약화되었고, 새로운 활동가들은 제대로 생산되지 않으며, 상근역량의 약화는 산별 산하 조직의 지도력 구축과 실천을 어렵게 한다(임영일, 2009).

더군다나 그 와중에 산별 내부의 민주적 질서도 약화되고 있다. 산별 간의 노조 조직 경쟁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조직 내부에서 노조권력 장악을 위한 정파들 간의 갈등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15). 정파들 간의 합의 사항에 공동으로 복종하는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노조권력을 둘러싼 정파 간 경쟁은 노동조합의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노조의 규율을 해체하며 노동자 대중들의 선택을 왜곡하는 기능을 한다. 이것은 노동운동의 장기적 후퇴를 초래할 것이다(임영일, 2009; 이진숙, 2014; 윤진호 외, 2011; 배규식 외, 2009)(16).

노동운동 내 정파 간 균열이 심화된 결정적인 원인은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목적으로 건설된 진보정당 운동의 난맥상이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는 노동운동의 사회적 시민권을 획득하는 핵심적인 수단이었다.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의 국회 진출을 시작으로 본격화된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초기의 열광적인 기대와 달리 2017년 현재 황망한 현실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한국노동사회연구소, 2016).

민주노동당 분당의 결정 국면이었던 2008년 2월 임시 당대회 모습

민주노동당 내부에서 당권과 공직선거 후보자 경선을 둘러싼 갈등은 의회 외부의 민중운동에서 진행된 정파적 갈등을 훨씬 초과하는 것이었다. 지구당협 및 당권 장악을 위한 갈등과 북핵 문제 등을 둘러싼 노선상의 갈등은 민주노동당의 분리로 귀결되었다. 민중운동 최대 정파인 자주파는 패권적 당운영을 당연시 했고 소수파는 소수파의 지위를 인정하고 당내 경쟁으로 조직을 발전시키려 하기보다 분리를 선택했다. 그 과정에서 일방은 당원명부를 북에 넘긴 당원을 변호했고, 분리파들은 이들을 두고 ‘종북세력’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민주노동당의 실패 이후 통진당 도전과 재실패는 당분간 진보정치를 시계제로 상태로 만들었다. 정의당은 노동자계급 내에서 토대를 만들지 못했으며(만들려는 노력도 미약하며) 미디어 정치를 통해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려 한다. 새민중정당(새민중정당과 민중연합당은 통합을 확정)은 노동자계급 내에 일정한 토대를 두고 있지만 대중적인 담론을 생산하지 못한다. 둘의 통합전망은 불투명하다.(17)

이와 같은 노동자 정당운동의 실패는 노동자운동이 지향해야 할 세계 즉 노동운동의 이념 상실과 연대의식의 부재, 정파 간 의사소통 부재와 합의체계의 붕괴에서 비롯되었다. 진보정당 건설과정에서 나타난 패권주의와 분열주의의 원인는 이와 같은 정파 간 공존의 실패에서 찾아져야 한다. 진보정당의 실험은 정파 간 적대와 불신을 증폭시킨 것이다. 선거 국면에서 지지율 경쟁 및 세액공제 경쟁으로 인해 노동조합 내에서 자주파와 비자주파 간의 경쟁은 더 심화된다. 총연맹 및 지역지부를 장악하는 것이 당원 확보와 세액공제에 유리하기 때문에 진보정당 간 경쟁은 현장권력 장악을 위한 노조내부의 경쟁을 더 심화시키고 그 부정적인 모습을 강화한다. 이는 진보정치가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와 노동운동의 시민권 획득을 위한 제도적 틀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정파 간 갈등을 정치 공간 내에서 재생산함으로써 민중운동, 진보운동 전체의 정당성 훼손으로 귀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각 정파가 자신의 지반을 확대하기 위해 조직간 경쟁에 심취하면 할수록 전체로서의 노동운동의 정당성, 진보정치의 정당성은 약화된다. 그 최종 귀결은 노동자정당의 주변화와 민주노총 내부에서 민주당과의 연대세력 확대이다.

산별노조 건설과정에서 총연맹으로서의 민주노총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내셔널센터로서의 민주노총의 위상은 심각하게 위축되었다. 총연맹은 노동자 운동 전체의 의제를 설정하고 대정부, 대사용자에 대항하는 무게중심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총연맹은 약화된 지반 위에서 자신의 위상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총파업 투쟁을 남발하기도 했다. 총파업 투쟁은 위력적으로 조직되기보다 각 산별연맹의 형식적인 참여와 조합원들의 저조한 지지로 인해 뻥파업이라는 조롱을 받기에 이른다. 산별노조운동은 기업별 조직을 넘어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못했고, 대기업 지회들은 기업별 교섭을 지속함으로써 산별노조는 무늬만 산별이냐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노동자정치세력화는 조합원의 계급의식, 연대의식 성장으로 귀결되지 못했으며 노동운동의 사회적 고립을 더 부추기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기대와 전망 : 노동운동, 무엇을 할 것인가?

2000년 이후 한국 재벌대기업들은 한편으로 글로벌 아웃소싱 및 해외직접투자를 확대하면서 산출은 지속적으로 증가시켜 왔지만 양질의 일자리는 만들지 않았다. 대기업-공기업에 고용된 정규직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지속적으로 상승했지만 비정규직,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소득은 정체하였다. 민주노총 및 산하 산별노조들은 노동자들 내부의 격차 확대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산별노조는 노동자들 간의 격차를 줄이는 중요한 대안으로 제시되었지만 산별노조를 통한 노동자들 간의 격차를 줄일 수는 없었다.

2013년 이후 한국 자본주의는 본격적인 정체국면으로 진입한다. 세계시장의 수요붕괴로 인해 수출주도 성장을 추진해온 재벌 대기업들의 영업이익은 꾸준히 감소하고 있으며, 몇몇 주요 재벌을 제외하면 재벌대기업들조차 경영여건이 매우 불확실한 상황에 노출되고 있다. 경제성장의 정체는 노동자들의 실질임금 정체로 나타났으며, 이는 다시 노동자 내부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것으로 귀결된다. 국민소득 내에서 노동자들의 몫을 의미하는 노동소득분배율도 꾸준히 하락하는 국면이다.

노동조합은 노동운동의 가장 ‘원칙적인 조직’으로서 전략적 중요성을 지닌다. 노동자정당은 정세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정세적 조직이지만 노동조합은 노동자계급의 이익 실현, 계급적 단결을 성취함에 있어서 기본조직이다.

앞 장들에서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노조 운동을 몇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회고해 보았다. 민주노총은 평상시 집회에서 단일 대오로서 가장 큰 대중동원력을 지니고 있으며 서울을 제외한 여타 지역에서의 일상적인 시위, 투쟁을 조직함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앞 장에서 비판적으로 논했듯이 지난 30년간 노동자운동이 이뤄낸 성과는 거대했으나 이 운동이 직면한 현실은 결코 만만치 않다. 노동자운동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크게 약화되었으며, 노동자운동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이데올로그들도 노동운동과 점차 단절하고 있다. 노동자운동 내부는 여전히 정파간 갈등으로 인해 일관된 전략적 지침, 내부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제도적 틀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공동의 전략적 어젠다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하에서 노동운동의 성장을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 민주노총 및 산별노조 내에서 민주주의적 기풍의 재정립 :

총연맹, 산별노조, 지역지부 간에 다양한 갈등관계가 존재한다. 총연맹은 열악한 재정과 대표성의 약화로 인해 단위 산별노조나 작업장에 대한 지도력이 약화된 상태이다. 공식적 단위의 의사결정은 산별, 지회로 내려가면서 무시되고 각 정파 및 지회에 영향력 있는 이들에 의해 왜곡되거나 무시된다. 이는 총연맹의 리더십을 약화시키고 노조활동의 효율성을 저하시키며, 노조 전략에 기초한 투쟁의 조율을 곤란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각 산별을 주도하는 정파들 간의 정보교류, 공동의제, 합의에 기초한 실천을 불가능하게 한다. 다수파에 의한 산별노조 내부의 권력독점, 패권주의 경향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소수파들은 다수파의 논리에 전면적으로 반발하고 이는 갈등의 지속만을 만들어 낸다. 더불어 노조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갈등으로 노동운동 내부의 민주적 기풍을 붕괴시킬 수 있다. 이와 같은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총연맹의 위상을 높이고 총연맹의 강화 및 합의된 결정에 대해 복종하는 민주주의적 관행을 정착시켜야 한다. 재정분담에 대한 강력한 집행, 산별교섭에 임하도록 하는 정파 간 공동합의, 산별 간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중재기능과 명령기능의 회복 등이 필요하다.

▲ 대중소기업 노동자간 임금격차, 정규직-비정규직 임금 격차 :

민주노조운동의 대표성이 약화된 가장 큰 이유는 민주노총이 대기업-공기업-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익만을 대변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산별노조는 작업장을 넘어 노동자의 계급적 단결 및 임금-소득격차를 줄이기 위한 대안으로 추진되었지만 현재까지 그 기대는 충족되지 않고 있다. 산별노조 강화를 위해서는 대기업 사업장, 특히 현대차와 기아차의 산별교섭 참여가 관건일 것이다. 더불어 사용자 단체의 구성 및 산별교섭 참여를 강제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산별교섭만으로 노동자 내부의 격차를 줄이는 것은 쉽지 않다. 대기업의 생산성, 수요독점적 지위 등으로 인해 산별교섭을 통해 노동자 내부의 격차를 줄이는 동력이 매우 작기 때문이다. 산별교섭을 강화하는 실천과 함께 노동자 내부의 임금격차를 줄이는 다른 수단이 적극적으로 모색되어야 한다. 노동소득에 대한 누진세율을 대폭 강화하는 것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소득세 인상을 통한 복지 공급의 확대 즉 직접임금의 차이를 간접임금의 확대를 통해 줄이는 방식이다. 조합원들의 증세 거부 문화는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합의된 입장’과 ‘교육’을 통해 바뀔 수 있다.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고소득 자영업자에 대한 소득추정은 매우 잘 되고 있다. 세수의 증가는 한국의 복지수준을 꾸준히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노동소득세 증가는 대중소기업간 격차 지속 및 정규직-비정규직 임금격차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모든 소득계층의 임금격차를 줄일 수 있는 유효한 수단이다.

▲ 노동자 정치 세력화 :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당분간 어려운 처지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앞에서도 썼듯이 정의당은 노동자계급 정체성이 매우 약한 정당이다. 노동조합 및 노동자운동 내에서 지지기반도 탄탄하지 않고 당내 의사결정 구조에서 노동운동의 영향력도 취약하다. 정의당은 노동자계급 정당이 아니라 노동자들을 위한 정당을 지향하는 듯하다. 새민중정당은 당원의 다수가 노조원이라는 점에서 계급적 토대가 정의당에 비해 강한 편이다. 전국회의는 단일정파로서 민주노총 최대 세력이고 이들이 주도하는 노조에서 새민중정당 지지율은 높다. 그러나 피고용자 중 전체 노조조직률은 10.2%, 민주노총 조직률은 피고용자 중 3.37%일 뿐이며 민주노총 내에서 자주파의 영향력조차 절대적이지 않다. 대중정치에서 새민중정당이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조합을 넘어서는 대중적 담론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필자가 자주파의 역량을 평가해볼 때 대중적 담론을 생산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당분간 새민중정당, 정의당, 사회주의 변혁정당을 지향하는 현장파는 각자 도생의 길을 갈 것이다. 각 세력들은 노동조합 내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경쟁관계를 지속시킬 것이다.

민주노총이 단일한 진보정치의 안을 제시하며 정당운동을 강제할 수 있는 기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노총은 노동자들의 연대의식, 계급의식 고취를 통한 노동운동의 자율성 및 노동자계급 공통의 의제를 사회화 하고 이를 중심에 둔 정치적 실천을 조직해야 한다. 경제위기와 구조조정에 대한 전략적 대응방안 제시, 산별노조 교섭을 지원하고 보완하기 위한 교섭의제 설정, 노동악법 개정, 비정규직 조직화 사업의 내실화 등이 그 실천과제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총연맹의 연구기능 및 내셔널센터로서의 역량강화가 필수적이다. 진보정당과는 정책적 연대 및 목표 실현을 위한 공동투쟁의 조직화를 통해 진보정당 및 정파간의 신뢰의 회복, 공동실천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통해 장기적으로 노동자운동의 통합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노동운동 진영은 총연맹의 강화 및 지역본부 강화하는 데 동참함으로써 현재의 교착상태를 넘어서야 한다.


<추가설명>

  1. ‘87년 체제’라는 개념은 오늘날 국가형태 분석에서부터 노동체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석틀로 확장되어 사용된다. 87년 체제의 어원은 노동체제 분석에서부터 시작되어 이후 확장되었다(임영일, 2001; 임영일, 2003; 노중기, 2008). 이 토론회의 기획은 ‘6월 항쟁 30주년, 87년 체제와 부산지역노동운동’이다. 이 표현은 1987년 7,8,9월의 노동자대투쟁을 6월 항쟁의 연장선상서 고찰한다는 의미이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을 6월 항쟁의 부수적 작용이었는가 아니면 6월 항쟁을 매개로 하여 잠재되어 있던 노동자들의 저항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존재한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은 6월 항쟁으로 촉발되었지만 새로운 노동체제(국가의 노동통제전략, 노동시장, 노사관계, 이데올로기적 지형)를 형성하고 이후 노동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혔다. 따라서 필자는 본 논문에서 민주화 일반으로서의 광의의 의미로 87년 체제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 및 노동운동과 관련된 협의의 의미로 ‘87년 체제’로 사용한다.
  2. 이 시기 노동운동을 주도한 활동가 그룹들은 이념적 편차가 있었지만 크게 NL(민족해방그룹), PD(인민민주주의그룹)로 분류할 수 있다.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노운협)은 이념적으로 사회주의적 지향성을 갖는 점에서 PD성향에 가까웠던 반면 실천적인 면에서 정치세력화보다 노동조합 현장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에서 NL과 가까웠다. 85년 이후 이념지향적 활동가그룹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1989년 이르면 정파적 분화는 완성된다(임영일, 2001). 이 시기 노동자 투쟁의 조직에 있어서 정파활동가들의 역할은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다만 이 시기 노동해방이라는 구호는 기초적인 노동권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하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깝다고 판단한다.
  3. 대기업노조연대회의는 1990년 12월 7일 16개 대기업노조들의 협의체로 결성된다. 1991년 대우조선 파업 시 공동대응으로 연대회의 소속 67명의 노동조합활동가들이 연행되고 그중 7명이 구속된다. 전노협 소속 노조(부산 대우정밀, 한진중공업, 풍산금속) 등 6개와 부분가입 노조 1개도 연대회의에 참여한다. 1995년 민주노총의 건설과 함께 전노협, 연대회의, 업종회의는 통합된다.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업종회의)는 14개 연맹 586개 노조, 20만명을 조합원으로 1990년 출범한다. 언론노련,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국병원노동조합연맹,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 등이 참여한다(임영일, 2001).
  4. 임영일은 이를 ‘전투성 게임’과 ‘제도성 게임’의 경쟁이라고 요약한다(임영일, 2001).
  5. 노중기는 이를 노동운동의 성공의 역설이라고 했다. 성공의 역설이란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성장한 제3세계 노동운동이 민주화와 함께 시민권을 획득하면서 노동조합의 경제적 실리주로 후퇴하고 노동자 내부의 연대성, 변혁성이 사라지는 현상을 일컫는다(노중기, 2009).
  6. 노동체제론의 입장과는 다르게 한국 신자유주의의 출발점은 1980년 전두환 정권의 성립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이다. 1979년 경제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구조조정 방향은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에 조응하는 것이었다. 상업은행의 사유화, 공기업 민영화, 시장 개방 등 이후 30년간의 경제구조조정의 방향은 이 시기 강경식, 사공일 내각이 주도한 개혁방향에 조응한다. 1997년 IMF 구조조정 역시 강경식 라인으로 대표되는 인물들이 주도한다(윤소영, 1999; 지주형, 2012).
  7. 1998년 김대중 정부는 55개 퇴출기업 발표, 5개 은행 퇴출 및 6대 은행 민영화, 11개 공기업 민영화, 만도기계 등 투쟁 사업장에 대한 공권력 투입을 단행했다(지주형, 2012).
  8. 2000년 롯데호텔 노조, 사회보험노조, 2001년 대우자동차 노조, 은행노조, 조종사노조 파업, 2002년 발전노조, 보건의료노조 등에 공권력을 투입했다. 특히 김대중 정부는 대우자동차 노조 파업 이후 노동쟁의에 대한 민사상 책임(손해배상)을 적용함으로써 향후 노동운동의 투쟁성을 약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다. 2003는 노무현 정부에 입각한 김대환 노동부장관은 노동자 파업에 대한 사용자의 적극적 대응을 주문하는 노사관계발전 로드맵을 채택한다. 그 이후 민사상 손해배상은 파업투쟁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 시기를 경과하며 활동가들의 자살 행렬이 나타난다.
  9. 임영일(2003), 노중기(2008)는 이 시기 한국의 노사정위원회를 ‘사이비(의사)코포라티즘’이라 비판하지만 이 비판은 코포라티즘의 실질적인 의미를 놓치고 있다. 코포라티즘은 노사협조주의체제로서 호황기에는 노동자들의 실질임금 향상 및 고용안정 보장을 위한 제도적 타협을 진행하지만 불황기에는 노동조합이 임금인상 억제, 구조조정에 동의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1970년 이후 영국 노총이 노동당 정부 하에서 임금인상 억제에 동의한 사례나 1990년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 집권 하에서 노동조합의 협조를 통해 구조조정을 단행한 것은 불황기에 코포라티즘이 작용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고세훈, 1999).
  10. 민주노총의 1기 국민파(권영길), 2기 현장파(이갑용), 3기 지도부는 중앙파와 국민파의 연합(단병호)으로 구성되었으며, 4기-5기 지도부는 국민파(이수호-조준호, 이석행), 6기 중앙파(임성규), 6기 국민파(김영훈), 7기 국민파-중앙파(신승철), 8기 현장파(한상균)로 이어진다.
  11. 2017년 6월 8일 민주노총 중앙위원회는 문재인 정부의 ‘일자리위원회’와 ‘최저임금위원회’에 참여하기로 결정한다. 이는 1999년 노사정위원회 탈퇴 이후 18년 만의 결정이다.
  12. 변형시간근로제는 1997년 탄력적근로시간제라는 법제화로 도입되었으며, 노무현 정부 때 단병호 집행부 하에서 수정되었다. 수정 내용은 주40시간 내에서 노사의 합의 하에 노동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민주노총 1기 집행부가 정리해고제, 파견근로제에 합의하고 3기 집행부인 단병호 집행부가 변형시간근로제에 합의한 것은, 정파적 성향에 따라 노사정 합의제를 대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는 주장을 기각하도록 만든다(윤소영, 2008). 국민파와 중앙파, 심지어 현장파조차 정부와의 협의체제에 다양한 형태로 참여해 왔음을 노동운동의 역사가 보여준다. 그러나 노사정협의회 참여를 두고 이뤄진 정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노동운동 내부의 활동가 간의 소통체계가 붕괴되고 노동자운동 내의 정파 간 경쟁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3. <그림 1>의 경우 일반적으로 비정규직으로 포함되는 기간제 노동자 및 1년 이상 계약직 노동자들이 상용직에 포함되어 있다. 그 결과 비정규직 가운데 임금이 상대적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상용직 노동자에 포함됨으로써 상용직과 임시 일용직의 격차가 일반적으로 정규직, 비정규직 격차보다. 크게 나타난다. 고용형태별 시간당 임금의 경우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비중은 IMF 직후 2000년 55%에서 2010년 44%까지 하락했다가 2016년 현재 55.7%가 되었다(김유선, 2016).
  14. 2017년 9월 현재 금속노조는 새 집행부 선출을 위한 선거운동 기간이다. 노동운동의 제 정파를 대표하는 후보들이 나왔다. 기호 1번과 2번은 기아자동차 지회 출신이고, 3번은 현대자동차 지회 출신이다.
  15. 서울대병원노조 등이 보건의료노조를 탈퇴하여 공공운수노조에 가입한 것이나 서비스노조가 택배노동자들을 조직하면서 화물연대와 갈등을 빚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공공운수노조 산하에 전국학교비정규직 노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비정규직 노조가 독립적으로 조직된 사례도 있으며, 산별에서 분리하여 지역민주노총에 직접 가입 하는 노조도 있다(활동가 C, 인터뷰).
  16. 상급단체에 분담금 내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노조원 수를 축소보고 하거나 산별조직 간 질서를 교란시키는 지회 노동조합의 결의에 대해서는 노총 차원에서 징계를 가할 수 있는 실질적인 권한이 부여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쟁점은 주요 정파 간 합의만 이뤄진다면 충분히 실행가능하다.
  17. 노동운동 및 진보적 시민운동 진영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실패는 노동자운동 내부에서 민주당과 협력하려는 문화를 확산시키고 있다. 2017년 대선에서 문재인 캠프에 결합한 영남진보벨트 노동운동의 ‘선배’ 세대 일부는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포기했다. 뿐만 아니라 파업 및 구조조정 상황에 처한 개별사업장 내에서 민주당의 ‘을지로위원회’ 등 친노동 국회의원들(?)과의 협력을 구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들이 쟁의 상태의 노동조합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용적인 차원에서 민주당과의 협력이 쌓이면 전략적 차원에서 협력을 강화하려는 문화가 싹튼다. 지난 대선 시기 민주노총 대선 방침 결정을 무산시킨 세력 가운데 한 진영은, 민주당 후보인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이들은 민주노총이 공식적으로 노동자후보를 지명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문재인 지지율을 높이고자 했다.

<참고 문헌>

활동가 인터뷰 A, 공공운수노동조합
활동가 인터뷰 B, 금속노조
활동가 인터뷰 C, 부산지하철노동조합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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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남종석
부경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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