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무엇에 분노하나?
진짜 본질은 우리 눈과 귀, 의식 밖으로 밀려나
    2017년 09월 18일 02:3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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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가끔가다가 우리 공론의 구조를 보고 놀라곤 합니다. 쉽게 보이고, 잘 알려지고, 손쉬운 가십거리가 되는 것은 공론장의 중심에 들어가도, 본질적으로 더 중요한 부분들은 계속 침묵 속에서 묻히고 맙니다. “명망”, “이름”, 즉 상징자본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주류 사회와 미디오의 금기 사항이라서 그럴 수도 있는 거죠.

며칠 전에 한 유명 시인이 특급호텔에 홍보를 대가로 해서 자신에게 방을 무료 내지 할인 조건으로 장기 임대할 것을 제안해 화제에 올랐습니다. 그 시인은 속칭 명문대를 졸업하고, 유명 문예지에다가 글을 발표하고 사회 명망가들과 두루 잘 알고 화제작이 된 시집을 냈기에 그런 제안을 할 수 있었고, 또 그 제안은 사회적 관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은 “유명 시인이 특급 호텔에 방을 원한다”는 뉴스 뒤에 숨겨져 있는 현실은 가십거리 될 성질이라기보다는 시급히 어떤 사회적 대책을 요구하는 현실이죠. 유명 시인도 자신의 집이 없으며 저소득층으로 분류되지만, 꼭 이 정도로 유명하지 않는 대부분의 시인, 소설가들의 현황은 과연 어떨까요? 대부분은 한 달 소득은 100만원 안팎이죠. 그것도 극도로 불안전하고요.

소득이 이렇게 낮은 이유를 두 개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국가로부터의 생계 지원이 없거나 미미하고, 또 하나는 물가들이 다 올라도 대부분 잡지 등의 원고료가 잘 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강의료도 그렇고요. 잡지를 내고 강연을 부탁하는 대부분의 단체들은 정기적으로 지원을 받는 건 아니니까요. 결국 저(低)복지 국가라는 현실은 문학인들의 구조적 빈곤으로 이어지는데, 그 이야기를 거의 듣기가 어려웠습니다.

참, 서울 같으면 길거리나 안식처, 판자촌에서 사는 주거취약 인구는 전체 인구의 3,2%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들은 호텔에 방을 달라고 해서 화제에 오를 수 있을까요?

유명 시인만큼은 또 유명 배우들도 자주 화제에 오릅니다. 최근에 두 유명 배우 얼굴들을 합친 가짜 사진을 만들어서 극우적 정권에 비판적인 이 두 배우들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한 국정원의 외곽 “알바”들의 악행들은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천인공노할 악행임에 틀림없으며 개개인의 사생활 침해와 허위사실 유포에 세금 돈이 쓰였다는 것은 누가 봐도, 극우들이 좋아하는 표현대로 “국기문란”입니다.

한데 국가범죄에도 등급이 있어요. 허위사실 유포도 극악한 범죄지만 예컨대 외국 국민의 납치와 감금, 아니면 외국 국가원수에 대한 암살 시도 등은 그것보다 더하면 훨씬 더한 범행들입니다. 국정원이 지난 시기에 중국에서의 북한 식당의 12명 여종업원들을 그들의 동의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지배인을 포섭해 그를 통해 “비자발적으로 계획 탈북시킨”, 즉 사실상 납치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확증이 아직 없어 진상을 다 알 수 없지만, 지금껏 12명 여종업원들과의 연락이 차단되며 그들이 사회에 내보내지지 않은 사실상의 감금/연금 상태에 있는 것으로 봐서는 이 혐의는 절대 근거가 없는 것만은 아닙니다. 북한 측에서는 거기에다 국정원이 지난 시기에 북조선의 지도자 김정은에 대한 암살을 획책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러시아 원동에서 일하고 있었던 북한인을 포섭했다는 주장도 제기합니다.

사실인지 어떤지 확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북 측에서 제시되는 구체적인 디테일 (포섭 대상자와 공작 담당자의 실명 등등)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는 적어도 구체적인 수사라도 해서 구체적인 석명이라도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요?

한데 여종업원에 대한 이야기는 그나마 조금 들려도 암살 기도 문제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들리지도 않습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면 이는 잘못하면 전쟁을 부를 수도 있었던 엄청난 규모의 적폐 중의 적폐이었을 터인데,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의 부재는 정말 이상하기 끝이 없습니다…

외부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트럼프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한국에서 우파 사이에서도 찾기가 쉽지 않지만, 예컨대 트럼프가 아프간에서의 미군 잔류 및 증원을 결정했을 때에 국내언론에서는 아주 간단한 질문 하나 그 누구도 던지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미국 본토로부터 머나먼 아프간에서의 미군의 지속적인 “빨치산 토벌 작전” 참여의 국제법적인 근거가 무엇인가라는 질문 말이죠.

본래의 명분은 9.11 테러를 저질렀다는 오사마 빈 라덴 등 휘하 테러 단체들의 테러 기지 공격 등 “테러에 대한 자위권”이었는데, 빈 라덴이 죽은 지 이미 꽤 된 오늘날 시점에서는 이 명분은 “시효”가 다 된 셈입니다. 탈레반 재집권의 방지? 탈레반을 좋아할 일은 저로서 없어도, 탈레반이 집권하든 화성인들이 우주선을 타고 와서 집권하든 아프간에서의 “집권”의 문제는 원칙상 미 정부나 미군과 무슨 관계가 있어야 하죠? 유엔헌장에도 타국 내정 간섭에 대한 금지가 명기돼 있는데요…

한데 그런, 자명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안합니다. 세계적 깡패 국가와의 “혈맹”으로서 우리도 깡패 보조원이 된다는 무의식적 불편함 때문인지.

공론장에서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입니다. 이미 상징자본 축적이 잘 돼 있는 측은, 계속해서 화제에 오름으로써 그 자본 (“유명세”)을 계속 확대재생산시킬 수 있는 거죠. 그러나 명망가 이름들이 계속 인구에 회자되는 그 사이에 문제의 진짜 본질은 사람들의 눈과 귀에 들어가지 않고 수많은 비극들은 우리 의식 밖으로 밀려납니다. 그렇게 해서 이 헬은 굴러가고 있는 거죠…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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