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청와대 엿 먹이다
    [누리야 아빠랑 산에 가자 ㉕] 침탈
        2017년 09월 15일 10:3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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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닷새 만의 귀가였다. 아내는 외식을 하자고 했다. 바깥에서 하루 한두 끼 컵라면 따위로 때우는 걸 걱정하더니, 고기라도 먹이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지난 나흘 동안 나는 끼니를 번번이 건너뛰었다. 극도로 긴장하면 음식을 좀체 받아들이지 못하는 체질이었다. 사흘쯤 굶는 건 일도 아니었다. 체력 지탱엔 별 지장 없었다.

    나는 일상에서도 소식을 실행하고 있었고, 아침과 저녁 두 끼였다. 점심은 걸렀다. 전태일재단에 있을 땐 거르지 않았다. 대 놓고 먹는 밥집이 있었다. 활동 공간을 민주노총으로 옮기고선 점심을 각자 사 먹어야 했다. 활동비에 밥값이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내 용돈은 월 40만 원이었다. 지금은 50만 원으로 인상됐지만, 아무튼 차비와 통신료와 담배면 땡이었다. 경조사비에 술값 등을 치르면 늘 적자였다. 돈도 없고 날렵한 몸도 유지할 겸 점심을 끊었다. 대신에 아침은 새벽 몇 시에 출근하건 네댓 술은 반드시 먹었다. 저녁은 술자리 또는 집에서 혼자 마시는 막걸리로 대신했다. 그렇게 아침저녁 두 끼면 충분했다.

    기름 메고 장돌뱅이 생활을 했다는 젊은 시절의 외할아버지 체질을 물려받지 않았을까 싶었다. 예전 장돌뱅이는 봇짐 지고 들길산길 떠도느라 제때 밥 챙겨 먹는 건 불가능했을 터였다. 하루 한 끼로도 호사인 경우가 다반사였다고 했다. 지금처럼 음식점이 산골까지 뒤덮은 시대가 아니었다.

    내가 점심을 포기한 적이 또 있기는 했다. 1998년부터였다. 금속노조의 전신인 금속산업연맹 시절이었다. 활동비에 밥값 8만 원이 포함됐다. 웬 떡이냐 싶었다. 매달 활동비 받는 것만도 감지덕지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왠지 미안했다. 어렵게 활동하는 동지들이 눈에 밟혔다. 모두를 챙길 순 없었다. 안기호에게 5만 원, 함평기에게 3만 원을 자동이체 했다. 둘 다 나와는 정파가 달랐지만, 어려운 조건에서도 열심히 실천하던 활동가들이었다. 아마 내가 금속연맹을 그만뒀던 2004년까지 이체됐을 거다. 그렇게 점심을 걸렀다.

    “석호 형은 점심시간만 되면 딴짓해. 이상한 사람이야. 밥은 안 먹고.”

    당시 금속연맹 사무처에서 함께 일하던 임혜숙과 송기애가 종종 하던 핀잔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이유를 밝히진 않은 채, 씩 웃어넘기곤 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사연을 알게 된 아내가 밥 굶지 말라면서 용돈을 올려 주었다.

    아무튼 나이 들어서 다시 소식에 익숙해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남들 점심 먹을 때 혼자 남은 내 자신이 측은했고, 배가 고팠다. 그렇지만 적응하고 나니 좋았다. 적게 먹어도 건강에 아무 탈 없었다. 키 170센티미터에 72킬로그램까지 나가던 몸이 청년 시절 몸무게였던 64킬로그램 언저리로 떨어졌다.

    몸이 가벼우니, 배 나오는 나이대의 동년배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정신없이 일 벌이는 나 같은 유형에겐 적격이었다. 인간인 나의 생명을 유지하느라 자신의 생명을 무참하게 희생당하는 동식물에게 그나마 눈곱만큼이라도 낫지 않겠나 싶은, 위안 아닌 위안도 들었다.

    사무실 뒷정리를 하느라 늦었다. 민주노총 사무실에 경찰들이 쳐들어와서 난장판이 됐기 때문이었다. 외식 장소는 아내가 운영하는 후암동 종점수다방 아래층 고깃집이었다. 여성 3대가 오겹살을 구워 정겹게 먹고 있었다.

    “자, 받아. 백기완 할아버지가 주시는 용돈이야.”

    나는 먼저 딸아이에게 돈을 전달했다. 딸은 헤~, 웃으며 받았다.

    나는 틈나는 대로 백기완 선생을 모시고 있었다. 주로 수행 담당이었다. 잠깐 동안 백기완 선생께서 좀 쓸쓸하고 적적하신 적이 있었다. 그때 문화다양성포럼을 함께 만들고 이끌던 명필름 영화감독 이은,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이사장 양기환과 나, 셋은 백기완 선생님을 잘 모시자고 했다. 그 뒤 백기완 선생께선 가끔 아이에게 주라며 용돈을 건네셨다. 한 번도 말씀 드린 적이 없는데 내 형편을 알고 계셨다. 이번에는 박근혜에 맞서 잘 싸웠다며 격려차 민주노총을 방문했다가 용돈을 주신 거였다.

    백기완 선생은 살아 있는 현대사였다. 박정희 독재 치하에서 장준하 선생과 더불어 긴급조치 1호로 구속됐고, 모진 고문도 온몸으로 견뎌야 했다. 한평생을 민주주의에 헌신하면서, 현재까지 그 어떤 정권에게도 단 한 차례 굴하지 않았다. 1987년 대선 때는 야당과 재야를 하나로 묶어 유신 잔당을 청산하기 위해 민중 후보로 출마했다. 팔순 넘은 지금도 연로한 몸을 이끌고서 노동자를 비롯한 고통당하는 민초들의 투쟁 현장에 격려하러 다녔다. 백기완

    선생은 ‘달동네, 새내기, 동아리’ 같은 순우리말을 끄집어내어 널리 쓰이게 하는 등 우리말 쓰기 운동에도 앞장서고 있었다. 시대의 큰 어른이었다.

    회식 자리의 대화 내용은 어제 사건이었다. 닷새 만에 귀가할 수밖에 없었던 연유였다. 노동운동사에 기록될 2013년 12월 22일, 그러니까 어제 민주노총 사무실이 침탈당했다. TV와 인터넷에선 아침부터 밤까지 생중계를 하다시피 했다. 집에서 딸과 아내도 계속 TV를 봤다고 했다. 화면에 비친 내 모습도 봤단다. 노동운동을 했던 아내야 그렇다 치고, 또 지난 30년간 아들의 온갖 수난을 지켜보며 단련된 할매도 그렇다 쳐도, 딸애까지 담담하고 여유로웠다. 경찰의 폭력이 화면에 여과 없이 비춰졌을 텐데, 거기에 아빠가 있다는 걸 확인한 상태였는데도, 걱정했다는 표정이나 말투가 아니었다.

    “향후의 상황 전개에 따라선 내가 또 감옥에 갈 수 있어.”

    “그럼, 아빠 잘 갔다 와.”

    역시 내 딸이구나 싶었다. 우리는 소주와 막걸리를 곁들여 기분 좋게 먹고 마셨다. 집에 들어와서 JTBC 손석희 뉴스를 시청했다. 여진이 컸다. 대한민국 경찰이 억세게 조롱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경찰은 민주노총 사무실에 진입하지 않으려고 고심했다는 것을. 청와대가 강하게 밀어붙였다는 것을. 그래서 청와대 코가 납작하게 꺾였다는 것을.

    박근혜 정부는 수서발 KTX를 코레일로부터 분리해 민간 자본에 넘기겠다는 의도를 드러냈다. 사고 위험이 높아지고 요금도 인상될 게 불 보듯 뻔했다. 철도노조가 항의하며 12월 9일부터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국민 대다수는 파업을 지지했다. 정부는 철도노조 위원장 김명환을 비롯한 주요 집행부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철도노조는 피신 겸 상황실을 민주노총 사무실로 옮겼다.

    민주노총 18년 역사에서 경찰이 중앙 사무실을 침탈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민주노총과 정부가 아무리 격하게 갈등해도, 역대 정부들이 취한 불문율의 예의였다. 게다가 사무실은 언론사인 경향신문사 건물에 입주해 있었다. 설마 경찰이 침탈하겠나 싶었다. 애초 경찰도 들어올 계획이 없었다.

    박근혜의 청와대는 역시 막돼먹은 집단이었다. 철도 파업이 완강하게 진행되고 국민 지지가 더욱 높아지자, 민주노총 사무실에 진입해 철도노조 집행부를 연행하라고 경찰을 압박했다. 경찰은 불가 의견을 냈으나, 막무가내 밀어붙이는 청와대 압박을 견딜 재간이 없었다. 병력 투입을 준비했다.

    미리 눈치 챈 민주노총은 다양한 대비책을 마련했다. 진입 시간이 코앞인 이틀 전 밤부터 민주노총 사무실은 분주했다. 우선 계단 난간을 끈으로 엮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다. 경향신문사 건물은 매우 오래 되어서 계단 폭은 두 사람이 똑바로 걸을 수 없을 만큼 좁은데, 계단과 계단 사이 빈공간은 폭이 넓었다. 16층에서 1층까지 휑하게 뚫려 있었다. 경찰은 필시 계단을 통해 진입할 텐데, 서로 뒤엉키면 우리든 경찰이든 난간으로 떨어져 죽게 될 상황이었다. 그것만큼은 기필코 막아야 했다.

    우리는 방어 계획을 촘촘히 짰고, 역할도 세세하게 분담했다. 곳곳에 바리케이드도 준비했다. 호락호락 당할 민주노총이 아니었다. 김정근과 이근원은 좌우 양쪽의 계단 방어를 책임졌다. 박병우는 극비 작전을 책임졌다.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민주노총 사무총국 전체 성원은 각각의 역할을 숙지했다. 나는 상황을 총괄했다.

    어제 아침 경찰 5,000여 명이 건물 주변을 에워쌌고 진입 작전이 시작됐다. 고작해야 300여 명에 불과한 우리는 로비와 계단과 사무실에 분산되어 방어에 돌입했다. 모두 연행을 각오했다. 경찰은 건물 입구에서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평화 인간 띠’를 만든 민주노총 임원들을 강제로 연행했다. 또 경향신문사 1층 유리 현관문을 대형 해머로 산산조각 부쉈다. 또 로비를 가득 채우고 서로의 몸을 팔짱으로 연결한 채 온몸으로 절규하는 여성과 남성을 가리지 않고 질질 끌고 나갔다.

    처참한 광경이 숱한 매체를 통해 낱낱이 생중계 됐다. 전국의 조합원과 국민은 분개했다. 수도권 활동가들은 민주노총 앞으로 몰려와 항의했다. 민주노총 14층 사무실에서는 창밖으로 깃발을 흔들며 화답했다. 그렇게 9시간 넘는 공방이 벌어졌다. 그러나 끝내 민주노총 사무실은 경찰에게 침탈당했다. 허탈감에 눈물 흘린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극적 반전이 일어났다. 경찰이 사무실에 진입하는 순간, 민주노총 사무실에 철도노조 집행부가 없다는 것을 미리 파악한 언론들이 앞 다퉈 속보를 날렸다. 민주노총 주변에 모여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TV로 지켜보며 분노하고 있던 지방의 활동가들이 날린 기쁨의 문자가 내 휴대폰에 날아들었다. 귀신도 모르게 피신시킨 상태였다. 몇몇만 아는 극비였다. 경찰은 13층부터 15층까지의 사무실을 샅샅이 뒤졌으나, 단 한 사람도 찾지 못했다. 경찰, 아니 박근혜의 청와대는 떡이 되었다. 누군가는 어제의 공방과 쾌거를 ‘정동대첩’이라 칭했다.

    경찰은 단 한 명의 철도노조 집행부도 찾지 못한 채 허탕을 쳤다.

    뉴스를 시청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몹시 고단한데도 쉬이 잠들지 못했다. 머릿속에선 피신시킨 철도노조 집행부를 다시금 사무실로 들여오는 구상이 떠올랐다. 민주노총 사무실 침탈이라는 초유의 치욕을 안긴 안하무인 박근혜와 김기춘의 청와대를 확실하게 엿 먹일 수 있겠다 싶었다.

    필자소개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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