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미포조선 사측,
    시청에서 노조설립신고서 탈취
    [한 장의 사진②] 현대엔진 이은 두 번째 민주노조
        2017년 09월 14일 01:1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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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7월 15일 저녁, 울산노동회관 입구는 아수라장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려는 노동자와 막으려는 회사관리자와 용역이 뒤엉켜 일촉즉발 직전이었다. 고압적인 회사관리자는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없던 일로 해주겠다”라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용역들은 몸싸움을 도발하며 폭력을 조장했다. 노동자의 선두를 이끌던 김영환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누군가와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곧이어 노동자들은 삼삼오오 회관을 빠져나갔다.

    두 시간 후, 39명의 노동자들은 누군가의 집 방과 마당을 가득 채우며 다시 모였다. 현대엔진에 이어 두 번째 민주노조, 현대미포조선노동조합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 자리에는 열흘 전 현대엔진노동조합을 참관했던 한국노총 금속노련 조직부장이 다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진우 조직부장은 계속 울산을 잠행하고 있었다.

    7월 16일 아침, 현대미포조선 노동조합 대표 6명은 노조설립신고서를 제출하기 위해 시청 사회과에 서류를 내밀었다. 그때, 근처에서 잠복하고 있던 사측 관리자와 용역들이 난입해 폭력을 행사하며 노조설립신고서를 탈취해 달아났다.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조합대표들이 공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소식을 전해들은 노동자들이 기계를 멈추고 하나둘씩 운동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불어나 전체 노동자의 삼분의 이가 넘는 2천여 명이 참여했다. 김영환 위원장은 즉각 총파업을 선언하고 사장의 퇴진을 요구했다. 천 오백여 명의 노동자들이 노조에 가입원서를 제출하면서 환호로 화답했다.

    사측은 노동자들을 협박하면서 해산시킬 방안에 골몰했지만 사태는 회사와 노동자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됐다. 눈앞에서 탈취를 지켜본 시청이 서류를 돌려달라며 강력히 항의를 한 것이다. 시청의 항의를 평소처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미포조선이 미적거리자 시청은 곧바로 공무집행방해로 남부경찰서에 고발장을 제출해버렸다.

    폭탄을 떠않은 경찰서가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노동부에서 한 통의 전화가 날아왔다. 근로기준법에 따라 ‘단호하게’ 처리하라는 내용이었다. 남부경찰서는 노조설립신고서를 즉시 시청에게 돌려주지 않을 경우 법적 처리를 하겠다고 통보했다. 미포조선은 서류를 돌려주고 그날 밤 노동조합의 설립을 인정하는 백기를 들었다.

    당시 회사의 설립신고서 탈취 사건을 다룬 기사 캡처

    6·29선언 이후 민정당 대선후보인 노태우는 직선제를 돌파하기 위해 이른바 ‘유화조치’라는 것을 선언했다. 6·29선언이 민주적인 내용과 전혀 거리가 멀다며 점거농성투쟁을 한 사람들을 ‘훈방’으로 석방한 것이 대표적인 예였다. 직선제로 대통령에 당선되어야 하는 노태우는 이전의 군사정권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미포조선 노조설립신고서 탈취 사건 직후 노동부는 노조 설립, 사측의 단협 거부, 노조활동 탄압에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최초의 투쟁들은 입으로 전해지지만 사진과 같은 기록으로 남지 않는다. 노동자대투쟁의 서막을 열었던 현대엔진이 그랬다. 역사는 두 번째 인물과 사건을 기억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미포조선의 투쟁도 마찬가지다. 현대엔진과 함께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남지 않았지만 두 번째 달에 발을 디딘 사람처럼 그 이름들과 투쟁이 노동자대투쟁의 역사에 변방처럼 기록들이 남아있지 않다. 물론, 미포조선은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전환점을 제공했지만 90년대 이후 스스로 민주노조운동을 이탈했다. 자신들의 역사가 복원되지 못하는 이유는 미포조선 노동자들 자신들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한 장의 사진①] 디스코텍에서 시작된 노동자 대투쟁의 서막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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