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신의 추억⑤
    대통령은 박정희만 하는 줄 알았던 때
        2012년 08월 25일 12:1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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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인 1974년 8월 15일에 ‘박정희저격 미수사건’이 발생했다. 재일교포 문세광이 발사한 총알이 기념사를 낭독하던 박정희를 비껴간 대신 뒤에 앉아 있던 육영수 여사를 관통하고 말았다.

    육영수 여사를 맞힌 총알의 발사자가 누군가에 대해서는 최근에 논란이 된 바 있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문세광이 발사한 총알에 맞았다.

    어린 나이였던 나에게도 그 사건은 큰 충격이었다. 세상에서는 육영수 여사의 죽음을 ‘국모’의 죽음으로 간주하고 슬퍼했던 기억이 난다. 육영수 여사의 자상한 이미지도 한 몫했을 것이다.

    나는 당시 특별활동으로 축구부를 했었는데, 개학과 함께 축구부 담당 선생님께서 해주셨던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북괴가 박대통령을 암살하는데 성공했다면 대통령 선거를 다시 해야잖아? 그럼 북에서 보낸 간첩 세 명이 출마하고 우리나라에서 한 명 출마했는데, 그 중 간첩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우리나라는 공산화되는 거잖아!”

    나는 축구부 선생님의 명쾌한(?) 설명을 들은 후에야 복잡했던 머리가 깔끔하게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으면 절대 안 되겠구나!’

    유신시절 나같은 초딩들은 대통령은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당연히 계속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대통령이라는 칭호는 박정희에게만 붙는 고유한 칭호인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스포츠 종목인 축구의 대통령배 국제대회의 명칭도 ‘박스컵’이었으니 오죽했으랴.

    사실 내가 대통령 선거를 기억하는 것은 78년이 처음이다. 내가 65년생이니까 태어난 이후 대통령 선거는 67년, 71년, 72년 이렇게 세 번의 대통령 선거가 지나갔음에도 너무 어린 나이 탓인지 기억에 없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해인 72년도에 초등학교에서 투표하던 장면이 어렴풋이 떠오르지만, 아마도 10월 19일 유신헌법의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 장면이거나 12월 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 장면이었을 것이다. 태어난 이후 그때까지 대통령 한 번 바뀌는 걸 본 적이 없는 내가 과거의 대통령 선거를 기억한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체육관에 모여 99%의 찬성으로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통일주체국민회의

    그런 내가 78년도의 대통령 선거를 기억하는 것은 아마도 다음 해에 터진 ‘10․26 사건’과 연동해서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중학교 1학년생이던 78년도 여름 등교를 준비하던 나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장충체육관에 모여 대통령선거 투표를 했다’면서 ‘박정희 ‘후보’가 2578표 중 찬성 2577표, 무효 1표로 당선되었다’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들으면서 박정희 뒤에 붙던 ‘후보’라는 칭호가 그렇게 어색하게 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한 표의 무효표를 제외하고는 다 박정희를 선택했다는 사실도 놀랍게 다가왔다. (박정희는 72년 대선에서는 전체 대의원 2,359명 중에 2명의 무효표를 제외한 2,357표를 획득해 당선된다. 78년의 선거는 박정희에게는 72년도보다 진전된 선거결과를 보여준다. 무효표가 2표에서 1표로 줄어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마음도 영원하지는 않았다. 중학생이 되고 좀 더 성장한 탓이었는지, 아니면 야성이 강한 아버지 탓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박정희에 대해 점점 비판적인 시각을 갖기 시작했다.

    그럴 즈음에 박정희 유신 독재의 몰락을 알리는 ‘10․26 사건’이 터지게 된다. 박정희가 죽기 하루 전 그는 내 고향 당진의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하여 대통령으로서 그의 마지막 공식행사를 치른다. 행사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 새벽까지 술판을 벌이던 박정희는 자신의 부하인 김재규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둔다.

    당시 내가 다닌 합덕중학교는 삽교천에서 좀 떨어져 있던 관계로 동원되지 않았지만, 삽교천 근처의 신평중학교 학생들은 강제로 동원되어 태극기를 흔들면서 박정희를 환영했다고 한다.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10월 26일의 아침. 학교 갈 준비에 바쁜데 라디오에서는 이상한 음악만 나오고, 아버지와 나는 ‘유고’의 정확한 뜻을 몰라 헤매다가 나의 입에서 갑자기 “박정희가 죽은 거 아녀요?”라는 말이 나오면서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박정희의 죽음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나중에 학교에서 돌아온 후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우리집 바로 윗집에서는 식구들이 함께 오열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그러나 야성이 강했던 아버지와 그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전혀 나는 슬프지 않았다.

    아버지와 나도 한 자연인의 죽음에 조의를 표하지 않을 정도로 속이 좁은 사람은 아니었으나,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은 기쁨이었을지언정 결코 슬픔일 수 없었다. 속으로 좋으면서도 그 기쁨을 겉으로 선뜻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을 따름이다.

    친구와 학교에 가면서도 나는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 좋은 일이 생겼다는 생각으로 “박정희가 죽은 것 같다!”며 당혹스러워하는 친구에게 “잘 된 일이다!”라고 이야기했던 기억이 새롭다.

    대한민국의 전반기 역사는 ‘국부’로 불리길 희망했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나, 5․16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것도 모자라 유신체제를 몰아부친 박정희나 하나같이 종신 대통령이 되고자 했던 욕망에 의해 헌법을 비롯한 법과 제도가 유린되고 공공연하게 선거부정이 자행됨으로써 민주주의가 무참히 짓밟힌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끝내 이를 극복해 왔다. 유신시대와 같은 끔찍한 시대를 되돌아보면 볼수록 반유신투쟁, 부마민중항쟁, 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 등 우리 민중의 역사에 더 강한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아울러 오늘의 이러저러한 어려움도 마침내 극복해나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필자소개
    민주노동당 의정지원단장, 진보신당 동작당협 위원장을 역임했고, 현재 친구였던 고 박종철 열사의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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