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광터널 충돌사고
    [철도이야기] 1970년 사고의 재구성
    By 유균
        2017년 09월 11일 11:4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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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10월 17일 오전 11시 15분쯤 원주-유교 간 삼광터널(원주역 남쪽 2.5km)에서 수학여행 학생을 가득 태우고 안동으로 가던 77여객열차와 제천을 떠나 청량리로 오던 1508화물열차가 정면충돌, 서울 인창고교 2학년 1반 학생 10명과 교감 등 모두 14명이 사망하고 27명이 중상, 32명이 경상을 입었다.

    이미지를 위해 사진을 합성한 것임

    사고는 77열차(12량)가 길이 1백70m의 삼광굴을 거의 빠져나가 남쪽입구 3m를 남겨놓은 지점에서 화차 28량에 석탄과 목재를 싣고 달려오는 화물열차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순간 2학년 1, 2반 학생들이 탔던 첫 번째 객차는 육중한 디젤기관차의 반동에 오그라들면서 기관차 위로 튕겨 올랐다. 객차의 바닥이 내려앉고 의자와 의자가 밀착되듯 좁혀지면서 학생들은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철도청 조사에 의하면 77열차가 멈추어 있던 원주역의 출발신호기가 청신호, 적신호로 깜빡거려 망우타워에 장애를 신고했다. 망우타워에서는 신호기가 고장 났을지 모르니 수동으로 출발시키라는 운행명령(87호)을 내렸다. 원주역은 출발을 꺼려하는 77열차 기관사에게 타워의 명령이라면서 손으로 포인트를 조정, 차를 출발시켰다. 열차가 홈을 벗어나자 타워에서 장애통보가 왔는데 이때는 열차를 세울 수가 없었고 얼마 후 충돌참사를 빚었다는 것이다.

    한편, 무인교행 역인 간이역의 신호장치 보수자는 출발신호기가 적신호를 나타내고 있었는데도 1508화물열차가 그대로 떠나버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적신호를 보고 떠났다면 화물열차는 열차가 진행하는 본선으로 들어가지 않고 교행선과 연결돼 있는 안전측선으로 들어가 전복됐어야 하는 결론이다. 이에 따라 철도청 조사반은 첫째의 원인을 CTC 고장으로 보고 있으며 둘째는 유교역에 신호를 잘못 보낸 조작 미스로 추정하고 계속 규명중이다.

    (의 기사는 10월 17일, 18일자 조선일보에서 발췌하였으며 기사에 나오는 이름들은 삭제하였습니다.)

    사고의 원인은 망우사령에서 규정에 위반된 지시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했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당시는 이미 발차한 열차를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고 이후로 무전기가 본격적으로 지급되기 시작했습니다. 또 사고 지점 역시 한쪽은 곡선이고 다른 한쪽은 터널이라서 열차는 보는 순간이라면 부딪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리고 77열차는 당시 완행열차였으며 삼광터널은 원주터널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왜 이름이 바뀌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네요.

    이러한 사실을 자세히 알리기 위해서 두 장의 사진을 붙여서 재구성을 해보았습니다. 물론 저도 이런 작업이 즐거울 리 없지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만들어서 올려놓는 이유가 대형사고이었음에도 이제는 아무런 흔적이 없습니다. 또 뭇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사라졌습니다.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기에 돌아가신 분의 넋이라도 위로하는 ‘비’라도 세웠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올려봅니다.

    위의 글을 쓴 지 10년이 지났네요. 제가 쓴 글을 가끔 읽어보는데, 여전히 가슴이 아픕니다. 청량리역 지부장을 하면서 비석을 세우기 위해서 지부 운영비 중 일부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위의 글을 조합원에게 설명하였고 승인도 받았습니다. 마무리로 비석에 넣을 글을 써 줄 사람을 찾고 있던 중 철도에서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 돈을 파업 비용으로 모두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한 번 꺾어지고 나니 영 그만이네요.

    필자소개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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