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지하철노조 30년, 의미와 과제
    [789 대투쟁 30년] 계급성 민주성 연대성의 관점
        2017년 08월 30일 02:13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 30주년이 되는 요즈음 주요 민주노조들도 노조 설립 30주년을 맞고 있다. 한국 민주노조의 주력들이 대부분 이때 1987년 7~9월을 즈음하여 노조를 만들고 본격적인 투쟁과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87년 설립된 민주노조를 대표하는 곳 중의 하나인 서울지하철노조도 노조 3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치렀다. 그중 지난 8일 진행한 창립 30주년 기념 대토론회의 주발제문이었던 ‘노동자역사 한내’의 정경원씨가 서울지하철노조 투쟁의 역사와 의미, 과제 등에 대해 발표한 내용을 다소 길지만 게재한다.<편집자>
    —————————————- 

    들어가며

    서울지하철노동조합의 30년 흐름은 정권과 노동조합의 대립지점, 노동조합의 핵심 활동 방향에 따라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노조 설립과 차별 철폐를 위한 투쟁의 시기, 민주노조의 기틀을 마련하고 연대의 틀을 확장한 시기,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서 내외부적으로 힘겨운 투쟁을 이어간 시기, 민주노조 재건과 재도약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이 흐름은 정권 교체, 노동정책의 흐름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지하철노조의 투쟁을 ‘5년 주기 투쟁’이라 했는데 이는 그저 햇수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새로운 정권이 등장하고 자본과 노동의 관계 파악을 일정 마무리한 후 정권과 노동이 격돌하게 되고 그 여파로 노조가 조직을 정비한 후 다시 투쟁을 진행하던 싸이클을 일컬었던 것이다. 지하철노조의 활동과 투쟁이 정권과의 맞장을 피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서울지하철노조는 공공부문 노동조합이기 때문에 대리인에 지나지 않는 서울지하철공사와의 대립이 아니라 서울시, 나아가 정권과의 대립은 불가피한 구조였다.

    여기서는 서울지하철노조의 30년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그 속에서 역사적 의의와 과제를 살펴보겠다.

    자본과 정권에 맞선 서울지하철노동조합 30년 투쟁의 역사

    1987년 6월 항쟁으로 바뀐 정치 사회적 변화를 노동자들은 자신의 계급적 지위를 변화시키는 계기로 만들었다. 울산에서부터 시작된 투쟁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옮겨 붙었고 투쟁이 투쟁을 낳으며 그곳에 민주노조 깃발이 세워졌다. 임금인상, 민주노조 건설이 가장 많은 요구로 나타났다. 당시 낮은 임금은 저임금으로 값싼 노동력을 자본에 공급하는 수탈구조를 유지하는 요수였다. 87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와 정당한 분배투쟁은 자본과 정권의 정책에 파열구를 내는 것이었다. 또한 임금인상 요구의 바탕에는 인간 대접을 받겠다는 의지가 깔려 있었다. 투쟁 현장에는 “인간을 인간답게 대우하라.” “개밥식사 개선하라.” “때리지 마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서울지하철노조도 8월 12일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군자기지, 지축기지, 창동기지를 노동자들의 함성과 요구로 가득 메웠다. 노동조합 결성과 동시에 터져 나온 요구의 핵심은 ‘기능동물’을 끝내자는 차별철폐와 인간으로서의 권리 회복이었다.

    87년 본사 점거투쟁 모습(이하 사진은 서울지하철노조)

    한편 87년 거세게 치고 나오는 노동자들의 기세에 밀려 자본과 정권은 미처 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 노동계급의 등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88년에도 그 진군은 계속되었다. 마창노련을 시작으로 지역조직들이 만들어졌고 서울지하철노조도 서울지역 연대 투쟁의 경험을 모아 서노협 건설에 앞장섰다. 88년 11월 전국노동자 5만 명이 모여 대회를 치르고 여의도까기 행진하여 노동법개정투쟁을 전개했다.

    노동자 투쟁에 대한 국민들의 호응도 좋았다. 6월 항쟁으로 변화를 기대했으나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상황에 노동자들이 줄기차게 투쟁하는 모습은 박수를 보낼만한 일이었다. 경제는 좋아지는데 분배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주택문제, 전월세 문제 등이 심각해지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은 더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1989년 들어 자본과 정권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노태우는 ‘민생치안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노동자 초토화 작전에 돌입했다. 여세를 몰아 국회에서 통과된 노동법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다. 노동자의 전국조직 전노협에 대항하여 보수진영을 재편해 민자당을 창당하였고 흩어져 있는 자본의 통일을 위해 경단협을 창설했다. 87년 이후 역전되었던 계급관계를 되돌리기 위한 자본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풍산금속 안강공장 공권력 투입, 울산에서 발생한 테러, 모토로라 방화사건 등 노골적인 탄압이 시작된 것이다. 1989년은 노동운동진영에는 87년 이전으로 돌아갈 것인가, 자본의 반격에 맞서 투쟁하며 앞으로 나갈 것인가를 가늠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지하철노조의 3.16투쟁은 이러한 자본과 노동의 최전선에서 벌어진 투쟁이었다.

    1988년 직제개편 투쟁 전진대회

    서울지하철노조는 노조 설립 한 달 만에 4,800명이 넘는 조합원이 가입한 공공부문의 선두 노조로 자리매김했고 이후 3년 동안 차별철폐를 위한 직제개편 투쟁을 줄기차게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심과 정의로 시작한 지도부가 자본과 정권의 전방위적 공세와 부딪히면서 그 한계를 드러냈고 밑으로부터의 분출하는 요구와 분노를 담아내지 못한 채 교체되었지만, 조합원들은 결국 1989년 3월 16일 자본과 정권에 맞선 투쟁을 전개했다. 이 투쟁은 서울지하철노조 조합원과 공사의 투쟁이 아니라 노동자와 자본과 정권의 전선이었다. 노태우 정권은 서울지하철노조의 투쟁에 무자비한 탄압으로 응했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탄압에 굴하지 않았다. 2,345명이 연행되고 위원장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감옥에 갔지만 7일간 조합원들이 이어간 자발적 투쟁은 자본과 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1989년 청와대 진격투쟁 중 경복궁에서 경찰과의 대치 모습

    1990년 전노협은 현대중공업, KBS 노조 파업에 연대하여 전국 총파업을 조직했다. 이 투쟁으로 전노협은 지도부 대부분이 구속 수배되었지만 그 투쟁의 영향을 받아 대공장들이 민주화되기 시작했다. 이를 깨기 위해 자본과 정권의 탄압이 집중되었고 안기부의 공작도 노골적이었다. 서울지하철노조도 안기부의 공작으로부터 예외가 아니었다. “정윤광 위원장만 아니면 뭐든 들어주겠다.”는 회유, 노조를 노조로 인정하지 않는 대표권 시비, 노골적인 탄압에 맞서 서울지하철 노동자들은 직무대행체제를 유지했다. 이는 민주노조를 사수한 것은 ‘감옥에 있는 위원장에 대한 의리’를 지킨 것을 넘어 정권에 맞서 끈질긴 투쟁을 전개한 것이었다.

    대공장노조의 민주성을 제거하기 위해 정권은 지도부에 직접 압력을 넣거나 노노갈등을 조장하는 방법을 동원했다. 이로 인해 많은 사업장에 내부 분란이 일고 사측 입맛에 맞는 지도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여기에 현실 사회주의 몰락으로 많은 사업장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운동권’들이 대거 이탈하거나 이들에 대한 불신이 퍼져가면서 노조 활동에서 ‘운동성’이 배제되기 시작했다. ‘운동성’ 대신 ‘합리성’, ‘정책대안’이라는 자본의 대안이 노동자들에게 설득력을 가지기 시작했다. 90년부터 민간대기업을 시작으로 자본의 신경영전략이 서서히 성과를 거둔 결과였다. 이는 민간자본에 그치지 않고 공공부문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가리지 않고 업종을 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지하철노조에도 강진도 집행부가 탄생했다. 이는 자본과 정권의 노동운동에 대한 정책의 결과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전투성을 중시하는 조합원들을 기만하며 자신을 가장 급진적인 후보로 포장한 강진도의 선거전략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강진도 집행부는 비리 문제로 퇴장한다. 노동자들에게 비리문제는 운동조직의 생명을 끊어놓는 중요한 기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제도와 물리력을 동원할 수 있는 자본과 정권에 대항하는 이들에게 노동자들이 바라는 첫 덕목은 ‘헌신’이며, ‘도덕성’이었다. 이를 저버린 지도부를 대중은 과감히 버렸다.

    서울지하철노조의 5대 집행부는 이런 ‘비리’를 딛고 선 집행부였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내부 정비였다. 노조를 노조답게 만드는 일을 위해 노조 설립 이후 처음으로 규약규정 정비를 대대적으로 했으며 한편으로는 3.16투쟁 이후 미완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투쟁을 피할 수 없는 집행부였다. 3.16투쟁의 경험을 발판삼아 임금가이드라인을 연대투쟁으로 돌파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집행부는 전지협을 건설해 투쟁을 준비했다.

    연대투쟁을 통한 돌파 전략도 3.16투쟁 이후 서울지하철노조가 노동운동 측면에서 성장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위원장 명령 없이 복귀 없다”, “노동자는 한 번 한 약속을 지킨다”는 결의로 94년 6월 23일 전기협 농성장에 경찰병력이 투입되자 서울지하철노조는 24일 파업하고 곧이어 부산지하철노조가 파업했다. 조합원들은 산개해 현장을 비웠으며 고려대 경희대 동덕여대로 이동하며 경찰병력을 조롱했고 명동성당에서 무더위와 싸우며 파업대오를 유지했다. 복귀하는 순간까지도 연대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이 투쟁은 김영삼 정권의 본질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고 민주노총 건설을 향한 흐름에 가속도를 붙였다.

    자본과 정권은 수많은 해고자, 51억 손배가압류로 보복을 가했다. 6~7대 집행부는 이에 맞서 현장 조직력을 회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어려운 재정을 조합원과 민주노조진영의 연대로 극복해가며 현장은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

    김영삼 정권은 93년과 94년 노경총 임금합의로 노동을 통제하려 하였지만 전지협 투쟁 등 현장의 강한 반발에 뒤로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한국노총은 지지기반을 잃었다. 한국노총에서 탈퇴한 많은 노조들이 민주노총 대열에 합류하면서 민주노총을 빼고 노사관계를 논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1996년 김영삼 정권은 민주노총을 논의 파트너로 끌어들여 법 개정 논의를 진행했지만 결국 노동의 유연화를 꾀하는 자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권임을 드러내며 노사관계개혁위원회는 파탄났다.

    12월 26일 새벽 신한국당 국회의원들은 몰래 국회를 열고 노동법과 안기부법 등을 처리했다. 민주노총은 즉각 총파업에 돌입했고 이 투쟁은 해를 넘겨 계속되었다. 서울지하철노조는 민주노총 지침에 따라 파업하고 명동성당 농성에 합류했고 1월에는 공공부문 노동조합 파업 대오에 함께하며 두 번의 파업을 단행했다.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정권에 대한 분노가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고 전 계급의 참여로 투쟁 전선이 확장되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조합원들의 피로도, 국가경제 문제 등을 이유로 ‘투쟁의 완급조절’을 시작했다. 거리에서의 노개투 전선은 사그라졌고 노동법 개정 문제는 국회 논의로 넘어가 자본의 요구가 관철되는 법 개정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1995년 민주노총 창립 노동자대회 모습

    1999년 노동법 날치기 규탄 총파업(명동성당에서의 모습)

    1999 총파업 종료시기의 집회

    한편 투쟁에 참여했던 노동자들의 가슴에는 추위와 싸우며 명동과 을지로를 누볐던 노개투의 기억이 크게 남았다. 서울지하철노조도 3.16파업, 전지협 파업에 이어 노개투 파업을 통해 조합원의 정치적 의식을 확장했고 선진적인 현장 활동가들을 다수 배출했다. 그 힘이 IMF금융위기를 맞은 자본의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을 가능하게 했다.

    자본은 신자유주의를 관철하기 위해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법제도적으로 확보하고자 했고 김대중 정권은 민주노총을 파트너로 삼아 노사정합의를 통해 관철시켰다. 하지만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합의한 지도부를 끌어내렸다. 상층 지도부를 자본과 정권의 편으로 끌어들인다고 해도 현장의 투쟁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서울지하철노조가 선두에 섰다.

    신자유주의에 맞선 투쟁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민간 사업장 구조조정을 마무리한 자본은 공공부문 구조조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서울지하철노조는 이에 맞서 8일간의 투쟁을 전개했다. 조합원들은 명동성당에서, 서울대에서 공사의 해고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파업대오를 유지했다. 공공연맹은 지하철노조의 투쟁을 중심으로 공공부문 총파업을 이끌어냈다. 투쟁은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한 채 마무리되었지만 이 파업으로 정권의 공공부문에 대한 구조조정은 주춤했다. 하지만 위원장의 복귀명령에 따라 현장으로 간 조합원들은 곳곳에 배치된 경찰병력, 파업파괴자들의 역공에 속수무책이었다. 노사협조세력의 득세와 노노갈등 그리고 이를 이용한 관리자들의 현장탄압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최후의 수단까지 고려한 재파업 시도로 조직을 복원하는가 싶었으나, 조합원들에게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민주세력은 9대 위원장 선거에서 결국 조합원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노사협조주의 노선을 표방한 집행부의 출연으로 서울지하철노조는 파행을 겪었고 현장 조합원들은 관리자들의 통제에 방치되었다. 어렵게 만들어 유지해온 노조의 민주적 운영원리는 부정되었고 규약과 규정은 휴지조각이 되었다. 힘의 우위에 선 공사에 노동조건을 하나씩 내주는 상황에서 민주진영 활동가들이 조합원들의 분노를 투쟁으로 조직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 사이 노사협조 세력은 자신의 기반을 확장해갔고 조합원들은 실리주의 집행부 아래 안주했다. 무파업 선언, 연장운행, 정년축소 등 많은 것을 빼앗기고 난 뒤에야 조합원들은 더이상 밀릴 수 없다는 판단에 민주진영 후보를 위원장으로 선출한다.

    다시 구성된 민주 집행부는 주5일제 쟁취투쟁을 궤도 노동조합 공동투쟁으로 조직하면서 파업에 돌입하지만 조직적 논의 없이 파업을 철회함으로써 조합원들에게 실망을 안겼고 이후 들어선 13대 집행부 또한 혼란스런 조직을 추스르지 못하였다. 노사협조진영과 민주진영의 집행부가 번갈아가며 들어서는 동안 공사는 슬금슬금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실행했고 조합원들은 체념과 패배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해 노사협조주의 집행부는 민주노총 탈퇴를 시도하고 뉴라이트 국민노총 설립을 추진하는 등 노골적인 행보를 했다.

    하지만 민주노조의 기풍을 중요하게 여겨왔고 자본과 정권에 맞선 투쟁을 했던 경험이 있는 서울지하철노조 조합원들은 노사협조진영의 계획대로 응하지 않았고 여기에 시민단체 출신 서울시장 당선으로 정세가 변화하면서 위원장이 복수노조를 만들어 나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다시 민주노조 깃발을 세운 것은 민주노조 재건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시기 서울지하철노조 활동가들과 조합원들은 노동운동진영의 과제를 고민하고 실천하기에 앞서 조직 내부 문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경험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민주진영 활동가들은 노조정상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민주노조 재건에 나섰다. 18대 집행부는 창립 시 만든 선언과 강령을 민주노조의 이념에 맞게 손보고 무너진 현장을 재건하며 연대를 복구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복수노조 설립으로 혼란스럽던 현장은 안정을 찾았고 서울지하철노조 조합원 수는 점점 늘었으며 민주노조로서의 면모를 회복해 갔다. 19대 집행부는 서울지하철공사와 도시철도공사의 통합에 대응하는 과정에 조합원들의 의견을 하나로 모아내지 못하고 위원장이 사퇴하고 보궐집행부가 꾸려졌다. 보궐집행부는 출범과 동시에 구의역 참사 대응, 박근혜 정권의 성과연봉제 반대 파업을 조직했으며 통합 논의를 마무리하였다. 이로써 서울지하철노조는 노조 설립 30년 만에 서울지하철노조와 도시철도노조의 통합 노조 설립을 추진해야 할 과제를 안게 되었다.

    2016년 공공노동자 총파업 모습

    서울지하철노동조합 30년의 역사적 의의와 과제

    민주노조운동의 지표로 삼는 계급성, 민주성, 연대성 측면에서 서울지하철노조의 30년을 돌아보자.

    • 계급성의 측면

    노동조합 설립과 동시에 지하철 노동자들은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투쟁을 전개해왔다. 이는 수도권 교통을 담당하는 노동, 공공부문 노동이라는 특성 때문에 정권의 성격, 정책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데서 오는 것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지하철 노동자들이 자신의 요구를 쟁취하는 데 정권과의 정면충돌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89년 3.16파업은 평등과 차별금지 쟁취를 내걸고 모두가 하나 되어 벌인 투쟁이라는 점, 자신의 투쟁이 공사와의 싸움이 아니라 자본과 정권과의 싸움임을 인식하며 투쟁했다는 점에서 지하철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였으며 계급적 노동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94년 전지협 파업은 민주노총 건설을 앞두고 민주노조진영의 방향성을 설정해준 투쟁으로 당시 노동운동진영의 당면 과제를 실천한 투쟁이었다. 전지협은 94년 투쟁 조직 이후 지하철 노조 간 연대의 틀, 철도노조민주화 지원 틀로 활동하였고 운수노동자의 단결의 구심으로 공공부문 연대투쟁, 조직발전논의를 추동하는 역할을 하였다.

    1999년의 4.19투쟁은 지하철 노동자의 고용을 지키기 위한 투쟁임과 동시에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대정부 투쟁이었다. 노동의 유연화를 제도화하려는 자본에 민주노총 지도부가 굴복하고, 노동자들의 심리적 저지선이었던 현대자동차노조의 정리해고 저지 투쟁이 패배로 끝나며 무너져버린 전선을 되살리기 위한 투쟁이었다. 개별 사업장의 투쟁이나 몇몇 사업장의 연대투쟁으로 세계를 휩쓰는 신자유주의를 등에 업는 자본을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지만 노동자의 저항을 보여줌으로써 공공부문의 구조조정을 한 발 뒤로 물러서게 하였다. 이렇게 지하철 노동자들은 1990년대 원하든 원치 않든 계급의 이해를 받아안는 투쟁을 전개했다.

    2000년대 들어 자본에 의한 분할로 노동자 계급이 양극화되고 그동안 노동운동의 주체였던 정규직 노동자는 계급대표성을 상실하고 있는 실정이다. 자본의 공세는 계급을 양분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강화해 단결을 가로막고, 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을 향한 이데올로기 공격을 강화함으로써 정규직 노동자는 점점 고립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에게 실리적 선택을 강요하였고 활동가들의 조합주의 강화로 귀결되었다. 지하철 노동자들의 실리적 경향 강화와 그에 조응하는 노조의 조합주의적 성격 강화도 이를 반영한 것이다.

    노동조합의 존립 이유를 다시 한 번 강조하는 의식적 활동만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할 것이다. 선진노동자는 “조합원 속에서 자본의 통제와 횡포에 맞서 일상적으로 투쟁하며, 조합원 위에 군림하지 않고, 조합원의 상태와 의식의 변화, 자본의 운동과 전략의 변화, 그리고 노동조합의 대응 방향을 일상적으로 조사 연구하고 대응방안을 모색하는 주체다. 노동자 내부의 차이를 극복하고 단결을 위해 투쟁하며 조합원의 개별 요구를 전체 요구로, 당면 과제를 중장기적 과제로 결합시켜낼 수 있는 주체이다.” 이러한 역량은 계급적 실천을 통해 확보된다. 그동안 서울지하철노조의 투쟁은 선진 노동자를 낳고 길러왔다. 3.16파업으로 ‘양심적인’ 노동자가 ‘의식적인’ 노동자로 거듭났고 전지협 파업으로 그 폭과 깊이가 확장되었다. 특히 전지협 파업은 지하철 노동자뿐 아니라 노학연대를 통해 학생을 계급적 노동자로 재탄생시키는 계기이기도 했다. 96-97노개투를 통해 노동자 전체의 이익을 위한 투쟁을 경험하며 시야가 넓어졌고 구조조정 저지투쟁 과정에서 자본과 노동의 대립의 본질을 인식하며 선진노동자가 성장했다.

    투쟁 속에서 형성된 선진노동자가 자신의 전망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는 체계적 교육을 진행하지 못한 것은 지하철노조가 반성할 지점이다. 98년 이후 노동강도·현장통제 강화와 고용 불안, 피로 누적 등으로 고통받는 조합원의 상태를 반영하여 선진노동자도 현장 기반 상실, 노사협조주의와의 대립, 조합주의 한계, 전망의 부재에 놓여있다. 어렵게 형성된 역량이 유실되거나 재생산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노동조합이 나서 노동의 전망을 고민하고 노동자에게 가해지는 경쟁의 원리를 연대의 원리로 대체할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서울지하철노동조합이 제시할 수 있는 계급적 전망을 담는 구체적 투쟁과제는 다양하게 모색되어야겠지만 대표적으로 노동법개정 투쟁, 공공성 강화를 위한 투쟁을 들 수 있다. 노동자의 단결과 의식적 성장을 위한 투쟁을 제약하는 법 제도적 장치들을 철폐하기 위한 투쟁이 다시 전개되어야 한다. 또한 서울지하철노조는 민영화와 구조조정을 막기 위한 투쟁뿐 아니라 공공부문을 확대하기 위한 투쟁, 자본이 주장하는 공익의 한계를 폭로하고 노동의 공익 가치를 확산하며, 이윤논리가 공공부문으로 침투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동시에 공공부문 구체적으로는 지하철 안전, 평등 수혜에 대한 노동자적 통제체제 수립을 위해 투쟁해야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계급적 주체성을 확고히 해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공기업 노사관계의 특성상 서울지하철노조도 시장의 성향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데, 시 정책에 좌지우지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주체의 계급성과 조직력을 확고히 하는 데 노동조합의 역량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 민주성의 측면

    서울지하철노조는 대중조직 체계 존중 기풍과 규약과 규정에 기반한 민주적 절차를 실현하는 조직운영을 해왔다. 한때 노사협조주의 집행부는 규약을 위반한 집행으로 문제를 야기했지만 민주노조 재건으로 다시 조직운영의 민주적 원리를 회복했다.

    노동조합의 민주성을 지키는 일은 조합원들의 신뢰를 확보하는 일이며 연대성을 발휘하기 위한 기반이기도 하다. 비민주적인 집행부에 대항한 민주 활동가들의 문제제기와 충돌이 조합원들에게는 노조에 대한 무관심을 확산시켰고, 내부 민주주의 문제에 집중하면서 다른 사업장 투쟁,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는 투쟁에 결합할 여력도 없었다. 연대활동의 제약은 조합원뿐 아니라 활동가들의 시야도 좁아지게 만들었다. 민주노조 재건으로 조합운영의 민주성이 회복됨과 동시에 연대활동의 깊이와 폭도 넓어져야할 것이다.

    민주성 관련 경계해야 할 것은 새로운 세대를 유입하지 못하고 대중의 활력에 근거하지 못한 채 형식적 민주 요소만 강조하거나 반면 맹목적 직접민주주의를 따르는 오류다. 지하철노조같이 대기업 노조의 경우 대규모 조합원 통솔을 위해 위원장의 권위가 매우 높은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는데 이 잘 짜여진 구조를 토론문화 활성화에 활용한다면 군대 같은 하향식 사업, 조합원 소외와 수동화 문제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조합원들의 무관심과 수동성은 자본이 만든 개인주의, 경쟁주의의 산물이지만 한편으로는 노동운동 지도부와 활동가에 대한 실망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조합원의 의사를 묻지 않거나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는 결정, 현장에서 벌어지는 관리자의 지배 개입을 노동자 개인에게 맡기는 현장 간부의 모습, 조합원을 사업의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만드는 조합활동 등은 노조와 조합원간의 벽을 더욱 두껍게 만든다.

    노동자의 삶과 노동조건을 스스로 결정해 나간다는 자주성, 경쟁이 아닌 평등 공동체 원리,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대중적 의사결정 원리를 실현할 것이 요구된다.

    • 연대성의 측면

    서울지하철 노동자는 연대투쟁에 앞장서 왔다. 서울지역에서 벌어진 투쟁사업장이 있으면 달려갔고 노래패로 풍물패로 연대하는 동지들도 있었다. 맥스테크 노동자 투쟁에 연대하면서 서노협 건설을 주도했고 사수대가 되어 전노협 창립대회를 보위하기도 했다. 모토로라 투쟁에 참여해 부상당한 조합원도 있었고 청구성심병원노조 투쟁에 연대해 용역깡패에 맞서 싸우다가 머리가 터진 조합원도 있었다. 동종업종 노동자들의 연대조직인 전지협 건설과 투쟁, 공공부문 단결은 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에 철도노조 민주화에 적극 결합하였고 궤도 노동자 단결을 위한 모임에는 열일 제쳐놓고 함께하며 중심에 섰다.

    왜 그래야 하냐는 물음을 던지지 않고 같은 노동자니까 당연히 연대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있었다.

    반면 노사협조주의 집행부는 “해준 게 뭐냐”며 상급단체 의무금을 내지 않던 때도 있었고 심지어 민주노조의 전국 조직인 민주노총 탈퇴를 시도하기도 했다. 물론 서울지하철 노동자는 민주노조를 지켜냈지만 적지 않은 기간의 경험은 조합원들의 연대의식을 약화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

    회복해야 할 연대의식을 주체 측면에서 보면 2000년대 이후 요구되는 연대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다. 정규직 비정규직 분할 통제로 자본은 노동자의 저항력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을 거두고 있다. 또한 노동강도 강화 현장 통제로 노동자가 사태의 본질조차 인식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을 자신 고용의 안전판으로 여기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차별이 정규직 때문이며 청년실업이 고령노동자 때문이라는 자본이 설정하고 퍼뜨린 ‘음모론’에 사로잡혀 있다. 이를 방치한다면 결국 정규직 노동자에게 부메랑이 될 것이다. 노동조건 확보를 위한 정규직 노동자의 파업을 가로막는 것이 악법이 아니라 자본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포획당한 비정규직 노동자일 수 있다.

    내용 측면에서 보면 87년 이후 정당한 분배 투쟁이 중심이 되었지만 이제는 이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한때는 분배투쟁이 자본과의 접점이 되면서 정의 실현을 위한 것이라는 지지를 받았지만 이는 한계에 봉착했다. 임금투쟁만으로 노동자의 삶이 나아지는 게 없으며 사회적 이슈에 연대해 이를 확보함으로써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예를 들어 반값 등록금, 대중교통 지원, 연금, 안전 문제 등을 확보한다면 임금인상투쟁과는 비교되지 않는 성과이다. 자본이 개인의 과제로 떠넘기려 했던 문제들이 노동자의 문제임을, 연대를 통해 해결해야할 문제임을 인식하고 실천해야할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안 또한 다양하게 고안되어야 하며 노동조합운동을 넘어서는 정치운동과 노동자 정치세력화 실천을 다시 조직해야할 것이다.

    연대성과 관련 경계해야할 것 중 하나는 대공장 중심주의다. 뭐든 우리 힘만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연대의 장애물이다. 서울지하철노조 투쟁은 많은 노조의 연대와 노학연대를 통해 엄호되었고 일상활동은 문화활동가들의 결합을 통해 풍부해졌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30년 역사 속 승리의 경험이 기억되기를 바라며

    수개월간 노조30년사 관련 자료를 보고 인터뷰를 하면서 “30년 전, 노동조합이 없는 삶, ‘기능동물’로서 노동했던 경험한 선배들과 그렇지 않은 후배들이 노동조합에 대해 가지는 감정이 다르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차이를 좁히기 위한 노력이 30년사를 같이 이야기하는 데서 시작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되었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경험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한 집단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결속력을 다지는 데 필수 요소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유하고 기억할 경험이 패배적인 것보다는 승리적인 것이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노동자들의 투쟁을 개별적으로 본다면 승리를 거둔 적이 거의 없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 전진해왔으며 승리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서울지하철노조의 30년 역사도 그 과정에 있는 것이다.

    필자소개
    노동자역사 '한내'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