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이 되면서
    가장 바빴던 인물 여운형
    [여운형 70주기⑤] 좌우통합의 꿈
        2017년 08월 29일 01:4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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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운형 70주기④]공산당과 조선중앙일보·건국동맹

    해방이 되던 날 가장 바쁘게 움직인 사람은 여운형이었다. 일왕이 라디오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것은 15일 정오였다. 하지만 항복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여운형은 새벽에 일어나 안재홍을 찾아갔다. 비밀리에 준비하고 있던 건국동맹을 전면적으로 개편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안재홍의 흔쾌한 대답을 듣고 나서 아침도 거른 채 필동에 위치한 정무총감 관저를 방문했다. 일왕의 항복선언이 있기도 전에 여운형은 행정과 치안권을 그 자리에서 건국동맹의 이름으로 인수했다.

    치안권을 확보하자 여운형은 건국동맹 사람들을 이끌고 서대문형무소로 향했다. 감옥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석방시키기 위해서였다. 감옥 문을 나서는 조봉암을 여운형은 격하게 포옹했고 사람들은 만세를 외치며 환호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곧바로 국내독립운동의 지도자인 송진우를 찾아갔지만 송진우는 건국동맹의 확대 개편에 단호하게 반대했다. 송진우는 건국동맹이 아니라 (중경)임시정부가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가장 깊숙이 개입했던 여운형은 이른바 ‘임시정부 봉대론’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독립운동 역할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요컨대 “(중경)임시정부는 여러 (임시)정부들 중에 하나이고, (상해)임시정부 (와해)이후 지도적 역할을 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는 것이 여운형의 입장이었다. 둘 사이의 설전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만들었다.

    건국준비위원회 발족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여운형

    통일전선, 건국준비위원회의 탄생

    건국동맹을 준(準) 정부의 위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이라는 명칭을 제안한 것은 안재홍이었다. 안재홍이 반나절 만에 작성한 건준의 짧은 강령의 핵심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략)

    그러므로 본준비위원회는 우리 민족을 진정한 민주주의적 정권에로 재조직하기 위한 새 국가건설의 준비기관인 동시에 모든 진보적 민주주의적 제세력을 집결하기 위하여 각층각계에 완전히 해방된 통일전선이요, 결코 혼잡된 협동기관은 아니다. 왜 그런고 하면 여기에는 모든 반민주적 반동세력에대한 대중적 투쟁이 요청되는 까닭이다.

    (중략)

    이 정권은 전국적 인민대표회의에서 선출된 인민위원으로서 구성될 것이며 그동안 해외에서 조선해방운동에 투신하여온 혁명전사와 그 결집체에 대하여서는 적당한 방법에 의하여 전심적(全心的)으로 맞이하여야 할 것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조선 전민족의 총의를 대표하며 이익을 보호할 만한 완전한 새 정권이 나와야 하며 이러한 새 정권이 확립되기까지의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본위원회는 조선의 치안을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의 완전한 독립국가조직을 실현하기 위하여 새 정권을 수립하는 한 개의 잠정적 임무를 다하려는 의도에서 아래와 같은 강령을 내세운다.

    우선 진보적 민주주의와 통일전선을 분명히 함으로서 사회주의세력의 참여를 열고 놓고 있다. 정권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총선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자발적으로 구성된 인민대표회의가 정권의 최고의사결정기구라고 명시하고 있다. 해외의 혁명전사와 결집체(독립운동단체)에게는 인민위원을 할당하겠다는 방식이다. 정권을 자임하고 있지만 동시에 완전한 독립을 위한 준비기구임을 분명히 한 것이 안재홍이 작성한 건준 강령의 특징이다.

    무엇보다 이 강령에는 임시정부에 대한 어떤 표현도 들어있지 않았다. 임시정부가 건준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는 혁명전사(개인)이거나 하나의 결집체(독립운동단체)로 대표를 할당받아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20년 겨울, 여운형과 박헌영의 운명적인 첫 번째 조우가 상해에서 시작됐다. 상해임시정부의 이승만과 주류파의 독주에 반대해 결별한 여운형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책임자인 보이틴스키가 후원하는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상해지부에 가담했다. 사회주의연구소라는 간판을 단 그곳에서 보이틴스키의 통역 겸 보좌관 역할을 하던 김만겸이 청년 지도자로 지원하던 박헌영과 함께 상근하며 활동했다. 불과 8개월이었지만 두 사람은 영어라는 공통 관심사로 단기간에 친분을 나누었다. 25년 만의 두 번째 해후는 아이러니하게도 또 다시 노선이 일치한 것이 이유였다.

    8월 18일 광주에서 상경한 박헌영은 몇 사람과의 짧은 면담을 제외하고 숙소에서 두문불출했다. 그 사이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등 정무수석의 역할을 한 것은 김삼룡이었다. 이틀 후, 박헌영은 이른바 ‘8월 테제’를 발표했다. 테제를 요약하면 “현 단계 우리의 임무는 통일전선을 구축해 인민민주주의로 나가야 하며, 사회주의로의 전진은 이후의 과제”라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현재의 과제가 완전한 독립을 위해 좌우가 통일전선을 구축해야하며 (진보)인민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동일한 정세판단을 가지고 있었다. 차이라면 여운형에게는 다음 단계가 없었지만 박헌영에게는 사회주의라는 다음 단계가 최종심급이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좌우통합이라는 이상향의 꿈

    8월 15일 건설된 장안파 공산당을 열흘 만에 와해시키고 조선공산당 재건위를 출범시킨 박헌영은 건준에 조직적으로 참여할 것을 지시했다. 건준은 출범한 지 20일 만에 전국에 100여개가 넘는 지부가 건설되었고, 여운형의 요청에 의해 북쪽의 독립운동 지도자인 조만식이 참여를 통보하자 기하급수적으로 조직이 늘어났다.

    해방 이후 20일 동안 가장 바쁜 사람은 여운형이었다. 그것은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했다. 건준은 전위조직에 가까운 건국동맹이 단기간에 전환된 조직이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전국적인 기반이 부재한 상층조직이었다. 약점을 해소할 유일한 대안인 여운형은 ‘중앙정치’에 시간을 허비하느라 전국적인 기반을 구축하지 못했다. 몇 달이 아니라 한 달도 되지 않는 사이 거대해진 건준을 아래로부터 장악한 것은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위였다.

    국내를 대표하는 민족주의자인 송진우와 김성수는 ‘임시정부 봉대론’을 주장하며 건준을 공격했고, 여운형의 가장 큰 버팀목인 안재홍은 박헌영 세력과의 결별을 요구했다. 안재홍이 건준을 탈퇴하자 무게 추는 급격하게 한쪽으로 기울었다. 9월 4일, 건준 전국대표회의에서는 안재홍을 대신해 사회주의자들에게 우호적인 허헌이 부위원장에 선출됐다.

    150여개에 달하는 지부의 2/3는 재건위가 이미 장악하고 있었고, 민주적인 절차는 평회원인 박헌영에 의해 좌우되면서 여운형은 사실상 명예위원장으로 전락했다. 건준이 탄생한 지 불과 20여일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틀 후 개최된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여운형은 완전히 실각했다. 박헌영의 재건위가 제출한 “건준의 발전적 해소와 조선인민공화국을 임시로 조직하자는 법안”이 압도적으로 통과되었다. 대회는 폐막에 앞서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이 수립되었음을 공개적으로 선포했다. 여운형의 꿈은 위기에 몰렸지만 불과 얼마 후 박헌영도 고립되었다. 국내로 진주한 미군은 “인공을 즉시 해산할 것과 군정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해방 다음날 국내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을 대표하던 원세훈과 미주 독립운동의 국내 대표인물인 조병옥이 회동하여 고려민주당의 창당을 선언했다. 며칠 후 김병로를 중심으로 조선민족당이 창당됐다. 국내상해파의 리더였던 장덕수는 곧바로 윤보선과 한국국민당을 창당했다. 불과 보름 만에 진행된 창당 러시는 주도권을 잡기 위한 색채가 강했다.

    기획력 하나는 탁월했던 장덕수는 당을 만든 다음날 각 당의 지도자들을 방문해, 어느 당에도 가담하지 않고 있는 송진우를 대표로 민족주의 통합정당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한국국민당이 창당된 것이 9월 2일이었고, 통합정당인 한국민주당이 탄생한 것은 6일 후인 9월 8일이었다. 임시정부 봉대론자였던 송진우는 창당에 부정적이었지만 임시정부가 귀국할 때까지 준비기관이 필요하다는 장덕수의 주장에 동의해 참여하면서 한민당은 민족주의 대표정당으로 급부상했다. 한민당은 대표를 맡은 송진우와 조병옥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조선인민공화국 타도”를 강령의 전면에 내세웠다.

    미군이 진주한 것은 한민당 창당 다음날인 9월 9일이었다. 미군이 진주하자 한민당은 대표단을 파견해 “인공은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이라는 것과 “일제에 부역한 자들이 다수 참여한 조직”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그 근거로 든 것은 인공을 장악한 것은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며, 여운형의 가족이 그를 대신해 전향서에 도장을 찍은 것을 예로 들었다. 한민당의 주류들은 박헌영을 위협세력으로 보지 않았다. 미군을 통해 여운형을 고립시키고 제거하기 위해 공산당의 위협을 연관시킨 것이다.

    한민당의 주장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미군정의 책임자 하지는 여운형과의 면담에서 “일제와 어떤 관계인지, 얼마의 자금을 지원받았는지”를 집요하게 캐물었다. 여운형에게 더 이상 아군은 남아있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한민당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미군정은 인공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이미 맥아더에 의해 인공을 불법조직으로 규정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미군정은 인공만이 아니라 임시정부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통보하자 한민당의 주류는 내홍에 빠졌다.

    1945년 10월 20일 미군정의 기획 하에 이승만이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다. 보름 후 임시정부의 지도부들이 귀국했다. 임정봉대론이 확산될 것을 우려한 여운형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이승만에게 인공의 주석직을 제안했지만 이승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불인정한다고 선언하자 한민당은 김성수를 중심으로 한 봉대론파와 독자세력파, 그리고 이승만과 제휴를 주장하는 세력으로 분열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한민당을 활용해 국내기반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고립된 여운형에게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있던 김원봉과 김성숙이 함께 할 의사를 보이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여운형은 독자적으로 당을 창당한 후 좌우통합을 추진하기로 결심했다.

    조선인민당 강령을 담은 소책자. 좌우합작의 의미로 태극을 넣었다

    조선인민당의 창당과 미소공동위원회

    1945년 11월 12일, 김원봉과 김성숙이라는 거물들을 영입한 여운형은 건준을 모체로 조선인민당을 창당했다. 여운형의 창당 연설에는 그가 꿈꾸는 좌우합작 노선이 명징하게 나타나 있다.

    “해방된 오늘, 지주와 자본가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 손을 들어보시오. 지식인, 사무원, 소시민만으로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역시 손을 들어 보시오. 농민, 노동자들 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우기는 사람 있으면 어디 한번 손을 들어보시오. 손을 드는 사람이 없군요. 그렇습니다. 일제 통치기간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반역적 죄악을 저지른 극소수 친일파들을 제외하고 우리는 다같이 손을 잡고 건국사업에 매진해야 됩니다.”

    여운형은 곧바로 각 정치세력이 연합해 ‘건국회의’를 결성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임시)정부의 수립을 추진하자고 임시정부에 제안했다. 임시정부는 여운형의 제안에 회답하지 않은 채 임시정부를 기반으로 하는 ‘비상정치회의’를 소집해 과도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안했다.

    기자회견 형식으로 진행된 김구의 제안은 소집에 참여할 대상도 분명하게 명시하지 않은 발표형식이었다. 사실상 임시정부 봉대운동을 계속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승만이 미군정과 채널을 계속 가동하는 동안 임시정부와 여운형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고, 박헌영은 조선인민당에 참여하고 있는 좌파세력을 이탈시키기 위한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사이 좌우 모두를 혼란으로 몰아 넣는 회동이 진행됐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소련대표들과 인사하는 여운형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과 소련, 영국의 3상회의는 한국정부 수립을 지원하기 위해 미소 대표자회의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1946년 1월 8일 조선인민당과 임시정부, 한민당, 조선공산당 등이 회동하여 모스크바3상회의가 한국의 자주독립을 보장할 것과 회의에서 언급된 신탁통치는 자주적으로 수립된 한국정부가 결정할 문제라는 내용에 합의했다. 하지만 최초의 좌우합의는 불과 며칠 만에 백지화되기 시작했다. 미군정은 한민당에게 공산당과의 회동과 합의에 대해 경고에 가까운 내용을 통보했고, 소련은 공산당에게 별도의 조치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며 거리를 둘 것을 요청했다.

    1946년 1월 16일 덕수궁에서 신탁통치를 전제로 임시정부 구성방안을 논의하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신탁통치가 기정사실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알려지자 조선인민당, 임시정부, 한민당은 충격에 휩싸였다. 여운형은 즉각 각 정당들에게 공동대응을 하기 위한 회동을 제안했다. 조선공산당의 박헌영과 남조선신민당의 백남운이 호응하면서 좌파들의 단일한 전선운동이 시작됐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의 꿈을 잠시 내려놓고 새로운 전선체건설에 참여했다. <계속>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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