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시작을 위해,
    하방연대의 정신을 복원하자!
    [789 대투쟁 30년] 민주노조 혁신의 키워드 "연대"
        2017년 08월 29일 12:1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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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등사회노동교육원의 단병호 이사장이 교육원의 소식지 <함께하는 품>에 쓴 1987년 789노동자대투쟁 30주년을 기리며 노동운동의 미래에 대한 생각을 쓴 글이다. 교육원의 동의를 얻어 레디앙에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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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는 87년 노동자 대투쟁 30주년이 되는 해다. 그때의 함성이 아직 귓가에 생생한데 어느새 세월은 강산이 세 번 바뀐다는 만큼이나 지났다. 그때 투쟁 현장에 있었던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현장을 떠났거나, 이제 남아 있는 노동자 대부분도 곧 노동현장을 떠나야 하는 머리끝이 희끗희끗한 나이든 노동자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당시 강보에 쌓여있던 어린아이는 어느새 엄마 아빠와 함께 광장으로 나와 촛불을 밝히며 세상을 바꾸기 위한 팔뚝질을 힘차게 할 만큼 의젓하고 당당한 청년 노동자로 자랐다. 이제 과거와 미래의 노동이 만나 다시 한 번 민주노조운동의 새로운 30년을 준비해야 할 때다.

    30년 전 노동자의 분노와 함성은 작렬하는 태양의 열기보다 더 뜨거웠다. 노태우의 6.29선언이 발표되고 김영삼·김대중이 이를 받아들이며 민주화를 향한 투쟁 전선은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달랐다. 노태우의 6.29선언 민주화조치 8개항 어디에도 산업현장의 민주화와 관련된 조치는 없었다.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7월 5일 울산 현대엔진(현대중공으로 합병)의 노조 설립을 시작으로 해서 전국적으로 투쟁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7~9월 노동자 대투쟁은 3,334건의 투쟁에 연인원 4백만 명의 노동자가 참여한 가운데 석 달 동안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런 투쟁을 통해 1200여개의 신규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은 한국 노동조합운동 역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첫째, 87년 7~9월 투쟁을 통해 광범위한 노동자들이 단결되고 의식과 조직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광범위한 대중이 스스로 투쟁에 나섬으로써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고 아울러 사회적 무력감이나 패배주의를 상당 부분 극복할 수 있었다.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이 땅에 노동자들은 비로써 사회와 역사발전의 주체로 우뚝 서게 되었다.

    둘째, 노동자의 지속적인 투쟁을 위한 자주적인 조직 건설이 주요 목표가 되었다. 7~9월 투쟁과정에 많은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기존 노동조합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주장도 세차게 일어났다. 그 결과 1200여개 신규 노동조합이 결성되게 되었고 또한 많은 기존 노동조합의 집행부가 물러앉거나 임원의 직선제 선출이 이뤄졌다. 이를 통해 민주노조운동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셋째, 노동자들의 투쟁이 종래의 투쟁에 비해 전면적이고, 대중적이고, 대규모적이며 조직적인 형태를 띠고 진행되었다. 대부분의 투쟁이 ‘선 파업, 후 협상’의 형태를 띠고 공세적으로 전개되었고, 장기적인 투쟁에서도 완강함을 보여줬다. 또 대부분이 지역적 연대 파업이나 현대그룹노조협의회의 경우처럼 노동자의 실질적인 연대가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반공주의나 노사협조주의와 같은 정부와 자본의 노동통제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도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타났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민주·자주·연대·투쟁·사회변혁으로 일컬어지는 민주노조운동의 정체성이 확립되기 시작했다.

    넷째, 중화학공업부분의 대규모 사업장 남성노동자가 노동자 투쟁의 선도 세력으로 등장함으로써 경공업 여성노동자 중심의 노조운동이 가지고 있던 한계를 단숨에 뛰어 넘을 수 있었다. 그래서 독점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총자본 투쟁전선과 대정부 투쟁의 교두보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다섯째, 노동자계급이 사회전면에 부상하면서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가를 깨닫는 정치적 각성이 빠르게 이뤄졌다. 투쟁기간에 보여주었던 일정한 사회 민주화의 요구(기초적이긴 했지만 노동3권의 보장, 노동악법 철폐, 구속노동자 석방 등의 정치적 요구)는 이후 노동법 개정 투쟁을 비롯해 정부를 상대로 하는 정치투쟁과 진보정당 결성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정신을 계승(하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미 오래 전부터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이는 현재 민주노조운동이 87년 대투쟁의 한계를 극복한 운동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어떤 면에서는 도리어 후퇴하였음을 반증하고 있다. 이런 우려에 심각성을 보태고 있는 것은 노조운동이 안고 있는 상황의 엄중함을 관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작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계속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대부분은 문제 해결의 답을 몰라서기보다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해관계에 강한 보수적·방어적 태도를 취하거나 책임과 실천에 따른 작은 수고로움을 회피하려는 이기심 등이 원인이 되고 있다. 현재 민주노조운동이 새로운 도약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도 똑같은 이치라고 생각한다.

    현재 민주노조운동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관한 진단은 그야말로 차고 넘칠 정도로 나와 있다. 이를 크게 묶어보면 대여섯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 십 수 년 동안 조직의 규모가 늘어나지 않은 채 정체 상태를 보이고 있고, 민주노조운동의 주체(청년·미조직·비정규 노동자) 재구성과 젊은 활동가 양성도 매우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 둘째, 민주·자주·연대·투쟁·사회변혁으로 대변되는 민주노조운동의 정체성이 상당부분 훼손되었다는 것 셋째, 실질적인 산별노조운동으로 나가지 못함으로 해서 노동자들의 의식이 여전히 기업(자본)종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넷째, 이념과 노선의 차이라는 명분을 앞세운 정파 활동이 필요 이상의 갈등을 조장해 노동조합운동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통합성까지 해체시키고 있다는 것 다섯째, 대중운동의 기본이 되어야 할 민주적 질서가 심각할 정도로 와해되어 있다는 것 여섯째, 노동자를 올곧게 대변해 줄 수 있는 제대로 된 진보정당을 정치적 파트너로 두지 못하고 있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노조운동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끊임없는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것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한 것처럼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노조운동을 둘러싼 모든 관계도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다. 변화를 주도하거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 도태의 과정을 밟게 되는 것이 냉엄한 진화의 법칙이다. 민주노조운동이 성장 · 발전하고 재도약하기 위해서는 이런 진화의 법칙에 충실해야 한다.

    민주노조운동이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에서 벗어나 하루아침에, 아주 짧은 단기간에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되길 바란다면 그것은 지나친 자만이고 과욕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지금의 민주노조운동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상당기간 동안 성장능력이 약화되어 성장판까지 축소되면서 나타난 현상이기 때문에 단기간에 온존하게 회복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현재 민주노총이 가지고 있는 발전계획안을 좀 더 충실하게 보완해서 그것을 조직 전체를 관통하는 기본방침으로 만들어 성장능력을 강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현재 민주노조운동의 발목을 잡고 있는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핵심 키워드는 ‘연대’가 되어야 한다. 단순한 수평적 연대가 아니라 철저한 ‘하방연대’가 되어야 한다. “높고 멀리 나는 새는/ 뼈 속까지 비우고/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 모든 것을 품는다.” 이것은 돌아가신 신영복 선생이 남긴 아주 짧은 ‘하방연대(下方連帶)’라는 시다.

    노동운동의 기본정신을 바로 세우는 것,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정신을 바르게 계승하는 것, 정체와 퇴보·위기의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것 등의 해답이 아주 짧은 이 한 편의 시 속에 모두 담겨 있다고 생각된다. 즉, 민주노조운동을 해야 하는 목적과 가야할 방향과 내용이 다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연대란 위에서 아래로,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사람이 어려운 사람에게 마음과 손을 내밀 수 있을 때 진정한 연대가 시작될 수 있다. 중소영세미조직 비정규노동자 · 이주노동자 · 여성노동자 · 장애노동자가 어떤 이유에서도 차별 받지 않고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운동의 주체로 우뚝 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결정지울 열쇄는 정규직노동자의 하방연대 의식과 실천의지에 달려있다고 봐야 한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정신을 계승하고 나아가 민주노조운동의 재도약을 희망한다면 관성적인 구호나 주장 그리고 의지가 실리지 않은 행동을 넘어서려는 결단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선배 노동자와 후배 노동자, 과거 노동과 미래 노동이 머리를 맏대고 함께 만들어야할 노동의 가치가 중심이 되는 사회의 그 시작을 연대를 복원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노동자(무엇보다 정규직 노동자)가 조금만 생각을 바꿔가지면 민주노조운동의 부활은 물론 노동이 아름다운 세상도 충분히 만들 수 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정신 계승을 통해!

    필자소개
    민주노총 전 위원장.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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