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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다
    [누리야 아빠랑 산에 가자23]아버지
        2017년 08월 20일 10:3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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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력 8월 20일, 아이의 할아버지 제사였다. 1938년 여름에 와서 1992년 가을에 떠났다. 만 54세. 한창 기운차게 살아갈 나이에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2년여 병원과 집을 오가다 숨을 거뒀다. 중풍에 심장병에 대장암까지 겹쳤다.

    병실에서 아버지가 당신의 고단했던 삶을 되돌아보며 아내, 그러니까 지금의 할매에게 했다는 얘기다. 하루의 노가다가 끝난 어느 날, 당신은 맥주 한 잔에 골뱅이가 무척 먹고 싶었단다. 날도 덥고 허기진 상태였단다. 귀가 길에 맥주 가게 문을 열었단다. 한데 차마 들어서지 못하고 뒤돌아섰단다. 올망졸망한 자식들의 얼굴이 떠올라서 도저히 들어설 수 없었단다.

    배관공으로 국내 건설 현장을 떠돌던 당신은 내가 국민학교 6학년이던 1976년에 중동으로 떠났다. 1984년까지 무려 8년을 버텼다. 웬만한 이들은 1, 2년도 힘들다며 중도에 포기하는 뜨거운 사막의 건설 현장이었다. 바레인과 사우디아라비아였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뜬 것은 사막에서 기력을 모두 소진한데다, 귀국 뒤에도 몸돌보지 않고 건설 노동에 매달린 때문이었다. 몸이 심각하게 안 좋다는 진단을 받고서도 쉬지 않고 일을 한 때문이었다.

    중동 사막의 건설 현장에서 동료들과 망중한을 즐기는 아버지, 맨 오른쪽 책을 들고 있는 이가 아버지다. 당신은 한국에서 막노동을 하며 피곤한 하루를 마치고 귀가해서도 책을 손에서 좀체 놓지 않았다.

    당신을 고향 예천의 선산에 모신 뒤였다. 삼우제 날, 유품 일부를 소각하려고 옷장을 열었다. 고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양복에 잠바에 바지와 남방셔츠 몇 벌이 전부였고, 죄다 낡고 추레했다.

    그렇게 사느라, 아버지는 가족과의 여행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내 추억엔 아버지를 포함하는 가족 여행이 전혀 없다. 가족이 함께 어딘가로 움직인 기억은 있다. 내가 다섯 살 때였다. 아버지는 아내와 삼형제를 데리고 면소재지로 나가서 가족사진을 찍었다. 아버지가 포함된 유일한 가족사진이 되었다.

    기억이 또 있다. 사진을 찍은 며칠 뒤에 가족은 아버지를 따라서 청량리행 중앙선 비둘기호 야간열차를 탔다. 서울로 상경한 거였다. 아버지와 엄마와 삼형제가 모두 어울려 가까운 한강이나 남산이라도 가족 나들이 한 번 못 간 것이 나에겐 한으로 남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깊어졌다. 아버지의 삶과 죽음이 너무 가련해서다. 그래서인지 모르겠다. 내 죽음이 딸의 삶에 깊은 한을 남기게 하지 않으려고, 딸아이와의 추억 만들기에 내가 그토록 기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버지와 함께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이다. 1970년 어느 날, 고향 예천의 면소재지 사진관에서

    할매와 아내는 제사 음식을 준비했다. 나는 밤을 깎았다. 생전의 할아버지 얼굴을 본 적이 없는 딸애도 일찍 하교해서 잔일을 거들었다. 동생네도 와서 일손을 보탰다. 제사엔 내 사촌 형님인 한현석 부부도 정종을 들고 함께했다. 자신의 막내 삼촌이 베푼 은혜를 잊지 않는 사촌은 한 차례도 제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삼양동의 사촌 명의로 된 집은 내 아버지가 절반을 보탠 것이었다. 물론 사촌도 자신의 몫을 했다. 사촌은 내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의 만만치 않은 병원비를 거의 책임지다시피 했다.

    아버지는 예천 대창고를 다니다 2학년 때에 돌연 학교를 그만뒀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에 아버지는 당시의 전말을 설명했다.

    당신의 둘째 형님 한순교, 즉 한현석 부친은 고향의 읍내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둘째 형님은 막내 동생에게 신문이 보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당신은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교과서와 책가방을 챙겨 읍내로 나가 팔았다. 그 돈으로 신문 몇 달 치를 구독하고서 학교를 때려치웠다. 둘째 형님은 신문 구독 기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숨을 거뒀다. 당신의 둘째 형님이 병원에서 운명한 것은 우리 집안 가족사에 강제로 새겨진 끔찍한 사건의 후유증이었다. 한국 현대사의 아픈 한 장면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계속 이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좌우 이념 갈등이 피에 피를 부르던 1949년이었다. 소백산 일대, 고향 예천도 낮밤이 수시로 바뀔 만큼 치열했다. 7남매의 막내였던 당신은 11살이었다. 4월 1일, 음력으론 3월 3일이었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삼월 삼짇날, 봄을 알리는 기분 좋은 명절이었다. 어스름에 저녁을 먹고 있었다.

    여느 날처럼 당신의 아버지 한재혁과 당신의 둘째 형님 순교는 사랑채에서 먹었고, 나머지는 안방이었다. 마당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가 안방 가족들의 귀에 들렸다. 안방 가족들은 누군가 볼일이 있어 찾아온 것이라 생각하고 그러려니 했다. 그랬는데 잠시 뒤 마당에서 처참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다들 놀라 밖으로 뛰쳐나가니, 당신의 아버지와 둘째 형님이 피투성이로 마당에 뒹굴고 있었다. 죽창에 찔린 아버지는 그 길로 불귀객이 되고 말았다. 옆에서 말렸다는 둘째 형님도 죽창에 찔려 치명상을 입었다. 둘째 형님은 다행히 치료를 받고 회복돼서 결혼도 하고 서울에서 취직도 했다. 하지만 후유증이 발생했다. 둘째 형님은 젊은 아내와 어린 자식 넷을 남겨두고 운명했다.

    내 할아버지를 죽창으로 찔러 죽인 이는 좌익에 휩쓸린 윗마을 두 청년이었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장남이 경찰이란 이유였다. 나의 첫째 백부는 당시 봉화에서 경찰이었다. 윗마을 청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불투명했다. 집안 어른들마다 얘기가 달랐다. 붙잡혀 죽은 것 같다고도 했고, 북으로 넘어간 것 같다고도 했다.

    아버지가 학교를 그만둔 것에는 배경이 하나 더 있었다고 했다. 훗날의 내 할머니 김계남, 당신의 어머니가 농사지으며 똥지게 짊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단다. 당신의 아버지는 세상에 없었고, 둘째 형님은 입원해 있었고, 나머지 형님 넷은 각자 살길 찾아 떠나거나 입대해 있었다. 아버지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당신의 어머니 대신 똥지게를 짊어졌지만, 농사는 오후에만 하는 일이 아니었다. 겸사겸사 학교를 그만둔 것이라 했다. 그 후로 당신은 나와 동생들을 낳을 때까지 농사를 지었다.

    오늘 제사엔 막내 외삼촌도 정종을 사 들고 함께했다. 내가 ‘기창이 삼촌’이라 부르는 막내 외삼촌은 예전에 서울 우리 집에 머물며 대학 입시 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 딸애의 절친인 소정이 아빠였다. 분당의 둘째 외삼촌 이정갑도 함께했다. 딸애가 언니처럼 따르는 수정이 아빠였다. 서울 강동에 사는 셋째 외삼촌 이명춘도 종종 참석했는데, 오늘은 일정이 맞지 않았다. 내 죽마고우 이영호도 찾아왔다. 아버지가 병원 신세를 질 때면 항상 제 차로 모시곤 했다. 오늘은 정종이 4병이나 되었다. 제사 음식을 준비하던 할매가 말했다.

    “살아 있을 때 잘해야지, 죽은 다음에 잘하면 뭐해. 죽은 사람이 먹기는 뭘 먹기나 한다고.”

    말은 그렇게 해도 할매는 해마다 제사가 돌아오면, 불편한 무릎을 끌고 경동시장까지 가서 밤이고 고기고 가장 튼실하고 신선한 재료를 사 왔다. 당일엔 새벽부터 배추부침개에 녹두전에 제사음식을 도맡다시피 만들며 온종일 꼬박 정성을 쏟아부었다. 아버지는 살아생전 아내가 만든 배추부침개를 참 좋아했다. 내가 최고로 좋아하는 음식이기도 했다.

    할매의 배추전 솜씨는 다른 이들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내외가의 친인척들 모두 인정하는 바였다. 민주노총 전 위원장 단병호와 문성현, 심상정 등도 오래전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배추로도 전을 만드나 신기해하며 한 번 맛보더니 연신 젓가락을 대던 음식이었다. 예천, 영주, 문경 등 경상북도 내륙 지방에선 제사상에 배추부침개를 반드시 올려야 했다.

    상주인 내가 혼을 불렀고, 모두는 절을 올렸다.

    “손녀딸 건강하게 잘 크도록 해 주소.”

    할매는 남편의 영혼에게 빌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몫까지 보태 엄마랑 오래오래 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속으로 빌었다. 그러고선 용서를 구했다. 용서? 무덤 속 아버지가 용서한다 해도, 내 스스로는 죽는 순간까지 결단코 용서하지 못할…….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중동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휴가차 귀국해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같이 갈 데가 있다고 했다. 교복 입은 채로 따라나섰다. 명동에 위치한 금융사였다.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적금 업무 정도는 맡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그전까진 사촌 형님이 처리했다.

    명동에 도착해 중앙통로를 걷던 중이었다. 아버지 또래의 사람들은 양복을 번듯하게 입고 있었다. 얼굴엔 윤기가 있었다. 아니 전부 그렇진 않았을 텐데,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아버지는 후줄근한 작업복 잠바 차림이었다. 얼굴도 손도 거칠었다. 엄마가 깨끗하게 빤 옷이고 단정하게 씻은 몸이었어도, 다른 이들 모습에 비해 많이 초라했다. 내 머릿속에서 불쑥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도 양복 입는 사람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훗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였다. 나는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버지 삶이 가련했다. 그러면서 그날의 그 생각이 자꾸만 심장을 후벼 팠다. 아버지는 당신 몸 바스러지는 것 아랑곳없이 자식들 굶기지 않으려고, 대학 보내려고, 중동 사막까지 나가서 막노동으로 악전고투 했는데. 그것 때문에 손과 얼굴이 거칠어지고 양복도 안 입었는데. 자식이란 놈은 그런 아버지를 다른 이들과 비교하며 부끄러워했다니…….

    휴~. 나 같은 자식을 뒀던 아버지가 불쌍했다. 너무나 죄스러웠다. 그러나 이미 아버지는 이승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내가 죽는 순간까지 나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아무리 잠깐의 생각이었다 해도, 결단코 용서할 수 없는 짓이었다. 절을 올리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빌고 또 빌었다.

    필자소개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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