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찜통더위 속의 빗줄기
    [낭만파 농부] 막걸리·김치전 번개
        2017년 08월 18일 10: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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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 햇볕이 기분 좋게 내리쬐고 있다. 사흘 만인가, 나흘 만인가. 내리 사나흘 종일토록 비가 왔더랬다. 햇볕이 이리 반갑다니… 한 달 남짓 이어지던 찜통더위에 지구온난화를 심각히 성토하던 게 바로 한주 전인데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날씨만큼 사람을 변덕스럽게 하는 것도 드물 것이다. 하지만 요 몇 해 사이 날씨가 표변한 것 사실이다. 우리나라가 이미 아열대기후로 바뀌었다는 것은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지구생태계에 미칠 충격은 그만 두고라도 그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과 불편이 이만저만 아니다. 나만 해도 아침부터 섭씨 30도로 치솟는 무더위에 열흘 남짓 논에 나가볼 엄두도 못 냈던 것이다. 그러니 불볕더위를 식혀주는 한 줄기 빗발이 오죽 반가울까.

    그런데 요 며칠 내린 비는 좀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그게 한 주 전이었다면 반가운 마음에, 기다렸다는 듯이 논배미로 달려갔을 것이다. 땀에 젖으나 비에 젖으나 젖기는 매한가지니 시원한 빗줄기를 맞으며 일하는 게 차라리 나은 까닭이다. 실제로 이따금 비 내리는 틈을 타서 논두렁 풀베기를 마친 게 한주 전이다. 이제 가끔씩 논배미에 나가 작황을 살피고 논물을 보는 것 말고 수확기까지 바쁠 일은 없다. 그러니 더는 비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아니 벼이삭 팰 때가 되었으니 되레 햇볕이 필요한 국면이다. 내리 쏟아지는 비가 마냥 좋지만은 않은 까닭이다.

    광복절인 어제도 온종일 내가 내렸다. 해치워야 할 농사일도 없고, 특별한 약속도 없는데 비까지 내려주는 날! 집안에 틀어박혀 책을 보는 게 큰 즐거움이다. 서울 생활을 접고 시골살이를 준비하면서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갈까?’ 했을 때, 첫 번째로 꼽았던 것이 바로 ‘책을 되도록 많이 볼 수 있는 일’이었더랬다. 농사, 그 가운데서도 벼농사를 고른 가장 큰 이유도 사실 그것이다. 산새 소리, 풀벌레 소리, 요 며칠은 빗소리를 들으며 독서삼매경에 빠져들어 아득한 시공을 넘나든다.

    “카톡!”

    어느 순간 익숙한 신호음이 시공을 현실세계로 돌려놓는다. 오후 5시 가까운 시간, ‘동네 톡방’에 새 글이 떴다.

    ‘비도 오는데 부침개 부친 사람 있슈?’

    기다렸다는 듯이 댓글이 꼬리를 문다.

    ‘먹고 싶다. 부침개~ㅋㅋㅋ’

    ‘아! 막걸리!!’

    ‘동동주가 아니고요?’

    이집 저집 짖어대는 개 소리가 한밤의 정적을 깨듯, 순식간에 비 오는 한낮의 고요가 깨져버렸다. 하긴 ‘비 오는 날 부침개에 막걸리’라는데 여부가 있을 수 있겠나. 얘기가 일사천리로 진전되더니 급기야

    ‘형님, 어서 채비허시오~’

    ‘남호 샘, 이미 드셨죠?’

    ‘맹세코!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고만…’

    ‘독주삼매경이 아니고요? ㅋㅋ’

    ‘밀가루 사서 남호 샘 네로 갈까?’

    어~ 어~ 하고 있는 사이에

    ‘지금 소금바우 집으로 출발!’(소금바우는 우리동네 이름이다.)

    ‘하**마트에서 부침가루 구입!’

    ‘메뉴는 김치전! 내가 신김치 가져가니 후라이판이나 꺼내두슈~’

    얘기가 그렇게 됐다. 번갯불에 콩 볶듯이 이것저것 챙긴 한 무리가 조금 뒤 마당에 들어섰다.

    양파를 다듬고, 김치를 썰고, 부침가루로 반죽을 쑨다. 부추, 호박, 깻잎 따위 채소전은 너무 손이 많이 간다나? 아무튼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서 노릇노릇 구워진 부침개가 상위에 오르자 막걸리 첫 순배가 돌고, 이윽고 세상도 휙휙 돌아간다.

    준비해온 막걸리는 턱없이 모자라고. 청탁불문 고저불문, 집안에 모셔둔 술이란 술은 병뚜껑이 열린다. 비가 내리니 술병에 떨어질 별은 없지만 그래도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쯤 잠깐의 침묵을 틈타 누군가 “볼 일이 있다”며 일어선다. 별 수 없지. 끝장을 보자고 모인 자리도 아니고, 어느새 비도 그친 듯하니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다. ‘비 온다’는 핑계를 댈 날은 또 올 것이다. 설령 비가 오지 않더라도 다른 핑계를 대면 그만이고.

    설거지 거리를 산더미처럼 남기고 그 무리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야 아침 일찍 출근할 것도 아니고,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당장 해치우지 않아도 된다. 적당히 오른 취기를 굳이 죽일 필요까진 없으니까.

    사나흘 만에 내리쬐는 쨍한 햇볕 아래 널어 둔 빨래도 이젠 얼추 말랐겠지. 가을걷이 때까지는 더도 덜도 말고 이 만큼만 날이 좋아서 나락이 잘 여물어야 할 텐데. 태풍도 조금만, 생기더라도 지난번 ‘노루’처럼 옆으로 비켜갔으면. 가만, 내일 개학하는 작은 아이 학교기숙사에 데려다 줘야하고, 저녁에는 공동체지원센터 가서 장구 배우는 날이네. 오늘은 여기까지.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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