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태도, 이용석 생가를 다녀와서
    [상선약수] “비정규직 차별 철폐”외쳤던 32살의 청년
        2017년 08월 18일 10:1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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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고도 먼 길이었다. ‘이용석’이라는 사람이 태어나서 자란 곳, 상태도를 다녀왔다. 박정희가 총에 맞아 죽은 날과 똑 같은 날짜인 10월 26일, 그는 스스로 자기 몸에 불을 붙였다. 2003년 오후 4시 10분경 종묘에서였다. 그 날은 “비정규직 차별쳘폐·정규직화, 권리 보장 입법을 위한 전국비정규직노동자대회”가 열린 날이다. 32살의 젊은 청년은 “비정규직의 차별을 철폐하라”는 마지막 외침을 남겼다. 노동부 산하 근로복지공단에 근무하던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나마 KTX가 운행되어 2시간 30분 만에 목포에 도착했다. 배는 다음 날 아침 출발하는 딱 한편 밖에 없다. 하여 목포에서 하루를 자면서 아침 8시 배를 타야 한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이용석의 여동생 남편이 마중 나와 있었다. 올해는 신안군과 협의를 시도해 보기 위해 공무원 노조와 연락을 했었다. 정인숙 공무원노조 전남본부장과의 만남은 일정이 꼬여 취소되었고, 신안군 공무원노조 김대환 위원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작년에 노조 위원장을 시작해서 이용석이라는 분이 있다는 것도 몰랐고, 게다가 우리 신안군 출신이라는 점도 몰랐습니다. 죄송하고, 또 죄송합니다.”

    종묘에 이용석 표지판을 세워야

    처음 만난 김 위원장은 거듭 미안하다고 말했다. 공노총 산하라고 소개받을 땐 약간의 거리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그는 완전히 걷어내 버렸다. 1972년생인 이용석보다 한 살이 많다고 했고, 섬 출신인 그 역시 목포로 유학(?)을 나온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용석이 죽은 종묘공원에 작은 표지판이라도 설치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 땅이 서울시도 아니고, 국토부도 아닌 하필이면 가장 까다로운 문화재청 소유다. 종묘는 예전의 종묘가 아니다. 2000년대 초반까진 집회도 많이 했지만 지금은 공원이 되어 있고, 이제 유네스코에 등재된 문화유산이다.

    표지판 설치를 알아보고 있는 곽노충 공공운수노조 조직국장의 전언에 의하면 가능성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위원장은 공무원 조직을 통해 최선을 다해 알아보겠노라고 마음을 보탰다. 내년에는 상태도에 같이 들어가겠노라는 약속도 했다. 이용석 열사 추모사업회 집행위원장인 김태진 전 부산지하철노조 위원장과 우리는 섬 주민들의 고충을 덜어 낼 수 있는 방법도 같이 고민해 보자고 했다.

    정약전이 유배 중 죽은 흑산도를 거쳐 가며

    함께 섬에 들어갈 일행과는 목포연안 여객선터미널에서야 만날 수 있었다. 밤 11시에 자가용으로 출발한 그들은 우리가 자고 있는 이용석 매제의 아파트에 들어 올 수 없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아파트 현관문을 열어두고 잠을 잤으나 새벽 3시 너머 도착한 그들은 아파트 입구의 비번을 몰라 결국 터미널에 있는 평상에서 새우잠을 잤다고 했다.

    도시철도 이열우 동지 등 4명과 우리 2명, 총 여섯 명이 2박3일 동안 먹을 음식과 술, 부탁받은 물건 등 한보따리를 들고 남해퀸호를 탄 것은 8월 12일 토요일 아침 8시였다. 신분증이 없으면 탈 수 없는 고속 페리호는 비금도, 도초도, 흑산도를 거쳐 태도에 도착하고 가거도까지 간다. 배에는 여행객과 낚시꾼이 많다. 상, 중, 하로 나뉜 태도까지는 3시간 거리다.

    “요즘 세상에 고을 사또가 서울로 영전했다가 다시 그 고을로 들어가면 고을 백성들이 길을 막으며 거부한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귀양하는 사람이 다른 섬으로 옮겨 가려는데 본디 있던 곳의 사람들이 길을 막으며 더 있어 달라고 했다는 말은 우리 형님 말고는 들은 적이 없다.” 다산 정약용이 둘째 형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유배 중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들에게 쓴 편지를 읽는다. “원통한 죽음 앞에 나무나 돌멩이도 눈물을 흘릴 일이다.”라는 그의 절규가 들린다. 당시에 이 험한 외지인 흑산도까지 유배를 온 그는 도대체 무슨 심정이었을까? 이제 모텔까지 들어선 이 인근에서 가장 큰 섬을 보며 든 생각이다.

    상태도의 모습(이하 사진은 필자)

    이용석 동상이 서 있는 상태도

    상태도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사람들을 맞이하는 건 이용석의 동상이다. 죽은 지 10년 후인 2013년 6월 13일 당시 신안군수 박우량이 세웠다. 물론 주민들이 강력하게 요구해서 세웠다고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람 키보다 더 크게 동으로 만든 이용석이 안경을 쓴 채 바다 너머 저 먼 곳을 응시하고 서 있다. 낚시를 하러 오는 외지 사람들은 뜬금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민주노총에 수많은 열사들이 있지만 가족이 모두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생가가 보존되어 있고, 동상이 태어난 곳에 서 있는 경우는 이용석이 유일하다. 동상의 옆면에는 이용석을 그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담은 듯 안도현의 시 “꽃”중의 일부를 새겨 두었다.

    “그렇다. 꽃대는 꽃을 피우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자기 몸을 세차게 흔든다.
    사랑이여, 나는 왜 이렇게 아프지도 않는 것이냐
    몸속이 아픔이 다 말라버리고 나면
    내 그리움도 향기나지 않을 것 같아 두렵다”

    한때 100여 가구가 살았다는 상태도는 지금은 30여 가구만 살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최근 낚시로 유명(?)해지면서 젊은 사람들이 펜션 등을 운영할 정도로 사람들이 제법 찾고 있다. 깨끗해진 집들이 늘어나고, 수돗물 상태도 좋아졌다. 1년 내내 비워있고, 바로 밑에 사시는 작은 어머니가 관리해주는 생가엔 에어컨도 생겼다. 아마도 펜션을 짓기 위한 인부들이 왔을 때 숙소로 제공되면서 TV와 함께 설치된 듯도 하지만 묻지는 않았다.

    이용석 생가에 도착하면 할 일은 많지 않다. 방을 청소하고, 이불을 널어 말리고, 부엌살림을 다시 깨끗이 정리하고, 마당과 뒤뜰을 정돈하는 정도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이용석 동상을 닦는 일이다. 모두 이십여 평 정도 밖에 안 되는 생가는 모진 바람을 막기 위한 담장이 높다. 담장에 서면 선착장을 포함 바다가 한 눈에 보인다.

    이용석은 여기에서 자라다가 초등학교를 거쳐 목포로 유학을 떠났다. 부모는 자식들이 섬에서 자라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목포에서 200여 킬로나 떨어져 있는 상태도에서 태어난 이용석은 1998년 전남대학교 금속학과를 졸업했다.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이 났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것이다. 그리고 2000년에 근로복지공단 목포지사에 들어갔다.

    매년 이맘때면 사람들이 오는 것을 아는 동네 주민들이 하나씩 둘씩 인사도 할 겸 얼굴을 보러 오신다. 작은 어머니는 미역무침을 가져오고, 대영씨는 낚시로 잡은 광어와 부시리도 가져 온다. 낚싯배를 운영하는 철희씨는 농어를 가져와서 직접 회도 떠 준다. 모두 이용석과 친척들이다.

    2011년 이용석 가요제 모습 자료사진

    좌절된 새로운 민중가요 보급의 꿈

    이용석 추모사업회는 “가요제”를 7년 동안 진행했었다. 민중가요가 새롭게 만들어지지 않고 있고, 상업적인 가요제만 있는 상황에서 이를 타개하려는 새로운 시도였다. 과거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들을 집회에서 만나면 “아직도 그 노래를 부르냐?”며 놀라곤 한다. 여전히 우리에겐 김호철 등이 만든 파업가, 단결투쟁가, 철의 노동자가 18번이다. 모두 과거 투쟁의 현장 정서를 담았고, 그러기에 지금도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백골단’ ‘지랄탄’ 등 이미 사라진 시대의 유물이 녹아 있기도 하다. 새로운 상황에 맞는 민중가요는 가뭄에 콩 나오듯 할 뿐이다. 그 조차 몇 년째 힘에 부쳐 못하고 중단상태에 있다.

    생가 방문은 우리가 여전히 그를 기억하고 있음을 유가족과 동네 주민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또 우리 모두에게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마음속에 다시 새기는 일이다. 이용석 동상이 서 있는 주변은 폐차가 서 있고, 각종 쓰레기가 모여 있기도 하다. 철 수세미 등을 동원하여, 닦고 또 닦는다. 이용석의 안경과 눈이 녹을 벗기니 반짝반짝 빛이 난다. 멀리 바다를 넘어 어디를 보고 있는 것인지 시선의 끝을 모르겠다.

    다짐들을 똑똑히 기억합시다

    “동지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노라며 외쳤던 그 결의들이 허망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지쳐서는 안 됩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의 기세가 아무리 강성하고 그에 반해 우리의 힘이 아무리 미약해 보일지라도 우리 희망을 잃지 맙시다. 다시는 더 이상의 노동자 목숨을 제물로 바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투쟁하겠노라는 그 다짐들을 똑똑히 기억합시다.”

    2005년 소설가 이인휘가 쓴 이용석 평전 [날개달린 물고기]를 출판하면서 당시 열사사업회 양경규 회장이 쓴 글이다. 그 때 이용석에 이어 박일수, 류기혁, 김동윤 등 수많은 비정규 열사가 죽어간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지금도 이런 현실은 계속되고 있다. 이번 주 토요일인 8월 19일, 마사회 비정규직으로 살다 죽임을 당한 박경근, 이현준 열사의 장례가 오랜 투쟁 끝에 치러진다. 열사들이 돌아가신 지 82일, 16일이 지나서야 합의를 했다. 지금도 지치지 말고, 잊어선 안 되는 이유다.

    상태도에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작년에 이어 올해 두 번째 방문인 나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방문했으면 좋겠다. 열사 생가를 고쳐 더 많은 사람들이 오기 쉽게 하고, 열사 관련한 자료들도 있었으면 한다. 열사 동상 옆에 작은 함을 만들어 방명록도 사람들이 쓰기도 하고, 책도 넣어줬으면 좋겠다. 종묘에 표지판을 설치하고, 이용석 가요제도 다시 열었으면 더욱 좋겠다. 이번 방문을 끝내고 14일 상태도에서 나와야 했는데 기상악화로 결국 그 다음날에야 목포로 나올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어려워도, 조금 늦더라도 기억을 이어갈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시간이 있는 분들에게는 이인휘가 쓴 이용석 평전 [날개달린 물고기]의 일독을 권한다.

     

    필자소개
    이근원
    대학 입학과 동시에 전두환을 만나 인생이 바뀜. 원래는 학교 선생이 소망이었음. 학생운동 이후 용접공으로 안산 반월공단, 서울, 부천, 울산 등에서 노동운동을 함. 당운동으로는 민중당 및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을 경험함. 울산을 마지막으로 운동을 정리할 뻔 하다가 다행히 노동조합운동과 접목. 현재의 공공운수노조(준)의 전신 중의 하나인 전문노련 활동을 통해 공식적인 노동운동에 결합히게 됨. 민주노총 준비위 및 1999년 단병호 위원장 시절 조직실장, 국민승리 21 및 2002년 대통령 선거시 민주노동당 조직위원장 등을 거침. 드물게 노동운동과 당운동을 경험하는 행운을 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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