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역국, 엄마의 탄생
    [밥하는 노동의 기록] 출산 굴욕
        2017년 08월 17일 11:0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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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는 아니고 조금만 예전의 일을 이야기하려 한다.

    덥고 습한 날이었다. 남편의 오랜 친구는 그 날 아빠가 되었다. 매우 난산이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 역시 출산이 오늘 내일 하던 터라 무서워 못 가겠다고 했으나 남편은 뭐가 무섭냐며 나를 끌고 ‘축하해야 한다’며 그 집엘 찾아갔다.

    그날 아이를 낳은 애 엄마는 나와 동갑이었다. 꼬박 12시간 진통에 애가 나와서도 울지를 않아 앰뷸런스까지 불렀으니 산모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래도 내게 호흡을 잘 다스리라 한 마디를 했다. 나는 돌아오며 남편에게 “내가 오늘 애를 낳는다면 그건 다 이 험한 자리에 나를 끌고 온 네 탓”이라고 말했다.

    저녁은 친정에 가서 먹었다. 나는 밥 대신 어머니의 샌드위치를 두 조각 먹고 집에 돌아와 KBS에서 하는 교육 다큐멘터리를 기다렸다. 그 때는 KBS에서도 볼만한 다큐멘터리를 자주 할 때였다. 남편은 그래도 배가 고프다며 두부를 볶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내일 출근을 위해 구두를 닦았고 나는 양수가 터졌다.

    병원에 전화했더니 당장 오라고 했다. 남편이 어쩔 줄 모르며 차를 몰다 병원이 가까워오자 남편이 말했다.

    “너무 긴장했나봐. 화장실이 가고 싶어.”

    “그래, 난 애를 낳고 당신은 똥을 낳고. 잘 됐네.”

    남편은 화장실로 가고 나는 접수대로 갔다. 간호사가 접수 서류를 주며 혼자 오셨냐 물었다. 남편은 화장실에 갔다 대답했다. ‘그냥 나 혼자 오는 게 마음은 더 편했을 거에요…’

    병원에 도착한 지 2시간 40분 후, 나는 첫 아이를 낳았다. 그 2시간 40분 동안 그가 저지른 잘못이 몇 가지 더 있으나 이쯤에서 말을 접기로 한다. 왜냐면 나는 더 큰 잘못에 대해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첫 출산 과정은 너무나 모욕적이었다. 나는 내 출산의 조력자로 여의사를 선택했지만 그는 때마침 여름휴가를 갔고 대신 원장이 아이를 받았다. 나는 그 사실을 원장이 분만실에 들어왔을 때야 전달받았다.

    그는 초로의 남성이었는데 분만실에서의 일성은 간호사들에게 ‘에어컨 꺼라, 산모 얼어 죽을 일 있나!’였다. 내가 더워 틀어 달라한 에어컨이었고 나는 그 때도 더워 미칠 지경이었으나 무려 원장님께서 내가 얼어 죽는다 하시니 얼어 죽겠거니 했다.

    출산이 진행되는 와중에 그는 계속 ‘야, 산모가 제대로 힘을 못 주네. 너네 좀 잘 해라’며 나를 돌려 책망했다. 생전 처음 애를 낳는데 제대로가 어디 있나. 간호사는 계속 ‘변비 심할 때처럼 힘주면 돼요’ 했지만, 난 변비란 것을 모르는 몸의 소유자였다. 얼굴과 눈의 핏줄이 다 터져나가도록 힘을 주었지만 의사는 계속 간호사들을 닥달했고 간호사는 내게 힘이 입으로 다 빠져나간다며 소리를 내지 말고 힘을 주라 야단쳤다.

    이런 순간에까지 야단맞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싶었으나 일단 애는 낳고 봐야 하니까 어떻게든 시키는 대로 해보려고 애를 썼다. 이 병원 홈페이지 대문에는 자기네가 산모를 배려하는 병원이라 써 있던데 이런 게 그런 건가 하는 생각이 순간 스쳐 지나갔다.

    그 난리통에 아이가 나왔다. 간단한 처치 후 간호사는 아이를 안겨주고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을 찍은 후 젖 물리는 ‘시늉’을 하게 했다. 때마침 낳자마자 젖을 물리는 것이 모유 수유에 큰 도움이 된다는 말이 나올 때였다. 3초쯤 아이를 내 가슴에 안겨주고는 데려갔다. 나는 또 그러려니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도 시간을 충분히 들여야 하는 과정이었다.

    모욕의 최고점은 회음부 봉합이었다. 회음부를 봉합했던 당직의는 내 허벅지를 툭툭 치며 엄살이 심하다고 했다. 욕하고 싶었는데 지쳐서 말이 안 나왔다. 아침에 그 당직의의 이름이라도 알아보려 했는데 아이가 왔다. 그 이후엔 그를 단죄할 시간 따위는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것이 그냥 흘러가버렸다. 그런 모욕도 모성애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잠시 고민했으나 역시 그 고민을 이어나갈 시간 따위는 언감생심이었다.

    맘까페에 가면 출산 후기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출산굴욕 3종세트 얘긴데 ‘정말 굴욕이었지만 아이를 생각하며 참았다’는 말이 많았다. 전쟁터에서 더 비참하게 죽는다고 전쟁이 더 고귀해지는 것이 아니듯 출산 과정에서의 모욕을 참아낸다고 출산이 더 숭고해지지 않는다. 일단 아이가 건강하게 나오는 게 중요하니까, 애 낳는 건 원래가 힘든 일이니까, 너만 애 낳는 것도 아닌데, 그런 걸 다 참고 애를 낳으니까 엄마인거지. 모두 잘못된 말이다. 나는 애를 낳으러 갔지 모욕을 당하러 간 것이 아니다.

    오밤중에 애를 낳았으니 새벽 4시쯤 첫 국밥이 들어왔다. 먹고 싶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고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이 병원에서 출산하기로 한 이유는 밥이 맛있기로 소문났다는 딱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는데.

    눈 앞에서 식어가는 미역국을 보며 매우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무례했던 의료진에게, 지금 딱 내 옆에 없는 남편에게 책임을 따져 물어야 함이 당연하지만 사과 받긴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 억울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억울함이 계속될 것이지만 나는 침묵할 것이라는 슬픈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달라, 나는 주는 미역국을 꼬박꼬박 먹으며 모욕과 분노를 잊어갔다. 소문대로 밥이 맛있는 병원이었다. 사흘 후 인사도 예의 바르게 하고 퇴원했다. 그렇게 나는 이 공고한 모성애 신화의 부역자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다. 계속 부역자로 남아 살다 죽고 싶지 않아서 이제야 써둔다. 이 따위 것들을 견뎌야 엄마가 된다면 난 엄마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큰 아이의 열 세 번째 생일밥상. 잡채, 창란젓 무침, 부세구이, 미역국, 흰 밥.

    필자소개
    독자. 밥하면서 십대 아이 둘을 키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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