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통이 폭군을 낳고
    소통이 태평성세 만든다
    [고전읽기-3] 류보남의 <논어정의> ‘박시제중(博施濟衆)’장 풀이
        2017년 08월 17일 10:00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어질다[仁]’는 말은 ‘사랑한다[愛]’는 뜻으로 풀 수 있고, ‘성스럽다[聖]’는 말은 ‘통한다[通]’는 뜻으로 풀 수 있다. 모두 《설문(說文)》에 나오며, 이 글자들의 최초의 뜻이다.

    통한다는 말은 의심과 막힘이 없는 것이며, 험난함과 걸림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天地], 빛과 그림자[陰陽], 강함과 약함[柔剛] 등의 도리에 통한 뒤에야 하늘을 섬기고 땅을 살필 수 있는 것이며, 사람과 어짊과 올바름의 도리에 통한 뒤에야 이로써 자신을 이루고 남을 이뤄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이치와 올바름에 대해 밝게 깨닫지 못한 구석이 있어서, 내가 다른 사람의 가려짐을 바로잡아줄 수 없으면, 이것은 내가 의심과 막힘과 험난함과 걸림이 있어서 통하지 않는 바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다면, 이로써 자신을 다스리더라도 하는 일이 어긋나 맞지 않을 것이며, 남을 다스린다면 거스르고 어기는 일이 많을 것이다.

    하(夏)나라의 폭군 걸(桀), 상(商)나라의 폭군 주(紂), 흉악한 도둑인 도척 등은 세상의 악행이란 악행은 빠뜨리지 않고 다 저지른 자들이지만, 그들이 놓친 게 무엇인지 따져 들어가 보면, 결국은 통하지 않음이 극에 달했을 따름인 것이다.

    그래서 위와 아래가 소통하는 시대를 태평성세라고 하고, 위와 아래가 불통하는 시대를 꽉 막힌 비색(否塞)의 난세라고 한다. 태평성세란 소통하는 것이며, 이것이 다스려지는 세상의 모습이다. 꽉 막힌 난세란 불통하는 것이며, 이것이 어지러운 세상의 모습이다. 소통하느냐 불통하느냐에 천하의 다스려짐과 어지러워짐이 달려 있다.”

    (仁訓愛, 聖訓通。並見《說文》, 爲最初之誼。通之爲言, 無疑滯也, 無阻礙也。是故通乎天地陰陽柔剛之道, 而後可以事天察地; 通乎人仁義之道, 而後可以成己以成物。若我於理義有未能明曉, 我於人有未能格被, 是卽我之疑滯阻礙而有所不通矣。如此者, 以之自治則行事乖戾, 以之治人則多所拂逆。桀、紂、盗跖之行無惡不作, 然推究其失, 祇是不通已極耳。是故天地交爲泰, 天地不交爲否。泰者, 通也, 治象也。否者, 不通也, 亂象也。通與不通, 天下之治亂繫之。劉寶楠, 《論語正義》上, <雍也> 6-30에 대한 풀이. 중화서국본 249쪽. 원문은 《주역(周易)》의 태괘(泰卦)와 비괘(否卦)를 원용해 논지를 폈지만, 읽기에 편하도록 《주역》의 맥락을 생략하고 의역했음.)

    류보남의 <논의 정의>

    청나라 때의 학인 류보남(劉寶楠, 1791~1855)의 이 글은, 《논어》에서 자공이 “백성에게 널리 은혜를 베풀고 널리 대중을 구제하겠다”는 ‘박시제중(博施濟衆)’의 이상을 피력한 대목에 대한 풀이이다. 자공이, 이렇게 박시제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묻자, 공자는 “어찌 어진 데서 그치겠는가. 틀림없이 성인(聖人)일 것이다. 요임금, 순임금도 이 일을 근심으로 여기셨다!”고 했다. (子貢曰: “如有博施於民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子曰: “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 其猶病諸!” 《論語》<雍也> 6-30)

    유가에서 그렇게 칭송하는 성인(聖人)이란 도대체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류보남은 성인이 별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세상과 널리 통하는 사람’이라고 풀이한다. 류보남의 해석이 참신한 것은 ‘성스러움[聖]’을 ‘통함[通]’이라고 본 점에 있다. 사람이 덕을 쌓는 것도 세상의 이치와 통하는 일이고,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수 있는 성인 또한 다른 게 아니라 통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옛사람들조차 소통이 성인과 태평성세를 만들고, 불통이 폭군과 난세를 만든다고 생각했다.

    우리 사회가 요즈음 몇 년 사이 절실하게 깨달은 것 가운데 하나는 소통의 중요함이다. ‘수첩공주’의 불통이 큰 반면교사 구실을 해주었다. 구중궁궐 안에 갇혀 자기망상에 사로잡히면 어떤 통치자도 몽매한 혼군(昏君)이나 포학한 폭군으로 변하지 않기가 어렵다.

    아일랜드 더블린에 갔을 때, 사슴이 뛰노는 중앙공원의 울창한 숲 한 구석에 담장도 경비 경찰도 안 보이는 (심지어 허름해 보이는) 3층짜리 건물이 대통령궁이며, 3층에 있는 대통령 집무실 창문 왼쪽에 불이 켜져 있으면 누구든지 들어가 대통령을 접견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벽에 둘러싸이기 일쑤이던 우리나라의 철통경비 푸른 기와집과 비교되어) 신선하고 신산(辛酸)한 자괴감적 충격에 빠져 정치 후진국 신민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고통스럽게 확인했던 기억이 새롭다.

    문재인 대통령은 푸른 기와집에서 나와 광화문에서 소통의 정치를 펴겠다는 뜻을 밝혔다. 청와대 앞길도 개방했다. 앞으로는 집무실을 광화문으로 옮기는 등 구체적인 후속 조처를 취할 것이라고 한다. 최고 통치자는 세상 누구와도 소통해야 하는 게 의무이므로, 사실 이런 건 진작 그래야 마땅했다. 구중궁궐(九重宮闕) 같은 청와대 집무실 깊은 곳을 고집하면서 세상과 소통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왕조시대의 왕들조차 민심을 알기 위해 백성들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장으로 잠행을 떠나지 않았던가. 우리는 이 나라의 최고 통치자가 와이셔츠 바람으로 시민들과 함께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며 우리 살림살이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누는 게 낯선 일이 아니라 흔하고 일상적인 풍경이 되기를 고대한다.

    필자소개
    철학연구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