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운형, 망명객에서 조선으로
    [여운형 70주기④]공산당과 조선중앙일보·건국동맹
        2017년 08월 17일 09:4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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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조파. 상해임시정부의 규정과 내용을 재정비하자는 입장으로 기존의 주류들의 입장이었다. 인물난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에 내각의 총장(장관)과 차장(차관)을 교체하는 것도 수용한다는 입장이었다. 창조파. 임시정부를 해산하고 의정원과 내각의 구성을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해 정부를 건설하자는 입장이었다. 주로 연해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입장이기도 했다.

    1923년 여운형이 제안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어 개조파와 창조파 대표자 124명이 참석해 수십 차례의 논의를 진행했으나 입장 차이만을 재차 확인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의정원 의장을 맡고 있는 이동녕은 개조파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사실상 기존 임시정부의 사수파에 가까웠다. 명망가들이 대거 이탈해 공석이 생긴 이후 김구는 내무부장이라는 요직에 올랐다. 대회가 결렬되자 김구는 창조파뿐만 아니라 개조파도 즉각 해산하고 상해에서 추방한다고 통보했다. 응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에 따른 조치가 뒤따를 것이라는 엄포가 공개적으로 등장했다.

    그 어느 쪽도 아닌 입장을 가진 사람은 두 명이었다. 안창호는 개조파에 가까웠지만 개조파와 창조파의 합의에 전력을 기울인 ‘타협파’였다. 개조파의 핵심 인물들이 사실은 사수파라는 것을 확인하자 안창호는 창조파의 입장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흔히 개조파지만 사실은 창조파에 가깝다고 분류하기도 하는 여운형은 그 어느 쪽도 아닌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여운형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경향이 공존하는 현실을 외면한 채 상해임시정부가 급조된 것이 파탄의 원인이었고,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대립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최소강령’에 합의한 당(여당)이 존재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부가 구성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민족혁명당(여당)의 건설을 통한 임시정부의 수립이 여운형이 주장하는 노선이었다. 모스크바의 경험은 확신으로 바뀌어 있었다. 통일전선론에 입각한 당의 건설과 정부의 수립이 그의 노선이었다. 여운형은 개조파도, 창조파도, 타협파도 아니었다.

    조선공산당의 창당과 체포

    1925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 여운형에게 뜻밖의 인물이 찾아왔다. 여운형을 찾아온 조봉암은 국내에서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이 창당되었으며 자신이 전권부대표에 선임되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조봉암은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기 위해 모스크바로 가는 여권 등의 도움을 요청했다. 여운형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을 제안한 인물은 한때 상해에서 한인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상해지부인 사회주의연구소에 함께 활동했던 조동호였다. 조봉암은 조동호가 전권대표라는 사실을 알려주며 그가 곧 상해에 도착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1925년 4월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한 화요회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경성 한복판에서 비밀리에 당 대회와 당 중앙 구성을 짧은 시간에 결정하는 과정에서 당 강령을 선임될 중앙집행위원회에 위임한 것이 예기치 않은 결과를 낳고 말았다. 1차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김약수 등 북성회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강령 결정을 미뤘다. 북성회의 사보타주로 2차 중앙집행위원회는 반쪽자리로 전락했고, 북성회는 당에서 이탈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 강령을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해지자 전권대표인 조동호보다 먼저 부대표인 조봉암을 출발시켜 필요한 사전 준비를 지시한 것이다. 여름이 되어 조동호가 상해로 넘어왔지만 그에 손에는 당 강령이 없었다. 세 사람은 논의를 거듭한 끝에 부대표인 조봉암을 모스크바로 출발시키고 조동호는 상해에 남아 강령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결정했다. 여운형이 원한 것은 아니지만 조선공산당 탄생의 결정적인 포스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코민테른은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르쿠츠파의 후예들인 화요회가 주도한 조선공산당에 우호적이었지만 당 강령이 없는 국제당 지부를 승인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조봉암은 상해의 조동호에게 급보를 보냈다. 하지만 조동호에게 경성에서 강령은 날아오지 않았다. 그에게 날아온 소식은 북성회가 당을 이탈해 창당을 부정하는 행보를 시작하고 있다는 비관적인 내용이었다. 조동호는 여운형의 조언을 받아 강령을 대신할 장문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조동호마저 모스크바로 떠나보내고 여운형은 국내당이 탄생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긴 호흡의 여정과 준비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천하의 여운형이라도 생계문제는 해결해야 했다. 때마침 러시아가 상해에 타스통신 지국을 설립하자 기자로 취직하며 언론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빠져들었다. 생계문제는 일시적으로 해결했지만 임시정부의 재건은 요원해졌고 사람들은 상해를 떠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운형은 자신의 신념을 놓지 않았다. 평소 교류가 있었던 쑨원의 제안을 받아들여 국민당에 입당했다. 공산당과의 국공합작에 힘을 보태기로 한 것이다. 쑨원이 현대식 군사학교인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하고 한인들의 참여를 요청했다. 때마침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의열단의 김원봉의 입학을 주선해주었다. 후일 김원봉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연안파로 분류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쑨원이 갑작스럽게 죽고 황포군관학교의 교장인 장제스가 국민당의 권력을 장악하자 공산당과의 전면전을 선언했다. 먼 이국땅에서 여운형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타스통신 지국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문을 닫자 평소 운동을 즐겨 하던 여운형은 체육교사로 일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어느 철학자처럼 여운형은 젊은 날부터 죽기 직전까지 아침에 일어나면 반시간 가량 달리기를 한 후, 아령이나 철봉 같은 체력단련을 반시간 하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다. 한겨울에도 찬물로 샤워를 한 다음, 정성스럽게 수염을 다듬었다.

    4차례의 조선공산당 재건 사건이 있은 후 일제는 마지막 남은 뿌리를 뽑기 위해 광분해 있었다. 일제의 리스트 맨 위에 있는 인물은 세 명이었다. 조선공산당 창당의 기획자인 김찬, 전권부대표로 코민테른 승인을 받은 후 당 재건에 계속해서 이름이 오르내리는 조봉암이었다.

    위험인물 1순위인 여운형은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승인과 관련된 이력이 드러나면서 더 위험한 불령선인으로 분류되었다. 1929년 7월 19일 여운형은 학생들과 함께 야구장을 찾았다. 야구장은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에 해당하는 영국 조계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특별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일제는 사전에 약속된 영국 경찰을 대동하고 나타나 기습적으로 여운형을 체포했다.

    상해에서 체포되어 경성으로 이송되었지만 사람들이 서울역에 몰려들어 용산역에 내려 이동하는 모습

    이때는 일제의 외교전에 의해 영국 조계와 프랑스 조계에 이미 사복경찰들이 버젓이 드나들고 있었고, 심지어 조계 안에 비밀리에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을 정도였다. 영국 경찰은 여운형을 체포해 대동한 일경에게 조계 경계선에서 넘겨주는 방식으로 계획을 세웠지만 평소에도 장정 두세 명과는 너끈히 대적할 수 있는 여운형이 격렬히 저항하자 당황한 영국 경찰은 사태를 방관했다. 체포에 나선 것은 일경이었고 여운형은 그들과 육박전을 벌였다. 해방 후에도 오른쪽 귀가 잘 들리지 않은 것은 그때 고막이 터져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탓이었다.

    사건이 커지자 영국 경찰은 조용히 조계 밖에서 일경에게 넘겨주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영국 경찰은 조계 안의 사무소로 여운형을 데려가 형식상 문제의 인물을 밖으로 추방한다는 외교상의 절차를 밟으려고 했다. 하지만 소식을 접한 한인들이 몰려들자 영국 경찰은 그대로 일경에게 여운형을 인계해 버렸다.

    여운형을 잡아들인 일경은 사태가 심각해질 것을 우려해 군대 1개 소대를 연락선에 동승시켜 경성으로 이송했다. 상해에 체류하고 있던 독일 사회주의자들은 여운형의 소식을 접하자 베를린에 긴급전보를 보냈다. 독일 사회주의자들은 단체 명의로 영국노동당의 맥도날드 총리에게 서한을 보내 영국 경찰의 불법행위를 규탄하고 즉각 여운형 석방을 위한 외교교섭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평소 좌우를 넘나들며 활동하던 여운형의 광범위한 인맥을 보여주는 한 사례였다.

    1급 감시대상인데다 조선공산당 창당과 관련해 코민테른 밀사 두 사람을 접촉한 사실이 재건과정에서 일제에 알려지면서 여운형은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7개월간 계속된 예심으로 자타가 공인하던 체력이었지만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3년의 징역을 마치고 출감했을 때 그를 방문했던 동아일보의 송진우 사장은 몸무게가 20킬로 이상 줄어있는 그를 보고 “천하의 여운형이…”라며 대성통곡했다. 상해의 경험으로 망명을 통한 독립운동에 회의적이었던 여운형에게 국내에서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몸을 돌보며 몇 달간의 고민 끝에 타스통신 기자시절의 경험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조선중앙일보를 창간한 것이다.

    여운형 재판에 대한 동아일보 기사

    조선중앙일보의 창간과 건국동맹 결성

    1926년 이상협이 중외일보를 창간할 때 나이는 막 서른 무렵이었다. 게이오대학에서 상학을 공부한 이상협은 기자로서의 자질보다는 이재(경영)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들어간 그는 일제에 의해 26살의 나이로 발행인 자리에 올라 모두를 놀라게 할 정도였다. 친일파로 지탄을 받던 그가 2년 후 동아일보가 창간되자 매일신보를 사직하고 참여 의사를 밝혀 다시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동아일보 편집장을 지내던 이상협은 최남선과 안재홍의 주도로 창간된 시대일보가 재정난으로 파산 위기에 몰리자 이를 인수해 중외일보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이상협에게 그런 거금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이재에 밝은 능력을 발휘해 다양한 곳에서 자금을 끌어 모았다. 출처가 불분명한 자금이 섞여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매일신보 출신인 그의 이력 탓에 의구심도 적지 않았지만 몇 차례 필화사건으로 고초를 겪는 등 민족지로서의 역할을 해나갔다. 한 때 2만부를 발행할 정도였던 시대일보도 자금난으로 파산하던 시절이라 판매부수로만 재정을 감당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오늘날 신문이 재벌의 광고에 의해 통제되는 것처럼 이때의 광고도 일제의 감시망에 놓여 있었다. 거액의 자금줄이 없던 중외일보 역시 파산에 직면했다. 해외나 감옥을 제외하면 국내에 있는 독립운동가 중에 여운형만큼 명망을 가진 인물도 없었다. 중외일보를 인수해 새로운 신문을 만들겠다고 선언하자 다양한 인물과 자금들이 몰려들었다.

    스카이서브와 양면이질 배트로 세계 탁구를 장악한 중국 탁구에 맞선 펜 홀더의 한국 탁구는 ‘전진속공’으로 대항했다. 전진속공의 정체는 테이블에서 최대한 떨어지지 않는 것과 ‘빠른 호흡’이었다. 유명한 종편프로그램인 꽃보다 할배의 이순재의 별명인 ‘직진 순재’에 비유할 수 있었다. 여운형이야말로 독립운동에 있어서 ‘양면’이었고, 정세를 판단할 때 ‘빠른 호흡’을 가진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결단을 내리면 돌아보지 않는 ‘직진’이었다.

    조선중앙일보를 창간한 여운형은 알량한 재정에도 불구하고 기자들과 직원들이 안정적으로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셋방살이에서 벗어나 사옥을 신축했고, 독자들 손에 더 빠르게 신문을 전달하기 위해 인쇄기를 새로 구입하는 비용의 지출을 마다하지 않았다. 회사 전용 비행기를 구입한 것도 여운형다운 일이었다. 자신이 직접 탑승해 백두산을 탐방하고 기사를 쓸 정도였다.

    백두산의 여운형(오른쪽)

    잘 알려진 것처럼 젊은 날 여운형에게 영감을 준 사람은 안창호였고, 상해에서도 그의 정신적 스승은 안창호였다. 하지만 정치적 노선이 항상 일치한 것은 아니었다.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에 비판적인 의견을 보인 적도 없지만 적극적으로 옹호하지도 않았다. 조선중앙일보 창간 이후 여운형의 행보는 실력양성론에 가까웠다. 청년들에게 메시지를 주기 위해 월간 <중앙>과 <소년중앙>을 창간한 것이 대표적이다.

    조선중앙일보를 창간한 후 평소 스케일이 크지만 꼼꼼한 여운형의 잘 알려진 일화 하나가 있다. 충남 아산의 이순신 묘소가 우묵장성인 채로 버려져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묘소를 재정비한 것이다. 여운형 이전에 이순신 묘소 재정비를 한 사람은 동아일보의 송진우였다. 신문에서 모금 운동을 벌여 묘소를 재정비했다. 하지만 애초에 송진우가 세웠던 대대적인 재정비 계획은 일제의 훼방으로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조선중앙일보를 창간한 여운형은 일제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정비 사실을 신문에 적극 홍보하면서 국란극복의 영웅을 국민에게 재차 상기시키는 계기로 삼았다.

    운동이라면 모든 종목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만능 스포츠맨인 여운형이 조선체육회를 설립하고 회장을 맡은 것은 1935년이었다. 이듬해 열리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종목에 손기정이 대표로 선발되자 기금을 모아 훈련을 지원했다. 손기정이 우승하자 조선중앙일보는 시상식에 선 사진의 가슴 한 가운데 있던 일장기가 삭제된 기사를 1면에 내보냈다. 조선중앙일보의 윤전기는 인쇄속도가 빠른 대신에 인쇄 품질은 좋지 않은 중고기계였다. 일제는 삭제되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열흘 후, 뛰어난 성능을 가진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에서도 일장기가 삭제돼 신문이 발행되자 일제는 여운형을 연행하고 무기한 정간처분을 내렸다.

    신문이 폐간된 이후 여운형은 전국을 돌며 왕성한 강연활동에 전념했다. 그때부터 여운형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본을 방문했다. 조선의 대표적인 정치인이자 언론인의 모습으로 일본을 방문했지만 태평양전쟁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기 위한 행보였다. 몇 차례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온 여운형은 가까운 지인들에게 일제가 곧 패망할 것이며 이에 대응하는 준비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1942년 겨울, 여운형은 치안유지법과 소련의 밀정이라는 혐의로 체포됐다. 일제의 패망을 역설한 것이 알려진 것이다. 재판도 없는 구금과 잔인한 고문을 받은 끝에 7개월만에야 총독부 문을 업혀서 나올 수 있었다.

    요양을 빙자해 잠행을 했지만 여운형은 비밀리에 서신을 보내거나 인편을 통해 사람들과 연락망을 구축하는 것을 계속했다. 1944년 8월 10일, 종로구 운니동의 허름한 건물 2층에 모인 사람들은 이름만으로도 충격적인 ‘건국동맹’을 결성했다. 조직 결성을 주도한 것은 여운형과 22년 전 상해에서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상해지부의 다른 이름인 사회주의연구소에서 함께 활동했던 조동호였다. 건국동맹은 청년조직과 지역조직을 비밀리에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봄, 일제의 패망을 확신한 여운형은 더 대담하게 건국동맹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설립하기 위해 일본군의 병기책임자인 채병덕(한국전쟁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그 채병덕. 필자 주)과 접촉해 지원을 약속받았다.

    8월 초, 소련이 청진상륙작전을 개시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조선총독부는 여운형과 접촉을 시도했다. 8월 14일, 조선총독부 엔도 총감은 여운형과 면담하고 내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안전한 귀환을 도와달라고 읍소했다. 여운형은 모든 정치범을 즉각 석방할 것, 치안유지권을 인도할 것, 당분간 경성 사람들이 먹을 수 있을 식량의 확보를 지원할 것 등 5개항을 요구했다. 식량의 지원을 요구한 대목이 여운형만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는 ‘정치력’이었다. 여운형은 다음과 같이 새로운 공화국이 가야 할 길을 민중들에게 호소했다.

    “이제 우리 민족은 새 역사의 첫발을 내딛게 됐다. 우리는 지난날의 아프고 쓰라린 것들은 이 자리에서 잊어버리고 이 땅에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여야 한다.” (1945년 8월 16일 휘문고보 연설 중에서) <계속>

    [여운형 70주기③] ‘분파 갈등과 민족혁명당으로의 길’ 링크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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