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산서 외상 라면 먹다
    [누리야 아빠랑 산 가자-21]사발면
        2017년 08월 02일 11:1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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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은벽 능선을 오르고 있었다. 추석 전날이라 등산객이 뜸했다. 한적하고 좋았다. 백운산장을 거쳐 하산하기로 했다. 딸이 물었다.

    “아빠, 산장에 라면 팔아”

    판다고 하니까, 가서 먹자고 했다. 산에서 라면을 꼭 먹고 싶다 했다. 나는 풋 웃었다.

    “가시나, 컵라면 사 온다 할 때는 다이어트 한다고 싫다고 하더니.”

    “히~. 그럴 수도 있지 뭐.”

    산장에서 라면을 먹기로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현금이 없었다. 수중에 현금 든 날은 1년 365일에 두 손가락과 두 발가락 합친 것에도 미치지 못하는 처지였다.

    “누리야, 산장에서 카드는 안 받을 것 같은데. 아빠가 현금이 없어.”

    “괜찮아. 나한테 현금 7,000원 정도 있어.”

    열심히 올랐고 숨은벽 밑에 다다랐다. 잠시 쉬면서 숨은벽의 웅장하고 깎아지른 위용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러고 있는데 마른 체형의 중년 남성이 밧줄과 장비도 없이 숨은벽 중간까지 순식간에 올랐다. 나는 입을 떡 벌리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딸내미는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기겁을 했다.

    “아빠, 빨리 가자.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려.”

    깔딱고개를 앞두고서였다. 우리 앞에서 혼자 오르던 여성 등산객의 모자가 바람에 날아갔다. 놀란 여성이 모자를 잡는다고 휘청했다. 몸짓이 더 컸으면 사고 날 수 있는 위험한 순간이었다. 밑으로 굴러 떨어진 모자를 내가 찾아다가 돌려주었다. 여성 등산객과 거리가 멀어졌을 때, 딸아이에게 말했다.

    “아까 되게 위험한 상황이었어. 다행히 바위가 넓어서 괜찮았던 거야. 아빠 대학 동창 하나가 지리산에 갔다가 소에 빠져 죽었어. 계곡물 옆에서 등산화를 벗고 쉬었는데, 등산화가 굴러 물살에 쓸려 내려갔고, 친구는 다급하게 등산화를 잡는다고 하다가 소에 빠졌어. 안타깝게 심장마비로 죽은 거지. 누리야, 넌 절대 그러면 안 돼. 떠나는 물건만 보면 안 돼. 지형을 보고 상황을 판단해야 돼.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야. 재물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거기에만 집착하면 안 되는 거야. 그것들이 널 죽일 수도 있어. 그것들을 지키더라도, 상황을 분석하고 추이를 전망해야 돼. 아니다 싶으면 미련 없이 버려야 하고. 아빠 얘기 꼭 기억해. 알았지”

    “응, 아빠. 알았어. 모자가 날아가도 안 잡을게.”

    딸아이는 라면 생각에 씩씩하게 올랐고, 산장에 도착했다. 배낭을 이리저리 뒤적이던 딸아이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지갑을 가져오지 않았어.”

    딸애는 매우 상심한 표정이었다.

    “맛있겠다. …… 맛있겠다.”

    라면 먹는 사람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기다려 보라고 하고선 산장에 들어갔다.

    “저기, 혹시 카드는 안 되나요”

    “여기까지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카드는 안 됩니다.”

    낭패였다. 딸에게 얘기했더니 울상이 되었다.

    “여기에 있으면 눈물 날 거 같으니까, 아빠 빨리 내려가자.”

    실제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자리를 뜬다 해도 하산하다가 울 것만 같았다. 난감했다. 다시금 산장에 들어갔다.

    “고등학생인 딸아이하고 같이 산에 왔는데, 아이가 라면을 몹시 먹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카드만 가져오고 현금이 없습니다. 제가 매주 산에 다니는데, 일요일까지 꼭 갖다 드릴 테니 어떻게 안 될까요.”

    애절한 내 표정 때문인지 라면을 몹시 먹고 싶어 한다는 아이가 안쓰러워서인지, 산장 노부부의 아들인 듯한 이가 사발라면 1개를 익혀 줬다. 김치도 줬다.

    “고맙습니다.”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받아 나왔다. 양손에 라면과 김치를 들고 나가는 나를 보는 딸아이 얼굴이 맑은 해님이 되었다.

    “맛있다, 꿀맛이야! 이거 못 먹고 내려갔으면 나는 엉엉 울었을 거야. 히~.”

    행복하게 먹는 아이 모습이 내 가슴을 뜨겁게 데웠다. 집에서 가져온 부침개도 꺼내 먹였다.

    “아빠도 먹어 봐.”

    “아니 괜찮아. 배 안 고파니까 너나 잘 먹어.”

    아이가 저리 맛있게 먹는 걸, 손 댈 순 없는 거였다. 전 조각만 한 개 집어 먹었다.

    “아빠도 한 젓갈 먹어 보라니까. 진짜 맛있어.”

    딸은 두어 차례 더 권했고, 나는 마지못해 국물만 조금 먹는 시늉을 했다. 맛이 참 좋았다. 사실 출출한 상태였다. 그릇을 반납하면서 산장 아들에게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딸애도 따라 들어와 공손하게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우리는 하루재를 거쳐 우이동으로 하산했다. 딸아이 발걸음이 경쾌했다.

    필자소개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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