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바꾸는 독서,
    곧 세상을 바꾸는 독서
    [고전읽기] 허균의 《한정록》에서
        2017년 07월 29일 01:1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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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연구가인 이상수 선생의 고전읽기를 새롭게 시작한다. “스마트폰 할아버지의 시대가 되더라도 우리를 성숙시켜주는 것은 이런 (독서에 대한) 열정 말고 다른 길은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필자의 말처럼 고전에 대한 필자의 고전읽기에 대한 애정이 공유되기를 바란다. 많은 관심 부탁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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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책을 읽을 때는 마땅히 흰 눈빛이 비쳐드는 밝은 창문을 가물가물한 거울로 삼아야 하고, 제자백가의 책을 읽을 때는 마땅히 달빛을 벗 삼아 머나먼 곳의 정신에 붙여야 하며, 불경을 읽을 때는 마땅히 미인과 마주하여 공허함에 떨어지는 것을 막아야 하고, 《산해경》, 《수경》, 총서, 작은 역사 등을 읽을 때는 마땅히 성긴 꽃가지와 파리한 대나무와 차가운 돌과 시퍼런 이끼를 옆에 두고 경계 없는 여행을 받아들이거나 있는 듯 없는 듯 아득한 이야기들의 요점을 잡아내어야 하며, 충신 열사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마땅히 생황을 불고 거문고를 두드려 그 꽃다운 영령을 불러일으켜야 하고, 간신과 아첨꾼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칼을 뽑아 휘두르고 술을 들이켜 분노를 삭여야 하며, 소(騷)와 같은 시문을 읽을 때는 마땅히 텅 빈 산중에서 비통하게 울부짖듯 낭독하여 골짜기를 놀라게 해도 좋고, 부(賦)와 같은 산문을 읽을 때는 마땅히 흐르는 물을 따라가며 미친 듯이 부르짖어 회오리바람을 불러일으켜도 좋으며, 운문의 노래를 읽을 때는 마땅히 노래하는 소년으로 하여금 박자를 맞추도록 할 것이고, 귀신에 관한 잡다한 기록을 읽을 때는 마땅히 촛불을 밝혀 어두운 그림자를 깨뜨려야 한다. 다른 것들은 읽는 상황이 서로 다르고, 드러나는 운치 또한 한 가지가 아니다.” (허균, 《한정록》<서헌>)

    (讀史宜映雪以瑩玄鑑; 讀子宜伴月以寄遠神; 讀佛書宜對美人以挽墮空; 讀《山海經》、《水經》、叢書、小史, 宜着疎花、瘦竹、冷石、寒苔, 以收無垠之游, 而約縹緲之論; 讀忠烈傳宜吹笙鼓瑟以揚芳; 讀奸佞論宜擊釰捉酒以銷憤; 讀騷宜空山悲號可以驚壑; 讀賦宜縱水狂呼可以旋風; 讀詩詞宜歌童挼拍; 讀神鬼襍錄宜燒燭破幽。他則遇境旣殊, 標韻不一。 許筠, 《閒情錄》<書憲>)

    허균의 한정론 중 일부분

    허균(1569~1618)이 《한정록》에서 한 말이다. 옛사람들은 독서를 하면서도 피가 끓었던 모양이다. 나는 이 글이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허균의 질문으로 들린다. 당신은 은은한 설창(雪窓)에 역사책을 펴고, 교교한 달빛 아래 여러 사상가들의 주장에 귀 기울여본 적이 있는가? 산문과 운문을 읽으며 골짜기에서 울부짖고 강물을 따라가며 미친 듯이 부르짖어본 적이 있는가? 이렇게 뜨겁게 열정적으로 글을 읽어본 적이 있는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있다면 별종의 인간일 것이다.

    허균의 질문에 이어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우리의 열정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우리는 언제 이렇게 열정 없는 사람들로 변해버린 것인가. 우리는 어디에 열정을 쏟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옛사람들이 이렇게 열정적인 독서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공부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공부였기 때문일 것이다.

    시험 성적을 얻기 위한 것도 아니고, 어디 들어가기 위한 것도 아니며, 오로지 내가 역사를 읽고 사상을 읽어 내 눈으로 세상을 보고 내 머리로 깨닫기 위한 독서이기 때문에 그런 열정이 불타올랐을 것이다. 충신 열사와 간신 아첨꾼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바로 내가 그 현장에서 당한 일인 것처럼 안타까워하고 분노하는 독서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런 열정적인 독서가 나를 바꾸고,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는 매우 소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스마트폰 시대에 대체 어떤 열정적인 독서가 가능하겠느냐고 회의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스마트폰 할아버지의 시대가 되더라도 우리를 성숙시켜주는 것은 이런 열정 말고 다른 길은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촛불을 드는 것만으로는 변혁을 완성할 수 없다. 우리가 스스로 더 크게 깨우치고 세상이 함께 깨우쳐야 한다.

    나는 고전학자인 까닭에 세상을 향해 이야기할 때도 고전을 통하는 길 말고 다른 길은 잘 모른다. 앞으로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이 소중한 지면에서 ‘세상을 바꾸는 고전 읽기’ 이야기를 풀어가 보고자 한다.

    세상을 좀 더 살만한 곳을 바꾸기 위해 고투한 것은 옛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다를 게 없다. 이 글을, 옛사람들이 벌인 고투의 흔적에서 오늘 참고할 지혜를 찾아가는 여행을 함께 떠나자는 권유로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나를 바꾸는 독서가 곧 세상을 바꾸는 독서이다.

    필자소개
    철학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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