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지식인 홍세화에 대한 향수
    [말글 칼럼] 무례하고 황당한 진보신당 기자회견문
        2012년 08월 23일 10:3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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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홍세화 선생이 진보신당 대표 물망에 오른단 얘길 들었을 때 걱정스러웠습니다. 그 걱정의 방향은 다른 사람들과는 사뭇 달랐지요.

    사람들은 선생이 원체 유순해서 ‘바지 대표’ 쯤 되고 젊은 부대표들이 쥐고 흔들지 않을까 걱정하더군요. 전 반대로 될까봐 걱정이었습니다.

    저 자신 지식인이라 자처하진 않지만, 여하튼 지식인 쪽을 유심히 지켜보면 의외로 고지식한 면이 있습니다. 특히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 쪽이 문제가 되면 물러서질 않지요.

    선생은 유순한 이미지와는 달리 주관이 뚜렷한 분입니다. 그래 괜히 정치한답시고 나섰다가 드센 정치판에서 행여 상처나 입지 않을까 싶었지요.

    진보신당 홍세화 대표

    더 큰 걱정은 선생이 비타협적으로 자기 견해를 밀어붙이면 어떡하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선생만 망가지는 게 아니고 자칫 진보신당이 깨지는 끔찍한 일이거든요. 불행히도 이번 진보신당 대선 관련 기자회견문이 그런 것 같습니다.

    수신자를 잃어버린 열렬한 연애편지

    회견문은 시종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향합니다. 그런데 이 회견문을 듣거나 읽어서 단박에 이해할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의문입니다. 이십여 년 글로 밥 벌어먹는 저조차도 프린트해서 밑줄 쳐 가면서 읽었을 정돈데요.

    회견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 파시즘 시대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다 감옥에서 숨진 이탈리아의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를 우리는 안다.’

    그람시를 아는 사람이 많을까요, 모르는 사람이 많을까요? 주어를 보세요. ‘우리는’입니다. 그람시를 아는 우리가 쓴 글이란 거죠. 모르는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질려버릴 겁니다.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건 누가 봐도 지식인이 쓴 글이지요. 이렇게 회견문은 처음부터 지식인 아닌 사람들을, 본의 아니게, 대상화시켜 버립니다.

    문장 형식도 파격적입니다. ‘우리는 안다. 우리가 어디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를.’처럼 어순을 바꾼 것이 참 많더군요. 비분강개의 전형적인 문장이죠. 그밖에도 가정법이라든가, 명사로 끝맺는 문장들도 눈에 띕니다.

    이렇게 문장을 비틀기 시작하면 듣는 사람으로선 당혹스럽습니다. 뭔가 굉장한 격론을 펼친다는 건 알겠는데, 왜 이렇게 흥분하는지를 알 수가 없으니까요. 모르긴 해도 아마 현장의 기자들부터 어리둥절했을 듯합니다.

    여기에 ‘배제당한 노동’, ‘배제된 자들’, ‘자유주의 야당’, ‘남겨진 자들’, ‘노동의 수직적 분업체계’, ‘불안정 노동자’, ‘조직노동’ 같은 말들이 곳곳에 박힙니다. 이런 생소한 말들이 끼면 참말 답답한 글이 되고 말지요.

    결국 이 회견문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향하면서도 정작 당사자들은 알아먹을 수 없는 글, 수신자를 잃어버린 열렬한 연애편지 꼴이 돼버렸습니다. ‘지식인’ 홍세화의 글이지, 진보신‘당’의 회견문은 아니라는 거지요.

    ‘조직노동’이 진보정치 파탄의 원흉?

    제가 제일 놀라고 황당했던 것은 ‘조직노동’, 즉 민주노총을 향한 직격탄이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선언인지 한 번 보지요.

    “노동자는 이미 하나가 아니다. 오늘 우리가 지켜보고 있는 진보정치의 파탄에 근원적 책임이 있는 조직노동은 새로운 진보좌파운동을 주도하는 주체가 결코 될 수 없다.”

    아무리 비정규직 노동자를 향한 구애라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습니다. 무엇보다 논리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얼토당토않은 억지지요.

    민주노총은 본질적으로 대중조직이고 이익집단입니다. 정치조직이 아니라는 거지요. 비록 민주노총이 진보정치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치조직인 당이 대중조직더러 진보정치의 파탄의 근원이라고 몰아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아주 무례하고요.

    이런 식의 논리는 필연적으로 기존 진보정당을 부정하는 데로 이어집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말이 있군요.

    “진보정치는 이들(비정규직)을 배제한 거대 조직노동의 이해를 대변하는 대리정치기구에 불과한 것”

    자, 사실이 이러하다면 누가 먼저 반성해야 하는 걸까요? 진정 진보정치 파탄의 책임자는 누구일까요? 진보정치가 거대 조직노동의 이해만 대변했던 게 문제인가요, 아니면 진보정치를 거든 조직노동이 문제인가요? 왜 자기 반성할 것을 남한테 떠넘기느냐는 겁니다.

    차라리 서글픕니다. 이렇게 몰아세워도 민주노총이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게 빤히 보이니까요. 존재조차 희미하고 게다가 ‘꼴통’이기조차 한 꼬맹이가 어른더러 ‘이게 다 너네 탓!’이라 하면 십중팔구 웃어넘길 테니까요.

    이렇게 몰아쳐놓고 뒤에 가서 다시 매달리는 건 또 뭡니까?

    “이 꿈의 실현을 위해 민주노총 조합원 노동자들을 포함한 조직노동의 결단을 당부한다.”

    아아, 이건 뭐, 일관성도 없고 잔뜩 투정부리다가 다시 두 손 싹싹 비벼대는 짝이잖아요. 정말 제가 당원이라는 게 창피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저라도 괜찮다면, ‘용서해주세요.’, 빌고 싶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환상

    회견문은 이제 ‘배제당한 노동’, 즉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향해, 말 그대로 열렬히, 호소합니다.

    “우리는 호소하고자 한다. 누구보다 먼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포함한 불안정 노동자들에게, 사회연대를 위한 2012년 대선운동의 주체는 바로 여러분들이라고. 분열된 노동계급의 연대를 위해, 새로운 진보좌파정치의 재탄생을 위해 당신들이 연대의 주체로 먼저 손을 내밀면 안 되는가? 당신들이 주체가 되어 절멸의 위기 앞에 선 좌파정치를 재구축하면 안 되는가?”

    눈물이 앞을 가리고 절로 가슴이 뛰고 너나없이 결의를 다지길 기대했을 게 빤히 보입니다. 노조 조직률 2%에도 미치지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로선 대단한 대접을 받는군요.

    대체 이렇게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급히 이동하게 된 근거가 뭘까요? ‘새로운 바람’을 ‘노동의 수직적 분업체계’의 가장 밑바닥에서 봤다는 말이 있군요.

    자, 그럼 그 ‘새로운 바람’의 실체는 뭘까요? ‘작년 영도조선소를 향해 달려가던 바람’이고 ‘지금 대한문 앞을 오가는 바람’이랍니다.

    그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일으킨 바람인가요? 한진중공업과 쌍용차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인가요? 희망버스에 탄 시민들이 죄다 비정규직이랍디까? 그 버스에 탄 비정규직이라면 저 같은 학원 강사 정도일 겁니다.

    저도 외국 유명인사 한 분 모셔서 도움을 받을까 합니다. 프랑스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가 이런 말을 했지요.

    “미래를 가능성으로서 가지지 않은 사람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미래를 계획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노력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

    하루 벌어 하루 버티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자에게서는 혁명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당장 희망은 정규직 되는 것,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손잡을 수 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얕보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이 그들의 정확한 모습이란 겁니다.

    진보신당처럼 힘없는 당이 몸 바쳐 같이 싸워주는 것, 좋지요. 하지만 민주당 의원들이 찾아와 조사활동 벌이고 공청회나 청문회 열고 방지 대책을 세워주는 것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지요.

    정말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새로운 좌파정치의 주역으로 나서게 하고 싶다면, 먼저 그들이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현실의 삶을 안정시키는 데서 시작합니다. 현실을 직면할 수 있어야 미래도 생각할 수 있는 법이거든요.

    따라서 무작정 정치 일선에 나서달라고 호소하는 건 공염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식이면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 민주당에게 그들을 고스란히 다 빼앗기고 말 겁니다. 그들에게 현실을 되돌려준 세력만이 미래도 함께 열 수 있다는 겁니다.

    ‘청년유니온’ 전 정책기획실장 조성주의 말은 이런 점에서 훨씬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사회적 약자라는 청년 비정규직들을 조직하고 그들을 대변하는 운동을 해왔으면서도 나는 ‘사회적 약자들의 혁명적 저항’ 등의 낭만적인 말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나는 늘 좀 더 현실적인 눈에 보이는 실현가능성을 더 중시하고 그렇게 판단한다. 그러나….바로 여기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나오지 않으면 그 때문에 내가 괴로워하지 않으면 더 이상 운동을 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조성주는 절대로 지는 싸움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한 번의 패배로도 끝장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만큼 약자들의 싸움을 대하는 태도는 조심스러워야 하는 겁니다. 작더라도 확실한 승리를 전제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고민해야 하는 겁니다.

    좋은 지식인이 수준 이하의 정치인으로

    꽤 장황하게 회견문을 살펴봤습니다. 이 회견문은 누가 봐도 홍세화 선생의 작품입니다. 만약 대표단에서 이런 회견문을 내놨다면, 그거야말로 비극 중에 비극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회견문이 버젓이 발표까지 된 걸까요? 여기서 불통의 문제가 생깁니다.

    첫째는 대표와 대표단의 불통입니다. 대표단의 동의를 구했다면 이런 회견문은 나올 수가 없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대표가 독단적으로 발표한 것이라는 결론이 남습니다.

    둘째는 진보신당과 민주노총의 불통입니다. 민주노총의 문제점을 지적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마구잡이로 밀어붙이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은 거지요. 회견문 정도면 미리 관계 단체에 사전 동의나 양해를 구하는 게 상식 아닌가요?

    셋째는 진보신당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불통입니다. 구체적으로 이에 동의하는 비정규직 단체 하나 없는 상태에서 일방적 애정 행각을 벌였잖습니까.

    저는 시종 홍세화 ‘선생’이라 했습니다. ‘대표’란 호칭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호칭에 어울리지 않는다 보기 때문입니다.

    이명박이나 박근혜한테만 불통, 불통 탓할 게 아니라, 우리 안의 불통부터 돌아봐야 할 듯싶군요. 박근혜라고 “5.16은 구국의 결단”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참잖아요. 참모들이 일러준 대로 노무현 묘역도 찾고 보기 싫은 사람도 만나고 하기 싫은 말도 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전 홍세화 선생은 대표 자격이 없다고 봅니다. 그는 정치를 한다면서 여전히 ‘지사’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선생’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혼자 할 것이면 정당 활동을 해선 안 되는 거지요.

    차라리 잘 됐다고 봅니다. 이렇게 수준 이하의 정치인으로 망가질 바엔 원래 자리, 정말 잘 할 수 있는 ‘좋은 지식인’의 자리로 되돌아가시길 간곡히 호소합니다.

    그게 선생께서 이 나라와 진보좌파정치에 기여할 가장 좋은 길로 보입니다. 이미 검증도 충분히 됐고요.

    필자소개
    민주노동당 활동을 하였고 지금은 정의당의 당원이다. 수도권에서 오랫동안 논술 전문강사로 일하다가 지금은 부산에 정착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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