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팥밥, 피자매연대의 탄생
    [밥하는 노동의 기록-2] 딸의 초경
        2017년 07월 28일 10:2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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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갓 열네 살이 되었을 때 월경을 시작했다. 속옷에 피가 묻어 나오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국민학교 6학년, 남자애들은 축구하러 나간 5교시의 교실에는 커튼이 쳐졌고 처음 보는 여자 사람이 우리 앞에 서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위스퍼에서 일하는 아무개입니다. 비디오를 보여주며 월경에 대해 설명한 후 우리에게 작은 수첩과 위스퍼 샘플을 나눠줬다. 그 수첩에는 여성이 자신의 2차 성징에 대처하는 방법과 월경달력이 들어있었다.

    숫자는 항상 1이면 1이고 2면 2고 1에 1 더하면 2라 배우던 때였으니 ‘월경은 보통 28일 주기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어 그냥 그런 것이 있나 보다 하고 말았다. 브래지어 고르는 법이나 생리대 처리법, 생리혈 새지 않는 법에다 월경 시 몸가짐까지 빼곡하게 써있는 그 수첩을 꽤 여러 번 읽었다.

    어머니에게 초경을 알리자 아버지는 비싼 중식당에서 밥을 사주시며 한참 뜸을 들이다가 ‘너도 이제 어른스럽게 굴어야 한다’ 한 마디만 하셨다. 그 자리에서 이 밥을 왜 먹는지 모르는 사람은 내 동생밖에 없었다. 나는 그 이유를 1년쯤 지나 알려줬다. 비싼 밥을 먹었으니 내 몸에 일어난 변화가 좋은 일이구나 짐작했으나 본격적으로 월경을 시작하고 나서 알았다. 월경은 재앙이었다.

    당사자에게 재앙이지만 타인에겐 세상에 없는 일 치는 것을 넘어 놀림감으로 삼는 일이 꽤 많다. 월경도 그랬다. 중학교 1학년 5월, 위스퍼에서 다시 학교에 왔다. 2년 전과 똑같이 남자애들을 교실 밖으로 몰아내고(내가 다녔던 중학교는 당시엔 매우 드물게 남녀 합반에 짝인 학교였다) 커튼을 친 후 똑같은 내용의 강의를 하고 샘플을 나눠준 후 사라졌다.

    여학생들에게도 똑같은 경험이었고 그건 남학생들에게도 그랬다. 축구를 하고 돌아온 남자애들은 왜 담임이 뜬금없이 자신들을 운동장으로 내보냈는지 대충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짝의 서랍을 뒤져 생리대를 찾아냈다.

    처음 찾은 놈이 책상 위에 올라가 ‘이야~~후리덤!!’이라 외치며 생리대 포장을 뜯어 날렸다. 뺏으려 애썼으나 날뛰는 남자애들을 제압할 수가 없었다. 약 10분간 교실에 생리대가 날아다녔고 여학생들의 욕설과 남학생들의 야유가 복도를 울렸다. 사마귀라 불렸던 남교사가 교편이라 쓰고 몽둥이라 읽는 것을 들고 달려와 상황을 정리했다. 남자애들이 맞는 동안 우리는 바닥에 떨어진 생리대를 주워 담았다. 간신히 다음 수업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짝에게 말했다. ‘야, 이거 후리덤 아니고 위스퍼야. 이게 훨씬 더 비싸다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고무줄 끊고 도망가던 놈들은 이제 브래지어 끈을 잡아당겼고 화를 내면 ‘왜? 생리해?’라며 실실 웃었다. 힘으로 이길 수 없으니 여자애들은 입만 험해져갔다. 언제나 전교 최상위권을 유지하던 친구는 복도에서 자신의 브래지어 끈을 잡아당긴 남자애에게 ‘공부도 못하는 게 지랄이야’며 쏘아붙였으나 역시 ‘왜, 생리해?’소리를 들었다. 도대체 그 놈의 ‘왜, 생리해?’는 이길 재간이 없었다. 꽤 오랫동안 그랬다. 그런 말을 가르쳐주는 학원이라도 있는가 싶었다. 내가 뭘 따지고 들면 ‘왜 그래, 너 오늘 그 날이야? 마법해?’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렇게 시작해 30년 가까이 월경 중인 나는 아직도 인구의 절반이 매달 겪는 일에 대해 나머지 절반이 어쩜 이렇게도 무지하며 인식은 천박할까 새삼 놀랍다. 생리대 자판기를 들여놓으려면 면도기 자판기도 같이 설치하라는 한양대 남학생들, 생리대라는 단어가 듣기 거북하니 위생대로 바꿔 말하라는 구의원, 무려 기자 출신이지만 월경에 대해선 뇌내망상으로 쓴 소설가, 월경컵 기사에 뒷목 잡는 댓글을 단 사람들과 함께 이 사회를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가만 앉았다가도 막막함에 도리질을 친다.

    오래 전에 듣기로 딸이 초경을 하면 팥밥을 지었다 했다. 팥을 삶으며 이 험한 세상에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그저 액이나마 피해가라며 팥밥 한 그릇으로 딸의 초경을 축하했을 밥하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나도 혐오가 판치는 세상에 딸에게 무력한 어미가 되어 그저 팥밥을 지었다. 해줄 말도 해줄 것도 찾기 힘들었다. 다만 이제 엄마와 딸이 아닌 같이 월경하는 자매로 더 단단해져야겠다는 다짐을 둔다.

    그렇게 딸의 초경이 나에게도 왔다.

    불고기, 전 몇 가지, 열무김치, 팥밥.

    필자소개
    독자. 밥하면서 십대 아이 둘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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