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현대사의 거인, 몽양 여운형
    [여운형 70주기를 기억하며 ⓵] 세 개의 임시정부
        2017년 07월 24일 10:3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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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는 1947년 7월 19일 암살을 당했던 몽양 여운형 선생의 70주기가 되는 해이다. 레디앙은 여운형의 삶과 죽음에 대해 최백순 씨의 글을 3차례 정도 연재한다. 여운형은 일제 시기 독립운동에 투신해 상해 임시정부의 건설에 참여하고 주요 직책을 역임했으며 국내에서는 언론인과 체육인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해방 이전 비밀조직인 건국동맹을 조직하여 해방을 대비했다. 해방 이후에는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으며 그 과정에서 수차례의 암살 시도를 당하다가 결국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극우파 조직 백의사의 한지근 등 5명에게 저격을 당하고 사망했다. 암살에 대해서는 암살자와 그 배후 등에 대해 지금까지도 여러 이견들이 제기되고 있다. 그는 사회주의 입장에서 일관되게 활동했으나 조선공산당과는 거리를 두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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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가들이 활동기반으로 삼고 있던 곳은 기독교회였다.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뒤편에 위치한 상동감리교회 역시 독립운동가들의 근거지였다.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상동교회가 설립한 공옥학교의 교감은 조선의 아나키스트 이회영이었고, 주임교사는 상해임시정부 수립의 주역 중에 한 명인 이동녕이 재직하고 있었다. 강압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한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다음 단계인 군대 해산을 추진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이라는 것을 직감한 독립운동가들은 이회영을 중심으로 상동교회에 모여들었다.

    1907년 정미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독립운동가들은 기존의 국권회복을 위한 계몽주의 방식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이회영, 이동휘, 안창호, 이종호, 신채호, 이동녕 등을 중심으로 신민회가 탄생한 것은 이때였다.

    신민회는 대외적으로 계몽기관을 표방했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무장독립운동’을 계획하는 비밀결사조직이었다. 무장노선을 추진하는 비밀조직이었지만 현실은 교육과 계몽운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신채호는 신민회가 본래의 목적을 유보한 채, 문화주의와 합법주의에 갇혀있다고 비판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한일병탄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신민회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신민회 지도부 회의에서 안창호는 실력양성에 전념해야 한다는 ‘자강론’을 내세웠지만 다수의 의견은 ‘독립전쟁론’으로 기울었다. 독립전쟁론을 위해 가능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집단적인 간도 망명과 무관학교 설립을 통한 군대양성이었다. 국내의 재산을 처분한 지도부는 중국 청도에 1차 거점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잇따라 국내를 빠져나갔다. 신민회가 임시정부를 자임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의 망명정부에 대한 고민도 깊어갔다.

    경기도 양평군의 몽양 여운형 선생 생가(이하 사진=국가보훈처 블로그)

    경기도 양평군 묘골(오늘날 경의중앙선 신원역)의 부농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여운형은 영국유학에서 돌아온 집안 종숙인 여병현의 권유로 배재학당(감리교)에 입학했다. 여운형이 기독교에 입문하고 영어에 뛰어난 자질을 보인 것은 여병현의 영향이었다. 담임교사의 지도방식에 대립하다 배재학당을 중퇴한 후 여운형은 관립 우편전신교육학교인 우무학당에 들어갔다. 우무학당은 졸업 후 우무국(우편체신국)에 우선 채용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곳이었지만 우무국이 일제의 손에 넘어가자 여운형은 취업통보서를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다.

    여운형이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곳은 승동교회의 전도사 자리였다. 상동교회가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면 종로구에 위치한 승동교회는 ‘민중교회’라고 할 수 있었다. 전도사 일에 전념하던 여운형은 신민회가 주관한 연설회에서 운명처럼 안창호를 만났다.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안창호의 자강론에 매료됐다.

    얼마 후 부친이 돌아가자 고향인 묘골로 돌아온 여운형은 3년 상을 마치자 신주를 땅에 묻고 노비문서를 불태워 집안의 노비들을 자유인으로 방면했다. 다음 행보를 고민하던 여운형에게 언더우드 선교사는 뜻밖에도 중국 유학을 제안했다. 난징에 위치한 금릉대학 영어과의 교수들이 탁월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말에 여운형은 가산 일부를 처분한 후 곧바로 신의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최초의 국내정부, 한성임시정부의 탄생

    3.1운동의 여진이 들불처럼 전국으로 퍼져나가던 1919년 3월 17일, 경성 내자동 한성오의 집에서는 일제의 시선을 피한 은밀한 모임이 열렸다. 모임에 참석한 인물은 홍진, 이규갑, 한남수, 김사국 등이었다. 모임을 소집한 좌장인 홍진은 구한말 검사로 재직하다 한일병탄이 일어나자 곧바로 사표를 제출한 후 감옥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고 있었다. 일제치하에서 검사로 재직하고 있던 한성오는 홍진이 아끼던 후배였다. 이규갑은 구한말 의병으로 활동하다 지금은 기독교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를테면 기독교대표로 모임에 참석한 셈이었다. 후일 조선공산당을 주도한 화요회와 한 치의 타협도 없는 대결을 계속했던 서울파의 영수가 되는 김사국은 청년을 대표해 참석했다.

    이날의 모임에 극소수만이 참석한 이유는 논의 내용이 일제의 통치를 부정하는 정부의 건설을 추진하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홍진은 3.1운동의 불꽃이 계속 타오르려면 중심이 필요하고 대외적인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반대의견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계획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의 다수 의견은 13도 대표자대회를 열어 정부를 건설하자는 것이 주류였다. 이를테면 제헌의회를 소집해 정부를 건설하자는 방식이었다. 이견을 주장한 것은 김사국이었다. 김사국은 대표자회의 내용을 민중들에게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국민대회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논란 끝에 김사국의 이 과감한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소집된 13도 대표자대회는 「국민대회취지서」 와 「임시정부약법」을 검토하고 이를 채택했다. 헌법에 해당하는 약법까지 채택함으로서 정부의 성격을 분명히 했다. 한성임시정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3.1운동의 여파로 사람들이 계속해서 감옥으로 끌려가는 때를 감안하면 대담한 계획이었다.

    특이한 것은 정부 형태로 집정관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고대 로마시대에 따르면 집정관은 ‘통령’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자회의는 집정관 총재에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군무총장 노백린, 재무총장 이시영, 노동국총판 안창호, 참모총장 유동열 등을 ‘선출’했다. 문제는 이승만 직책을 집정관 총재라고 한 것이었다. 이후 이승만은 자신이 한성임시정부의 ‘President’로 선출되었다고 소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글이 영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갖는 약한 고리를 이용해 이승만은 어느새 ’대통령‘으로 둔갑해버린 것이다.

    대표자회의는 국민대회를 총괄할 책임자로 홍진과 한남수를 선임하고 폐회했다. 그런데 며칠 후 홍진과 이규갑, 한남수가 한성임시정부의 수립을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가들과 상의한다면서 상해로 망명길에 올랐다. 순식간에 국민대회를 책임질 지도부가 공백상태에 빠져 버렸다. 하지만 후퇴는 없었다. 열흘 후 통의동 김사국의 집(정확히는 김사국의 삼촌집이며 이곳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에서 국민대회를 점검하기 위한 마지막 모임이 열렸다. 감리교의 현석칠과 천도교의 안상덕이 재정을 지원하고 김사국을 중심으로 청년들이 국민대회를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한성임시정부의 건설방식은 대한국민의회나 상해임시정부와는 중요한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13도의 대표자를 소집해 제헌의회의 형식을 취하고 정부를 조각한 것은 무엇보다 ‘정통성’을 우선시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국민대회를 개최해 정부의 건설을 선포하기로 한 것이 가장 커다란 차이점이었다. 국민대회는 정부의 구성을 ‘선출’하는 방식을 채택하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선출이라고 해도 짜인 각본에 의한 추천에 따라 만장일치로 결정될 것은 불을 보듯 자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국민대회와 선출절차를 거쳤다는 점에서 정부가 ‘민주적’으로 건설되었다는 ‘또 다른 정통성’을 가질 수 있었다. 비록 형식적이기는 했지만 이런 민주적 절차는 훗날에도 알 수 있지만, 김사국에게는 언제나 중요한 형식 그 이상이었다. 한성임시정부의 가장 큰 정통성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해외가 아니라 국내에서 건설되었다는 것이다.

    1919년 4월 23일 보신각에서는 「국민대회취지서」 와 「임시정부약법」이 적힌 선전물이 뿌려지며 한성임시정부의 건설을 선포했다. 선전물에는 일제의 조선통치권 폐지와 군대의 철수가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한성임시정부가 조선의 유일한 정부라는 것을 일제에 공개적으로 통보한 것이다. 3.1운동에 이어 일제를 경악하게 한 일대 사건이었다. 대회를 주도한 사람들은 김사국과 보성고보의 장채극, 김유인, 전옥결 등이었다. 김사국이 감옥에 다녀온 후 서울청년회, 곧 ‘서울파’의 창립을 주도한 인물들이었다. 한성임시정부 현판은 인근 서린동에 있는 조선요릿집인 봉춘관에 내걸었다.

    3.1운동에 고무되어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하던 인물들은 한성임시정부의 지도부가 망명하자 국내에서 먼저 정부 수립이 추진된다는 사실을 듣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상해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하던 이동녕은 전문 맨 앞에 “한성임시정부 정통을 계승”한다는 취지를 삽입하자는 주장을 고심 끝에 받아들였다. 망명한 한성임시정부의 홍진은 법무총장과 의정원의원에, 이규갑은 충청을 대표하는 의정원의원에 선임됐다. 4월 11일 상해임시정부 수립 직후에 열린 첫 의정원 회의에서 “한성임시정부 정통을 계승”한다는 내용을 삭제하자는 수정안이 제출되었지만 격론 끝에 부결되었다.

    최초의 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

    디아스포라. 구한말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면 열강에 의해 조선이 몸살을 앓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이라는 왕정이 막을 내리지 않기 위해 마지막 숨을 내쉬는 시기이자 봉건체제가 새로운 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이런 불안한 시기에 조선이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들끓자 인민들의 삶은 더욱 곤궁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조선 후기가 인민들에게 먹고 살만큼의 통로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난하면서도 ‘예측 가능한 삶’은 가능한 시기였다. 격동의 구한말은 민중들의 예측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가난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혼돈, 그 자체를 감당하는 것은 민중들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1869년과 1870년에 걸쳐 함경도 일대에는 물 한 방울조차 보기 힘들 정도의 대가뭄이 몰아닥치며 대흉작이 연이어졌다. 살아야만 했던 민중들은 터전을 버리고 떠나기 시작했다. 무역항으로 활기가 넘치는 포시예트는 몸뚱어리만 있으면 밥은 먹을 수 있는 곳이라는 소문은 함경도까지 퍼져있었다. 지신허와 항구의 배후 도시에 해당하는 노보키예프스키(Novokievskii)까지는 걸어서도 삼일이면 충분했다. 연해주로 넘어가는 민중들의 행렬은 마치 굴을 찾는 개미들처럼 이어졌다.

    두 해에 걸쳐 러시아로 넘어간 한인들은 수천 명을 넘어섰다. 당황한 조선은 러시아에 공식문서를 보내 국경을 제대로 통제해줄 것을 요청할 정도였다. 통상적인 외교절차에 따라 러시아는 한인들에게 조선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한인들의 답변은 조선으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겠다는 것이었다. 이 농성은 조선의 역사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가장 비참한 농성이었다. 먹고 살기위한 ‘집단’망명이었다.

    함경북도 경원 출신인 문창범 역시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연해주로 넘어갔다. 한인 소학교들이 막 생기기 시작했지만 집안이 제법 먹고 살만했는지 문창범은 러시아 정규학교를 다니는 작은 혜택을 입었다. 러시아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그에게 커다란 배경으로 작용했다. 헤이그 밀사로 파견되었던 이상설이 일제에 의해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자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왔다. 문창범은 이상설과 유인석 등과 함께 군대를 조직해 국내 진격투쟁을 계획했다.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뛰어난 러시아어를 구사하며 현지인이나 다름없는 문창범이 전면에 나서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한인들은 하나로 힘을 모으자는 논의가 시작됐다. 러시아 전역의 한인단체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모여 전로한인중앙총회를 결성하고 문창범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러시아 내전이 시작되자 중앙총회는 군대를 조직해 볼셰비키와 적군을 엄호했다. 내전이 볼셰비키의 승리로 끝나자 한인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논의를 거듭했다. 상해에서 활동하던 여운형이 연해주로 넘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신한청년당을 이끌던 여운형은 연해주의 한인들과 힘을 모으는 것이 독립운동의 커다란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창범은 여운형에게 은밀하게 준비 중인 계획을 설명했다. 여운형은 이 대담한 계획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1919년 2월 1일, 공개적으로 발표된 최초의 독립선언서, 무오독립선언이었다.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국이자 민주적 자립국임을 선포하고, 일본의 병합수단은 사기와 강박과 무력폭행 등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임을 선언한다.”

    무오독립선언에는 김규식, 이동휘, 김좌진, 이시영, 문창범, 신채호, 안창호 등 39인이 대표자로 서명했다. 무오독립선언 계획을 듣고 상해로 돌아온 여운형은 신한청년당 당원들을 경성과 동경으로 파견해 이런 흐름들을 전파했다. 동경에서 2.8 독립선언이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한 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한인조직들은 그동안 논의되고 있었던 두 번째 계획을 곧바로 실천으로 옮겼다.

    1917년 3월 17일 중앙총회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총회를 개최하고 해산을 결정하는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을 선언했다. 한성임시정부보다 한발 빠른 최초의 정부, 대한국민의회가 탄생했다. 최고의결기관은 민회의 성격을 도입한 총회로 규정하고 일상적 의결기관은 의회가 맡는 내각중심제 성격의 임시정부였다. 연해주가 기반인 탓에 부의장은 내륙인 이르쿠츠크의 한인조직을 대표하는 김철훈을, 외교대표 성격의 대통령에는 손병희, 국무총리는 이승만, 군무총장은 이동휘, 내무총장은 안창호가 선임됐다. 내각제 총리에 해당하는 의장에는 문창범이 추대됐다.

    상해시절 여운형 선생(맨 앞줄 가운데)

    상해에서 임시정부 설립을 주도하던 신한청년당은 국내에서 한성임시정부가 출범하고 있다는 소식과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가 출범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난감한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4월 13일 한성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의정원 결정을 통해 국내 문제는 해결했지만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설립된 대한국민의회와의 관계도 해결해야만 하는 사태에 직면했다. 여운형은 특사 파견을 제안했고 의정원 의장인 이동녕은 이를 일단 받아들였다.

    연해주에 파견된 특사들과 대한국민의회 지도부들의 논의는 쉽게 결론나지 않았다. 최초의 사회주의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해 연해주 지역의 사회주의자들을 이끌고 있던 이동휘가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한다는 결단을 내렸다. 국무총리 이승만, 행정부를 사실상 총괄하는 군무총장 이동휘, 독립운동자금을 총괄하는 재무총장 문창범 제안을 수락한 것이다. 이승만은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의정원 의장은 이동녕이 맡고 있었지만 협의를 통해 정부를 연착륙시키는 것은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해 여름, 대한국민의회는 총회를 열어 해산을 결의하고 주요 기반을 상해임시정부로 옮긴다고 결정했다.(이동휘의 한인사회당도 이때 사실상 해산에 준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동휘와 대한국민의회의 문창범이 활동기반을 정리하고 상해로 향하고 있을 때, 의정원 의회를 소집한 이동녕은 상해임시정부의 정부체계에 대한 새로운 결정을 의결했다. 여운형은 이 결정이 파탄을 가져올 것이라며 격렬히 반대했지만, 의정원과 신한청년당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는 이동녕의 독단을 막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의정원은 임시라는 표현을 명확히 했지만 대통령제를 도입했다. 대통령은 이승만, 국무총리는 이동휘로 추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상해에 도착한 이동휘는 격분하며 취임을 거부했다. 이동녕을 비판하던 여운형과 안창호는 난감해하면서도 이동휘와 대화를 계속했다. 이해할 수 없는 사태를 지켜보던 문창범은 조용히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여운형은 이후 어떻게 할 생각인지 문창범에게 물었다. 문창범은 “선생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반문하며 대한국민의회 재건을 위한 총회를 소집하겠다고 답변했다. 문창범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자 여운형은 상해정부에 상근하지도 않는 대통령(제)와 이동녕 중심의 의정원체제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계속>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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