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성애 결혼을 축하하다
    [누리야 아빠랑 산에 가자⑳]살빼기
        2017년 07월 22일 11:3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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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산 채비를 하는 중에 딸애가 서류철을 내밀었다. 독하게 살을 뺀다는 의지로 만들었다는 ‘슬림 독slim, 毒’의 살빼기 계획이었다. 딸은 2학기 야자에서 1시간을 다이어트에 투자했다. 슬림 독의 경쟁률이 높아 체력시험도 봤단다. 1,000미터 달리기와 3,000번의 줄넘기였단다. 서류엔 하루 물 2리터, 줄넘기 1,000번 따위의 다양한 계획이 나열돼 있었다.

    오늘은 나무 얘기를 했다. 딸이 자연과 친숙해지는 데 도움 될 것이란 생각이었다. 동네 나서는 길엔 느티, 향, 사철, 이팝, 뽕나무 따위가 있었다. 산에선 회초리 만들었던 싸리나무, 산길의 길잡이 국수나무도 가르쳤다. 신발에 깔아 신갈, 떡을 싸서 떡갈, 임금 수라상 제일 위에 오르는 도토리라 상수리, 열매가 작아 졸참이라 읊으며, 참나무 종류도 설명했다.

    떡신갈, 졸굴상, 여섯 종류 참나무를 쉽게 익히는 요령도 소개했다. 신갈엔 떡이 많아 떡신갈이고, 졸병이 굴상을 차려 졸굴상이라 연상하는 방식이었다. 학창 시절 암기 과목을 공부하던 요령이었다.

    “아, 그렇구나. 근데 아빠, 나는 그렇게 암기하지 못해. 내용을 이해하지 않으면 암기가 안 되는 유형이야.”

    버스가 광화문 세종대왕상 옆을 지날 때였다.

    “아빠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은 세종대왕이라고 생각해. 한글을 만들었잖아. 지배층이 한자를 쓰는 상황에서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 한글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잖아. 세종대왕은 최고의 발명가야.”

    내 말에 동의한 딸은 학교에서 배웠다는 한글 이야기를 조잘조잘 신나게 설명했다. 모음에서 ㆍ(아래 아)는 하늘, ㅡ는 땅, ㅣ는 사람을 뜻한다는 것, 자음에서 원(○)은 머리, 방(□)은 몸통, 각(△)은 손발로 사람을 뜻한다는 것 등이었다. 내 학창 시절엔 배우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딸은 음양 구분에서, 양은 흔히 생각하듯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이라는 것도 설명했다. 나는 나름대로 추측해 해석했고, 딸은 수긍했다.

    “남쪽을 향해 앉는 임금의 시각에서 보면 동쪽에서 해가 뜨니까 왼쪽이 양 아니겠냐. 그래서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더 높은 품계 아니겠냐.”

    “아하, 그럴 수도 있겠네.”

    산길을 걷다 딸이 말했다.

    “아빠. 요즘 생각이 드는 게 있는데, 나는 왠지 엄마 아빠의 길을 따라갈 것 같아.”

    가슴이 먹먹했다. 분명 의미 있는 삶이지만, 딸이 나와 같은 고통을 감내해야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암담했다. 나야 어떡하든 견디며 가겠으나, 딸내미마저 거칠고 궁핍한 삶을 선택한다는 것은 말리고 싶었다. 더구나 지금의 노동운동은 세상을 바꾼다는 꿈을 잃은 채 헤매고 있었다. 조합원의 임금과 고용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사회적으로 신뢰를 잃어가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했다.

    “하더라도 직업을 갖고 했으면 좋겠어. 이젠 세상이 변했어. 아빠 같은 직업적 운동가보다는 뭔가 독특한 전문성을 갖고 운동을 하는 게 더 필요한 시대가 됐어. 아빠 삶은 너무 힘들어. 옛날엔 너를 노동운동하게 만들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야. 너까지 그런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은 심정이야.”

    그러자 딸이 말했다.

    “근데 아빠 같은 노동운동은 아니야. 인권운동을 생각하고 있어. 심리학을 공부해서, 쌍용자동차 아저씨들처럼 노조 하다가 정신적으로 힘든 사람들 도우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심리학을 공부하겠다는 것과 인권운동을 생각한다는 대목에서 그나마 안도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인권운동이 노동운동보다 거칠고 궁핍했다. 노동운동가들은 노동조합에 붙어 안정된 생계비라도 챙길 수 있었다. 인권운동가들은 그렇지 못했다. 대부분 각자 알아서 버텨야 했다. 힘들게 살아가는 박래군, 박진 등의 인권운동가들 모습이 뇌리에 스쳤다. 나는 한숨을 삼켰다.

    하산해서 저녁을 빠르게 먹고 청계천으로 갔다. 광통교 일대는 사람들로 꽉 차 몸 들이밀 틈이 없었다. 우리는 맨 끝 의자에 올라서서 무대를 주시했다. 2013년 9월 7일, 김조광수와 김승환, 한국 최초의 성소수자 공개 결혼식이었다. 딸과 나는 결혼식을 축하하기로 약속돼 있었다.

    밝고 즐거웠다. 결혼식 도중 기독교인 하나가 무대에 난입해 오물을 던졌다. 하나는 밑에서 현수막을 펼쳤다. 주인공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하객들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저런 짓을 하니까 악독교 취급 받지.”

    “맞아.”

    나는 불만을 터뜨렸고, 딸은 맞장구쳤다.

    김조광수는 담담하게 고백했다. 커 오면서 매일 자신의 동성애 정체성을 바꾸게 해 달라 기도했단다. 매일 30분을 반성하며 잤단다. 내 가슴이 먹먹했고 눈물도 맺혔다. 웅크린 어린 영혼의 아픔이 아프게 다가왔다. 과거의 내 잘못이 괘씸했다. 성소수자에 대한 인권 감수성이 전혀 없던 80년대, 나는 비아냥거리고 벌레 취급했다. 그때 조롱당했던 성소수자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무릎 꿇고 사죄라도 할 텐데…….

    딸은 김조광수와 김승환의 결혼식을 사진과 영상에 담았다.

    주인공들은 무대 위에서 키스를 했다. 환호의 박수와 함성이 광통교를 뒤덮었다. 딸은 휴대폰을 꺼내 영상을 촬영했다. 유쾌한 결혼식이 끝나고, 하객들에게 컵케이크가 전달됐다. 딸아이는 냄새 좋다며 킁킁댔다. 먹지는 못하고 입맛만 다셨다. 빙그레 웃으며 딸에게 권했다.

    “아무리 다이어트를 해도 축하하기 위해 반드시 먹어 줘야 해. 제사 끝나고 음복하는 것과 같은 이치야.”

    딸애는 안 된다고 버티다가 결국 맛나게 먹었다.

    필자소개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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