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촛불의 공간은 ‘광장’, 그럼 시간은?
    [서평] <촛불철학 : 문재인 정부에 보내는 한 철학도의 물음>(황광우/ 풀빛 2017)
        2017년 07월 22일 10:2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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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촛불항쟁이 일단 승리로 끝난 뒤에 서점 사회과학 코너에서 ‘촛불’을 제목으로 단 책들을 심심치 않게 본다. 그러나 정작 손이 잘 가지는 않는다. 한창 항쟁 와중에 나온 글들을 모아놓거나 아니면 그때 이야기하던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 내용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쓸모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굳이 찾아 읽을 마음은 안 생긴다.

    그런데 ‘촛불철학’이란 제목을 달고 몇 주 전에 나온 책만은 한달음에 주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일단은 저자와의 깊은 인연 때문이었다. 이 책의 저자는 황광우다.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다 ‘중앙연수원장’으로 기억하는 그이다. 나는 30대 초를 민주노동당 중앙당에서 보냈는데, 그때 내가 맡은 일이 중앙연수원 상근자였다. 말하자면 <촛불철학>은 내 옛 상사(?)의 저서다.

    하지만 이런 친분만이 그의 새 책에 주목하게 만든 이유는 아니다. 실은 황광우라는 저자명을 단 책들은 꾸준히 나오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스테디셀러인 <철학콘서트>가 있다. 다만 최근 몇 년 동안 낸 책들은 대개 그의 새로운 전공이 된 철학 공부의 산물이었다. 민주노동당의 대표적 사상가로 발언하던 때나 그 전에 ‘정인’, ‘최윤희’ 등의 필명을 쓰며 비공개 사회주의자로 활동하던 때처럼 한국 사회의 쟁점과 변화 방향을 직접 논하는 책들은 아니었다.

    <촛불철학>은 모처럼 서점의 ‘인문’ 코너가 아니라 ‘정치’ 혹은 ‘사회’ 코너에 꽂힌 그의 저서다. 그래서 나는 이 신간이 몹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로 하여금 오랜만에 사회 현실에 관해 발언하게 만든 계기가 촛불혁명이었다니, 더욱 그랬다. 2002년 월드컵 거리 축제를 보며 ‘붉은 악마’ 세대에게 <공산당 선언> 읽기를 권한 그였다(<레즈를 위하여: 새롭게 읽는 공산당 선언>, 실천문학사, 2003). 이번에는 또 어떤 고민거리로 ‘촛불’ 세대에게 말을 걸려는 것일까.

    박근혜-최순실로 정점에 이른 부패의 역사를 폭로하다

    처음 <촛불철학>을 집어 들고 내용을 훑을 때는 조금 당황했다. 책의 형식 때문이었다. 우선 제목에서 연상되는 바와는 달리 촛불혁명 이후에 처음부터 새로 쓴 원고가 아니었다. 과거에 써놓은 원고들, 이미 발표된 것도 있지만 미발표도 꽤 되는 원고들이 한데 묶여 있었다. 다만 산만하게 모아놓은 것은 아니고, 박정희 시대부터 한국 현대사의 흐름에 따라 배열했다. 흥미로운 것은 좀 더 먼 과거를 다룬 글일수록 집필연도도 오래 됐다는 점이다. 그래서 책의 초반부에는 1990년대에 쓴 글들이 많고 후반부에는 2000년대 혹은 최근에 쓴 글들이 많다.

    각 장의 체제도 흔한 형식은 아니다. 본문 격인 다소 긴 글의 뒤에 짧은 글이 여럿 따라 붙는 방식이다. 그런 짧은 글들 중에는 본문에서 다룬 주제를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 다른 각도에서 다시 짚는 것도 있고, 강연 중에 주고받은 대화를 옮긴 것도 있으며, 플라톤의 대화편이나 <도덕경> 같은 고전의 여러 대목을 곱씹는 것도 있다. 이들 짧은 글은 대개 2010년 이후에 쓰였다. 그래서 책 전반에 걸쳐 30대의 황광우가 40대를 거쳐 50대의 황광우가 될 뿐만 아니라 각 장에서도 30, 40대의 황광우가 50대의 황광우와 대화하는 형국이다.

    86세대라면 이런 형식에서 저자의 유명한 스테디셀러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를 떠올릴 것이다. 황광우가 ‘정인’이라는 필명으로 쓴 이 책은 1980년대에 대학생, 노동자의 필독서 중 하나였다. 이 책에는 신문 기사들이 그대로 인용되는가 하면 풍자극 대본을 연상시키는 대화식 서술이 나오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전위적이기까지 한(‘콜라주’라 할까) 입체적 서술 방식을 취한 것이다. <촛불철학> 지면도 그만큼 입체적이다.

    꼭 이런 식이어야 했는지를 놓고 여러 목소리가 나올 수 있겠다. 그러나 적어도 나의 경우는 최초의 의문이 이내 수긍과 몰입으로 바뀌었다. 1980년대의 저자와 1990년대, 2000년대 그리고 가장 최근의 저자가 한 책 안에 공존한다는 게 나름 장점이 있었다. 서로 다른 시간대를 배경으로 한 시각들 사이에는 일관된 맥락도 있지만 묘한 어긋남도 있었다. <촛불철학>은 이런 어긋남을 통해 오히려 새로운 생각의 틈을 열어간다. 저자가 몇 년 전부터 깊이 빠져 지낸다는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의 21세기 한국판 전개라고나 할까.

    가령 책의 앞 2/3 정도에 해당하는 1부, 2부의 본문에서 주로 다루는 주제는 부패다. 부패는 촛불혁명의 가장 직접적인 발단이다. 천만 촛불을 댕긴 도화선은 박근혜-최순실 쌍이 삼성 재벌 등과 함께 벌인 밀실 거래였다. 여기까지는 지난 겨울을 경험한 이들에게 굳이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상식 중의 상식이다.

    그런데 의외로 흔히 보이는 오해가 있다. 박근혜 정권의 부패가 박근혜와 최순실이라는 예외적 인격 때문에 터졌다거나 혹은 좀 더 길게 잡아도 이명박 당선으로 한나라당=새누리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시작됐다는 생각이다.

    <촛불철학>은 박정희, 전두환부터 김영삼, 김대중을 거쳐 노무현 정부까지 쭉 이어진 부패의 역사를 재구성해 이런 오해에 철퇴를 내린다. 부패란 박정희 정권이 키워낸 재벌(특히 ‘삼성’으로 상징되는)의 권력이 유지되는 한, 면면히 이어질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의 기본 틀이다. 이른바 ‘민주’ 세력조차 집권 이후 이를 바꾸기는커녕 투항하고 말았다. 황광우가 ‘한 철학도’로서 물음을 던진 문재인 정부는 과연 이 선례에서 얼마나 벗어날 것인가?

    나이 좀 있는 독자라면, 정주영, 정태수, 김우중, 이건희 등등의 이야기는 알만큼 다 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촛불철학>이 다시 풀어내는 부패의 역사는 새삼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황광우는 1980-1990년대에 널리 읽히던 V. I.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 국역본 중 하나의 번역자이기도 한데, 이 책에서 레닌이 강조하는 혁명 정치의 제 일 과제는 ‘폭로’다. 민중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지배계급이 펼치는 추악한 작태를 ‘폭로’하는 일이다. <촛불철학> 1, 2부는 이런 레닌식 정치 선전의 교과서적 모범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1, 2부를 이루는 글 중 상당수가 실은 1980년대, 1990년대에 이미 발표됐던 것임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이 훌륭한 폭로는 20년, 30년 늦게 독자에게 닿은 것이 아니다. 황광우도 그 대표적인 논자 중 한 명이었던 한국 진보 세력은 한보 사태가 일어났을 때나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이 있었을 때나 늘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지금은 아련한 기억 속의 공식이 된 ‘반독점 반파쇼 민중민주혁명’론이란 게 그런 논리였다. 정권과 재벌의 공동 범죄를 규탄하는 줄기찬 외침이었다.

    이런 폭로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좀처럼 거대한 부패에 맞서 일어서지 않았다. 2016-17년 촛불혁명이 사실상 처음이었고, 이 예외적 궐기가 어떤 실질적인 성과를 남길지는 아직 알 수 없는 형편이다.

    왜 폭로의 정치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는가? 왜 부패의 실상을 다들 알면서도 봉기는 이다지도 지연됐는가? <촛불철학>은 다소 어지러울 수도 있는 낯선 형식을 통해 바로 이 물음에 답한다. 젊은 황광우의 폭로 연설에 오늘날의 황광우가 주석을 다는 형식으로 말이다. 대한민국의 최근 역사를 살아낸, 그래서 그만큼 더 깊이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된 그가 건네는 실마리는 ‘성장주의’의 문제다.

    부패 공화국을 지탱하는 성장주의 동맹을 깨야 한다

    “나는 고뇌했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분명 박정희와 전두환에 대든, 용기 있는 정치인들이었다. 그런데 왜 이분들이 집권하자마자 재벌의 옹호자가 되었는가. 박정희는 갔지만 박정희가 만든 프레임, 성장주의의 프레임은 강고했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독재자들과 싸웠으나, 독재자들이 추진한 성장주의 프레임을 깨지 못했다. 그것이었다.”(<촛불철학> 6쪽)

    서문에서 저자는 이렇게 토로한다. 이 성찰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재벌 비판을 재벌에 맞선 대중정치로 키워내지 못한 진보 세력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는 위 문장들 다음에 이렇게 덧붙인다.

    “나는 오랜 시일 분석한 부정축재의 구조에 관한 나의 글들을 미련 없이 버렸다. 문제를 푸는 열쇠는 성장 프레임에 있었다.” (<촛불철학> 6쪽)

    흔히 ‘성장주의’를 문제 삼으면, 경제 성장을 둘러싼 번잡한 경제학 논의가 따라붙는다. 이런 논란의 수렁에 빠지지 않으려면, 여기에서 말하는 ‘성장주의’가 권력의 재생산 문제이고, 사회 세력들 사이의 동맹(과 대립)의 문제이며, 대중 이데올로기의 문제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특히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 성장주의 동맹이라 불릴 만한 세력 균형이 존재하고 작동해왔다는 점이 중요하다.

    정권과 재벌은 부패 동맹의 두 머리이면서 동시에 성장주의 동맹의 두 사령탑이다. 대중은 부패 추문이 터질 때마다 정확하게 둘을 향해 손가락질하지만, 자신들의 살림살이는 주저 없이 둘의 지휘에 맡긴다. 정권과 재벌 대기업이 나서서 양적 성장을 이어가면, 이에 따라 일자리가 보장되고 자산 가격(집값)이 지속 상승한다. 이 전제를 철석같이 믿는 대중은 일자리 사다리의 좀 더 높은 계단을 바라보며 입시 교육 경쟁에 뛰어들고, 대도시에 부동산 몇 채 소유해 중산층의 삶을 보장받으려 한다. 이것이 지난 한 세대 동안 한국 사회의 가장 강력한 신앙(혹은 ‘코리안 드림’)이었다.

    ‘권력 = 폭력 + 동의’라는 이탈리아 사상가 A. 그람시의 공식을 한국에 적용한다면, ‘폭력’과 쌍을 이루는 게 ‘부패’고 ‘동의’의 자리에 들어갈 게 ‘성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람시는 권력이 피지배층의 자발적 동의를 얻는 데 성공한 상태를 ‘헤게모니’라 칭했다. 한국 사회에서도 이제껏 이런 헤게모니가 지속된 셈이다. 그 토대는 지배 세력의 부패가 수반하는 균열을 항상 ‘성장’ 신앙을 통해 성공적으로 봉합해온 성장주의 동맹이었다.

    <촛불철학>의 제3부는 이 성장주의 동맹을 깨자는 호소다. 한국 사회를 그와는 다른 방향으로 이끌 새로운 연대를 구축하자는 이야기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성장주의의 대안으로 탈성장주의를 들이미는 식으로 논의를 끌고 가지 않는다. 그런 논의는 자칫 도덕적 당위의 강변으로 끝나기 쉽다. <촛불철학>은 그보다는 성장주의 동맹을 잇는 중요한 고리들(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노동시장, 입시 경쟁 교육, 부동산 투기, 대도시 과밀과 농촌 붕괴 등등)을 살피고 각 고리에 맞는 구체적 처방을 고민한다.

    황광우가 결론으로 제시하는 해법 중에는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정책들과 겹치는 내용도 상당히 있다(가령 최저임금 시급 1만원, 입시 폐지 등). 다만 주목해야 할 것은 관련 글들의 집필 시기다. 제3부를 이루는 글 중 상당수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기인 2000년대 초반에 쓰였다. 현재는 대다수 촛불 시민의 상식이 된 내용이 이 시기에는 아직 일부의 낯선 주장이었다. 황광우는 바로 그런 선구적 제안자 중 한 사람이었다. 저자 자신이 오늘날 우리의 상식이 만들어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고, <촛불철학> 제3부는 그 살아 있는 기록이다.

    게다가 <촛불철학>은 각 분야의 개혁을 실현해서 결국 도달해야 할 전반적인 대안의 방향을 선명히 제시한다. 성장주의가 ‘좋은 삶’의 모습이라고 우리 머릿속에 새겨놓은 것과는 전혀 다른 ‘좋은 삶’의 비전 말이다. “초가집 없애서” 더 많은 아파트 단지를 세우고 “마을길 넓혀서” 더 많은 자동차로 길을 꽉 채우는 게 잘 사는 삶이라고 여기는 한, 성장주의 동맹은 무너질 수 없다. 달리 살아보려는 욕망이 강해져야만, 개별 개혁 성과들이 모여 새로운 연대가 구축될 수 있다.

    황광우가 제시하는 ‘좋은 삶’은 노동하는 삶, 연대하는 삶, 끊임없이 학습하는 삶이다(<촛불철학> 179-182쪽). 모두 함께 되도록 짧은 시간 일하고, 늘어나는 자유시간 동안 창조하고 봉사하며 배우는 삶이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노동시간과 자유시간의 분배를 획기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촛불철학>이 가장 강조하고 또한 최종 결론으로 내세우는 대안이 ‘주3일 노동’이다.

    주3일 노동 정도로 노동시간을 대폭 단축하자. 노동시간을 줄이는 만큼 일자리를 늘려 비정규직, 청년 실업 문제를 해결하자.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 아래, 그리고 복지가 확대되고 교육, 주거 문제가 해결된다는 전제 아래, 모두가 주2일-주4일 사이에서 노동시간을 선택하자. 그렇게 되면 실은 정규직에 비해 차별받는 비정규직뿐만 아니라 지금 같은 정규직도 사라지는 셈이다. 남는 것은 오직 노동하고 연대하며 학습하는 동등한 남녀 시민일 것이다.

    일상에서 촛불의 시간이 반복되게 하라

    이것이 반유신 민주화 투쟁과 함께 시작된 한 진보 사상가, 운동가의 여정이 다다른 결론이다. 압축 성장이 엊그제 같은데 곧바로 조로화에 접어든 한국 자본주의와 부대껴온 한국 좌파의 한 결론이다. 40여 년 넘게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고 가장 강력한 적인 재벌 권력에 맞서면서도 왜 이 권력에 도전하는 대중적 흐름을 만들기 쉽지 않은지 끊임없이 고민해온 끝의 결론이다. 그것은 칼 마르크스가 <자본> 3권 마지막에서 꺼내놓는 결론처럼 노동시간의 단축이고 자유시간의 확대다.

    물론 황광우가 제안하는 주3일 노동은 더 많은 토론이 필요한 쟁점이다. 실제 실현하려면 어떤 세밀한 전략이 필요한지도 아직은 모호하다. 그래서 아주 먼 미래의 목표 정도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제안이 촛불혁명 이후의 우리에게 더없이 적절한 고민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촛불항쟁 중에 우리는 늘 ‘광장’이라는 공간에 주목했다. 우리를 자유인이게 하는 그 공간에 전율했다. 그러나 공간이 중요하다면, 시간 또한 중요하다. ‘광장’만큼 중요했던 것은 수백만의 시민들이 기꺼이 축제를 향해 열어놓은 저마다의 시간이었다. 매주 수백만의 ‘토요일’이 모여 역사라는 거대한 시간 흐름을 구부렸다.

    우리의 일상 속에 그때의 ‘광장’이 반복되어야 하듯 그 ‘토요일’역시 반복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 ‘토요일’이란 너무도 오랜만에 모처럼 함께 창조하고 서로 소통하며 무한히 학습한 시간 아니었는가. 자유시간 말이다. <촛불철학>은 이 자유시간을 사유하고 상상하고 쟁취하자고 제안한다.

    비록 지면으로나마 나는 이 제안에 기꺼이 제청의 손을 높이 든다.

    필자소개
    정의당 미래정치센터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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