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반기 농사와 백중놀이
    [낭만파 농부의 시골살이] 7월 농촌
        2017년 07월 19일 03:1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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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중순, 들녘은 검푸르다. 개중에서도 모를 낸 지 달포를 훌쩍 넘긴 논배미. 한 줄기 바람이 불 때마다 파도가 넘실댄다. 길손들 눈에는 뚜렷이 보였을 그 풍경, 정작 농부는 뒤늦게야 깨닫는다. 내내 논바닥을 기느라 쳐다볼 겨를이 없던 그 정경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거다.

    엊그제, 모내기에 뒤 이은 전반기 벼농사가 마무리됐다. 짧은 기간 고된 노동이 꼬리를 문 숨 가쁜 시절이었다. 여기저기 논배미에 널려 있는 빈 모판을 거둬들이고, 벼 포기가 뿌리내리기를 기다려 땜질(보식)을 하는 모내기 후반작업이 첫 단계다.

    이어 일이 고되기로 첫손에 꼽히는 김매기. 물론 관행(화학)농법의 경우 제초제로 풀을 죽이니 김을 맬 일은 없다. 그러나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생태농사는 얘기가 달라 물리적인 제초법을 쓰게 된다.

    다행히 10년 전 쯤 ‘우렁이 농법’이 국내에 도입되면서 제초노동이 크게 줄었다. 열대지방에서 들여온 왕우렁이의 풀을 뜯어먹는 생태를 활용한 제초법이다. 문제는 물을 넉넉히 대주지 않으면 먹이활동이 어렵다는 점. 써레질이 고르지 못해 논바닥이 솟은 곳이 그렇다. 올해처럼 가뭄이 심해 논에 물을 대지 못해도 사정은 마찬가지.

    이런저런 사정으로 왕우렁이가 풀을 뜯어먹지 못하게 되면 ‘물리력’을 끌어댈 수밖에 없다. 논풀 발생 초기에는 논바닥을 긁어내는 농기구를 써서, 물달개비 따위가 빽빽하게 올라온 경우는 동력제초기를 써서 중경제초(잡초를 갈아엎어 흙속에 파묻는 제초법)를 한다. 그래도 살아남은 논풀은 맨손으로 매주는 수밖에 없다. 이름하여 김매기.

    올해는 엿새, 노동시간으로는 22시간 남짓 김매기에 매달렸다. 보름 쯤 걸린 지난해에 견줘 크게 선방한 셈이다. 유기농 벼농사 연수생(멘티)인 호철 씨도 한몫 톡톡히 한 결과다.

    모내기와 김매기 등 전반기 농사의 모습들

    벼농사의 최대고비라 할 김매기를 그렇게 넘기고 나니 웃거름 주는 일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차남호식 농법’은 거름, 특히 질소 성분을 되도록 적게, 수확하기 훨씬 전에 주는 게 원칙이다. 소출은 떨어지지만 질소 함량을 낮춰 밥맛을 좋게 하려는 뜻이다. 모내기하고 30일 쯤 지난 뒤 인산(P)이 많이 함유된 구아노 성분의 천연비료를 적정량 뿌려주는 게 나름의 시비법이다.

    오랜 가뭄과 긴 장마가 번갈아 찾아온 올해는 애를 많이 먹었다. 하긴 올해만이 아니고 기후변화가 닥친 이래 해마다 되풀이 되는 양상이다. 한낮엔 섭씨 33도를 우습게 넘기니 숨이 막히고, 일 좀 할라치면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려서 낭패였다. 그러니 장대비를 무릅쓰고 웃거름을 뿌리기도 했다.

    그렇게 전반기 농사를 끝냈다. 사실상 올해 벼농사는 2/3 넘게 지은 셈이다. 앞으로는 논두렁 풀 베어주고 논물 관리하면서 수확에 대비하면 될 것이다. 병충해가 변수가 되겠지만 농약을 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벼가 잘 버텨주기만 바랄 뿐이다.

    한 달 정도 당긴 ‘양력 백중놀이’

    이렇게 전반기 농사를 마치고 나니 때마침 7월 중순이다. ‘때마침’이라 함은 백중놀이를 두고 하는 얘기다. 백중은 본래 음력 7월 15일이다. 올해는 윤달이 끼는 바람에 9월 초가 되지만 보통은 8월 중순에 해당한다. 옛 사람들은 이날 ‘백중놀이’라는 이름의 잔치를 벌였다. 고장에 따라서는 ‘호미걸이’ ‘호미씻이’ ‘술멕이’라고도 한다.

    예전에는 수리시설이 시원치 않아 논풀이 많이 올라왔고, 제초기법 또한 호미 한 자루로 논바닥을 긁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애벌-두벌-세벌은 김을 매야 했다. 바로 세벌 김매기가 끝나는 게 백중 즈음이라 이 때는 호미를 씻어서 걸어두고, 술과 음식을 마련해 일꾼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잔치를 벌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왕우렁이가 그 수고를 대신하고, 제초기계의 힘도 빌릴 수 있으니 백중까지 갈 것도 없이 7월 중순에는 김매기가 마무리된다. 백중에 맞춰 잔치를 벌이자면 한 달을 더 기다려야 하는 셈인데 목 빠지기 딱 알맞다. 요행히 참고 기다릴 수 있다고 치더라도 그 때 가서 무슨 명분으로 잔치를 벌인단 말인가.

    ‘핑계’라는 게 있다. 억지로 꿰어 맞춘다는 부정의 뜻이 강하지만 좋은 방향으로 써 먹으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 싶다. 어차피 핑계를 대자면 한 달이나 기다려서 할 게 아니라 당장 하는 게 낫다. 그래서 우리 벼농사모임은 ‘양력 백중놀이’를 창안했다. 그러께 시작해 세 번째인 올해는 다음 주 말로 예정돼 있다.

    복달임처럼 무턱대고 먹고 마시기는 눈치가 보여 ‘논배미 투어’라는 ‘고명’을 얹었다. 벼농사모임 회원들이 붙이고 있는 논배미를 떼 지어 둘러보며 작황도 살피고, 정보도 나누는 프로그램이다. 저녁부터는 물론 먹고, 마시고, 노는 잔치판이고.

    그런데 노는 것도 궁리를 해야 한다. ‘놀 궁리’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나로서도 이태씩이나 같은 머리를 굴리다 보니 재미가 떨어진 것 같다. 흔히 ‘식상하다’거나 ‘메너리즘에 빠졌다’는 현상 말이다. 같이 머리를 맞댄 이들 또한 ‘구닥다리’였다는 점에 생각이 미치니 확 바꾸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해서 올해는 모임의 ‘젊은 피’들에게 잔치판을 맡기기로 했다. 그리고 그제 밤, ‘웃거름 주기 다 끝낸 기념으로’라는 핑계로 ‘벙개’를 때렸다. 사실 잔치 기획을 맡은 삼십대들을 북돋우고 힘을 보태주자는 속셈이 컸다. 자연스레 지난 두 번의 잔치판에 대한 품평이 오가고, 올해는 어떻게 가닥을 잡을지도 검토했다. 모임의 ‘맏언니’ 격인 희선 씨가 “식사 준비는 내가 맡겠다”는 뜻을 밝히는 바람에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국은 그리 되었다.

    시골에 살다보니, 그리고 농사를 짓고 살다보니 노는 것에 집착이라 할 만큼 목을 매게 된다. 고단한(?) 노동에 대한 보상심리일 수도 있고, 문화적으로 소외된 현실에 대한 갈증일 수도 있다. 그렇게 용을 써봤자 펼쳐지는 그림은 뻔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그래도 자본이 만들어 대량소비를 강요하는 ‘기성제품’에 비견할까.

    내가 삼십대 청춘들의 감성 터지는 작품을 목을 빼고 기다리는 이유다.

    양력 백중놀이의 다양한 모습들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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