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지국가 모델 스웨덴,
    점차 성장하는 극우정당
    [유럽 극우파]스웨덴 민주당의 전략
        2017년 07월 18일 12:3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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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9월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의 정권 재탈환만큼 주목받은 것은 극우정당인 스웨덴 민주당(SD)이었다. 2010년 총선에서 반(反)이민 광고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단숨에 20석(5.8%)을 획득하며 원내진출에 성공한 민주당은 당의 색깔을 새롭게 입히기 시작했다.

    반이민주의와 극우노선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직접적인 인종혐오나 반유대주의는 거리를 두었다. 독일의 극우정당인 AfD와 유사한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이런 변신은 급성장하고 있는 유럽 극우정당들의 공통된 일종의 전략이었다. 이를테면 일부 극우정당들이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공개적으로 부정하는데 반해, 그들과는 선을 긋는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이들의 전략이었고 민주당도 예외는 아니었다.

    2014년 총선에서 민주당은 이전 의석의 두 배가 넘는 49석(13%)을 획득하면서 일약 제3당으로 올라섰다. 집권 보수당(Moderate Party)이 잃은 의석(23석)의 대부분을 민주당이 차지하면서 약진한 탓에, 사민당은 단 한 석을 추가하는데 그쳤지만 제1당을 차지하는 당혹스러운 성적표를 받아야만 했다.

    사민당은 녹색당과의 연정에 합의하면서 내각 6자리를 내어주고 좌파당의 지지를 확보했지만 과반수에 미치지 못하는 소수연정에 불과했다. 사민당 정부는 보수당과 민주당의 협공으로 총선 직후부터 조기총선에 시달리며 개혁법안의 처리가 좌절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인종혐오와 반유대주의를 배격한 극우정당

    스웨덴 민주당은 기존의 군소정당인 스웨덴당(SP)을 발전적으로 해소하면서 새롭게 탄생했다. “스웨덴 사람이 스웨덴을 지키자”를 전면에 내세울 정도로 출발부터 극우정당의 색채를 분명히 했다. 1988년 창당 직후 실시된 총선에서 민주당은 1천여 표를 획득하는데 그치며 스웨덴의 반 극우정서를 실감했다. 전략을 바꾼 민주당은 도시와 동떨어진 어촌이나 농촌지역을 집중 공략했다. 오랫동안 진보적인 의식에 익숙한 도시의 유권자들 대신에 경기변동에 민감한 농어촌 지역을 상대로 지방의회에 진출하는 전략을 추진했다.

    1994년 지방선거에서 일부지역에서 당선자를 배출하며 작은 발판을 마련했지만 여전히 전국지지율은 1%를 넘지 못하자 당의 주요 간부들의 화살은 지도부를 겨냥하기 시작했다. 1995년 그동안 당을 이끌던 앤더스 클라스트롬(Anders Klarstrom)이 물러나고 미카엘 얀손(Mikael Jansson)이 대표의 자리에 올랐다.

    얀손의 등장은 다소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얀손은 농민정당인 중도우파 중앙당(Central Party) 출신이었다. 얀손은 스톡홀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외레브로(Orebro) 광역시의 부대표를 맡고 있으며 하원의원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는 차세대 리더 중의 한명이었다. 얀손이 민주당에 입당한 것은 1993년이었다. 자발적인 입당이라기보다는 원내진출을 목표로 하고 있는 민주당이 중량감 있는 인물을 영입한 케이스였다. 얀손의 경험은 당내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고 불과 2년 만에 30살의 나이로 당권을 거머쥐며 세대교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98년 총선에서 0.4%를 득표하며 지도부를 곤혹스럽게 했지만 지방선거에서는 의원을 늘려가며 약진했다. 2002년 총선에서 1.4%를 득표하며 성공도 실패도 아닌 성적표를 받게 되자 선거평가를 놓고 당내 논쟁이 불붙었다. 한쪽에서는 근본주의자들이 극우노선을 더 분명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얀손의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고, 다른 쪽에서는 시대에 맞는 대중노선이 원내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이라며 반박하고 나섰다.

    여전히 30대의 젊은 나이지만 얀손은 카리스마를 내세워 당을 장악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얀손은 근본주의자들을 비난하면서 대표 자리를 사임했다. 근본주의자들은 대부분 젊은 당원들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그에 맞서 대중노선을 주장하며 두각을 나타낸 임미 오케손(Jimmie Akesson)은 20대 중반의 젊은 리더였다. 얀손의 엄호 속에 20대의 청년이 극우정당의 지도자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스웨덴 민주당 지도부들. 앞 왼쪽 두번째가 임미 오케손, 뒤 왼쪽 첫번째가 원내대표 리처드 욤표프

    연금 생활자 지원을 강조하는 극우정당

    10대 시절 오케손이 선택한 정당은 사민당의 유일한 대항마인 중도우파 보수당(MP)이었다. 오케손이 경험한 보수당의 청년조직인 민주청년동맹(MYL)은 우파로서의 새로운 길을 찾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 이미 노쇠한 조직으로 전락해 있었다. 오케손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제 막 발을 내딛고 있는 민주당이었다. 오케손이 당에 들어왔을 때는 창당을 주도하던 세력과 새로운 흐름이 대립하던 시기였고 혼란의 과정에서 당 밖에서 영입된 얀손이 당 지도부로 부각될 때였다. 오케손은 연방조직처럼 흩어져 있던 청년조직을 하나로 모으는 흐름에 참여했고, 당의 전국적 청년조직(SDU)을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청년조직의 지도자로 떠오른 오케손은 원내에 진출해 어떻게 극우정치를 실현할 것인가에 천착했다. 당의 지지율이 답보를 벗어나지 못하고 얀손 대표가 위기에 몰렸을 때 오케손은 근본주의자들과 전면전을 선택했다.

    오케손은 “스웨덴 사람이 스웨덴을 지키자”라는 당의 노선이 지켜야할 가치이지만, 그것이 홀로코스트를 부정하거나 인종주의로 나아가서는 안된다고 역설했다. 요컨대 반 이민주의와 반 이슬람주의는 당이 추구해야 할 노선이지만 인종주의는 우리으 길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오케손은 당내에서 공공연하게 인종주의와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세력을 축출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당 대표를 맡은 이듬해인 2006년 총선에서 민주당은 원내 진출에 실패했지만 2.9%라는 비약적인 결과를 획득했다. 오케손은 선거기간 동안 민주당은 “극우정당이 아니라 새로운 우파정당”이라고 주장했다. 오케손의 주장은 새로운 발상이 아니었다. 극우정당인 독일 AfD도 유사한 전략을 취하며 성장했고, 프랑스의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의 르펜도 필요할 때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차용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경기침체의 원인을 이민자에게 돌리는 동시에, 반유대주의와는 선을 그으며 새로운 우파정당이라는 교묘한 논리는 당 지지율을 두 배로 끌어올리며 2010년 마침내 원내에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스웨덴 민주당도 다른 유럽의 극우정당들과 마찬가지로 (극우)민족주의, 반이민주의, 유럽회의주의(유럽연합 탈퇴), 유로존 가입 반대 등을 강령으로 명시하고 있다. 유로존 가입 반대를 강령에 포함하고 있는 것은 스웨덴은 유럽연합 가입국이지만 유로화를 사용하지 않고 자국 화폐인 크로나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내세우고 있는 강령 중에 독특한 것은 노인 학대에 대한 가중처벌과 연금 생활자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자는 것이다. 극우정당과 중도우파정당들이 예외 없이 연금 삭감을 주장하는 것에 반해, 민주당은 거꾸로 강화하는 노선을 채택하고 있다.

    스웨덴 좌파는 지금

    복지국가의 모델인 된 오늘날의 스웨덴을 만든 것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사회민주당(SAP)이다. 사민당은 2006년부터 8년간 보수당에게 정권을 내주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2014년 총선에서 재집권에 성공했지만 80년대 이후 단 한 번도 단독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문젯거리였다. 2014년 총선에서 제1당을 차지했지만 중도좌파 성향의 녹색당(Green)의 지지에도 과반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는 소수정부를 구성해야만 했다. 불안한 소수정부는 불과 두 달 만에 이듬해 예산이 부결되면서 스테판 뢰프벤 총리의 사퇴와 조기총선의 위기까지 내몰렸다.

    사민당의 집권은 지지율을 다시 회복한 것이 아니라 중도우파 정당인 보수당의 지지가 극우정당인 민주당으로 이탈하면서 나타난 어부지리에 가까웠다. 내년 총선에서 제1당의 자리를 유지하는 것은 가능할 전망이지만 유럽을 강타하고 있는 극우 바람에 힘입어 민주당이 더 약진할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연정 구성을 둘러싼 대규모 교착정국이 일어날 전망이다.

    제3당 자리를 민주당에 내주었지만 녹색당은 꾸준히 성장하며 탄탄한 지지기반을 유지하고 있다. 녹색당은 좌우의 공세 속에서도 2014년 총선에서 25석(6.9%)을 차지하며 사민당의 소수정부의 한축을 담담하고 있다. 당 공동대표인 이자벨라 로빈(Isabella Rovin)이 부총리, 19세에 국회의원에 당선돼 화제를 모았던 구스타프 프리돌린(Gustav Fridolin)이 교육부장관을 맡고 있다.

    사민당의 왼쪽에 위치하며 집권 사민당의 우회전을 경고해왔던 좌파당은 1998년 총선에서 이전의 지지율을 두 배로 끌어올리며 43석(12%)을 차지하며 일약 사민당의 대안정당으로 떠올랐다. 90년대 중반 스웨덴에도 상륙한 신자유주의 그림자는 사민당의 우경화를 부추겼고, 복지정책의 혼선을 일으켰다. 의심에 찬 눈초리로 지켜보던 사민당 지지자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제1당을 지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수십 석의 의석을 상실했다.

    좌파당이 1998년 총선에서 약진한 것은 그동안 주장해왔던 급진적인 구조개혁의 목소리가 어느 정도 호소력을 가진 탓도 있었지만, 사민당이 놓치고 있는 여성주의와 소수자주의에 천착한 이유도 크게 작용했다.

    좌파당이 구조개혁과 노동의제에만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의제에 개입하면서 저변을 확대한 것은 당의 지도자를 맡고 있던 구드룬 휘만(Gudrun Schyman)의 영향력이 컸다. 하지만 급성장한 당은 사민당의 빈틈을 파고들기는커녕 과거로 돌아가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당내 논쟁이 반복됐다. 구르룬 휘만은 당을 떠나 새로운 길을 모색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당의 지지율은 지속적으로 하락했고 2010년 총선에서는 지지율이 반 토막 나면서 위기는 현실로 다가왔다.

    2012년부터 좌파당을 이끌고 있는 인물은 요나스 회스테트(Jonas Sjostedt)이다. 회스테트는금속노동자로 일하다가 유럽의원에 당선돼 유럽의회에서 줄곧 활동해왔다. 유럽의원을 그만둔 후로는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사회당에 당적을 두고 좌파정치의 연구와 저작에 몰두했다. 2010년 총선을 앞두고 당의 요청으로 스웨덴에 돌아와 원내에 진출했고 당의 재건을 책임질 새로운 인물을 찾는 과정에서 다양한 경험이 높은 평가를 받아 당을 이끌게 됐다. 당내 적이 없다는 것과 다양한 이력이 장점을 평가받고 있지만 국내정치에서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 의문부호로 따라붙고 있다.

    한 행사에서 페미니스트정당 F!의 지도자인 구드룬 휘만(사진 오른쪽)이 자선경매를 하고 있다

    좌파당을 탈당한 구드룬 휘만은 2005년 기존의 페미스트 운동가들과 함께 페미니스트 정당인 F!(Feministiskt initiativ)를 창당했다. 2006년 총선에서는 예상보다 초라한 성적표를 받으면서 회의론이 대두되기도 했지만, 2010년 지방선거와 유럽의회 선거에서 당선자를 배출하면서 지지기반을 늘려갔다. 2014년 총선에서는 여론조사와 달리 진입장벽인 4%를 아깝게 넘지 못하면서 원내진출은 다음 총선으로 미뤄졌다.

    회의론까지 불거졌던 창당 초기와 달리 F!가 점진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페미니즘만 강조하던 노선에서 벗어나 노동과 생태의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결과였다. F!는 여성들(만)의 당이 아니라 여성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당이라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당원의 규모는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차기 총선에서 원내진출이 확실시되고 있는 F!는 새로운 대안정당으로 주목받고 있다.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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