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교 입학 등록금을 해결하다
    [누리야 아빠랑 산에 가자⑲] 상근자
        2017년 07월 12일 02:4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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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ECD 경제협력개발기구 34개 회원국은 대부분 12년 의무교육이었다. 미국은 초·중·고 90%가 공립학교인데 수업료가 무상이었다. 영국과 독일은 입학금도 무료고 교과서도 지원했다. 프랑스는 통학비도 지원했다. 북유럽은 학용품도 무료였다. 심지어 독일,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 등 많은 나라들은 대학교까지 무상교육을 실시했다.

    모든 구성원에게 공평한 교육 기회를 제공한다는 취지였다. 교육을 통해 쌓이는 지식은 그 사회의 자산이 되므로 당연히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OECD 회원국이자 세계 GDP(국내총생산) 순위 10위권의 대한민국은 아직도 요원했다. 교육에 들어가는 상당한 비용을 당사자나 가족이 부담해야 한다.

    “카드 쓴 게 나가니까 35만 원밖에 안 남았더라고. 그거라도 보낼게. 다 못 보내 미안해.”

    KBS노조 위원장 등을 역임했던 현상윤 선배였다. 닷새 전 그에게 100만 원을 부탁한 상태였다. 딸의 3분기 등록금 납부 마감일을 지키고, 또 이달 생활비에 보태기 위해서였다. 오히려 미안하다는 그가 거듭 고마웠다.

    새로 적을 옮긴 민주노총도 3개월 체불 상태였다. 전임 집행부가 만들어 놓은 상황이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전태일재단에서 민주노총까지, 활동비 못 받은 상태가 10개월째였다.

    전태일재단은 재정이 열악했다. 근근이 꾸려가는 처지였다. 매월 1만 원 안팎을 정기적으로 기부하는 후원회원 숫자는 얼마 안 됐다. 지원금 보태는 데도 몇 곳에 불과했다. 필수 활동을 감당하기에도 역부족이었다. 그러다 작년 초부턴 최악으로 치달았다. 하는 수 없이 상근자 넷은 활동비를 3분의 2로 깎았다. 깎기 전 내 활동비는 4대 보험 제외하고 160만 원이었다. 몇 달을 버티다 난 결단했다. 4대 보험만 처리한다는 조건으로 내 활동비를 반납했다.

    넷 다 어렵게 버티느니 나 하나 뒤집어쓰고 말자는 치기였다. 그나마 주변머리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셋의 활동비는 원상태로 회복됐다.

    대형 사고를 친 것이었다. 내 활동비가 가족에겐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다. 아내는 활동비를 엄두도 낼 수 없는 풀뿌리운동을 하고 있었다. 나는 매달 여기저기 손을 벌려야 했다. 딸 등록금도 마련해야 했다. 나이 먹어 손 벌린다는 게 쉽지 않았다.

    겉으론 의연했으나 속은 썩어 문드러졌다. 돌멩이가 숨구멍을 틀어막는 듯한 고통에 몸서리치기도 했다. 후회 없는 죽음을 살기 위해 운동가로 일생을 마쳐야 한다는 완고한 고집이 아니었다면, 이따위 문제로 무너지지 않겠다는 독기가 아니었다면, 아마 아무 데나 털썩 주저앉았을 것이다. 아니, 실은 화장실 구석에 쪼그려 앉아 꺼이꺼이 통곡한 적이 있었다. 소리가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입술을 깨물고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지인들의 조사를 챙길 수 없었던 것은 아렸다. 노동운동 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마당발이었다. 수시로 부고가 날아들었다. 1주에 3건 이상 날아든 적도 많았다. 애써 모르는 척 넘어가야 했다. 지인들에게 참 미안했고, 내가 참 초라했다.

    도움 준 이들은 대개 나처럼 노동운동 하느라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이들이었다. 안정되게 활동비를 받고 있다는 점만 달랐다. 내가 손 벌릴 때, 그들은 자신의 빈한한 형편과 부족한 씀씀이를 고민했을 터였다. 그럼에도 흔쾌히 손을 잡아 주었다.

    뜻밖의 일화가 있었다. 활동비 중단이 3개월째로 접어든 작년 12월 26일이었다. 프레스센터 커피숍에서 이강택을 만났다. 언론노조 위원장 출신의 KBS PD였다. 왜곡 보도를 강요하는 정부와 경영진에 밉보여 여의도 본사에서 수원으로 쫓겨난 상태였다. 이강택과 나는 각종 사회운동 활동가들의 연결망을 구상하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내 휴대폰이 진동했다. 낯선 번호였고 중년 여성의 목소리였다. 시사주간지 구독을 권유하는 내용으로 이따금 걸려오는 종류의 전화였다. 당장은 어렵고 형편이 나아지면 구독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언론사의 딱한 사정을 설명하며 끈질기게 권유했다. 쉽게 포기할 기미가 아니었다. 답답했으나 역정 낼 순 없었다. 온종일 전화기 붙들고 감정 노동에 시달리며 구독 실적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비정규직일 게 틀림없었다.

    “제 딸이 요번에 고등학교 입학하는데 등록금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난감해서 쩔쩔매는 중입니다.”

    처지를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다가 무심결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제야 그녀는 죄송하다며 통화를 끊었다. 물 한 모금 마시고서 중단된 대화를 이으려 했다.

    “등록금 얼마야”

    “아내가 50만 원 미리 준비하라고 하더라고요.”

    이강택은 물었고, 나는 또 무심히 대답했다.

    “지금 빨리 계좌 번호 불러 봐.”

    “아, 아니, 괜찮아요. 형님.”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이강택은 말했고, 당황한 난 손사래 쳤다. 도움 받으려는 의도로 만난 자리가 아니었다.

    “야, 난 너보다 형편 되니까 잔말 말고 빨리 불러.”

    가벼운 실랑이가 반복되다가 이강택의 호의에 꺾였다. 통장을 아내가 관리해서 계좌 번호를 못 외우고 있었다. 나중에 아내한테 확인해서 문자로 찍어주기로 했다. 그러고도 한동안 계좌를 보내지 못했다. 이강택에게서 독촉 전화가 왔다. 며칠 뒤에 아내는 통장에 50만 원이 찍혔다고 했다. 그렇게 딸의 고등학교 입학금과 첫 등록금을 납입했다. 입학금 1만4,000원에 수업료 36만2,700원이고, 학교 운영 지원비 84,000원, 교과서 대금 8만9,320원으로 총 55만120원이었다. 급식비는 별도였다.

    필자소개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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