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고종, 광장을 봉쇄하다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이야기] '만민공동회'와 집회
    2017년 07월 03일 10:3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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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 전 회의 글 ‘지중해와 해중지의 경계’

대한민국 헌법 21조 1항,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모두가 알고 있고,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민주주의의 대원칙이자 헌법적 가치이다. 하지만 지난 겨울 서울의 광장과 거리에 나왔던 많은 이들이 경험했듯 이 대원칙은 집회와 결사가 이루어지는 시간과 공간, 내용과 방식, 그리고 질서유지와 공공복리의 실현이라는 여타의 다른 조건들에 의해 제한되기도 한다.

물론 집회와 결사를 통해 자신의 권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권익 역시 존중되고 배려되어야 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실천하려는 세력과 이를 제한하려는 세력 사이의 대립은 언론·집회·결사의 구체적인 행위가 발현될 수 있는 공간을 둘러싼 갈등과 투쟁으로 전개되어왔다. 이번 칼럼은 1898년 서울을 뜨겁게 달구었던 만민공동회의 거리의 정치와 집회에 공간적 제약을 둠으로써 도시민들의 정치참여를 제한하려했던 대한제국 정부의 대응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독립공원: 새로운 시민사회 만들기의 현장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붕괴시키는 한편 조선의 근대개혁운동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파 지식인들은 청일전쟁 이후 달라진 국내외 정세 속에서 그들이 추진하는 개혁운동에 대한 인민의 공감과 지지를 얻고자 1896년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계몽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상을 사는 서울의 주민들은 청일전쟁이 가져다 준 조선의 독립과 새로운 출발을 감각할 수 없었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고종이 조선의 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에서 정부를 보는 조선의 불안한 정치적 상황일 뿐, 자주독립의 어떠한 실체도, 혹은 징표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립공원은 바로 이러한 배경 속에서 등장했다.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파 지식인들은 청일전쟁 이후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치적 변화를 서울의 도시공간에 가시화하기 위해 독립문과 독립관, 그리고 독립공원의 건립을 추진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독립공원은 과거 중국의 사신을 영접하던 서대문 밖 영은문과 모화관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관을 설치하면서 그 주변을 공원으로 꾸민 것이다. 건립사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서재필은 도시민들이 산책과 휴식을 즐기고 강연이나 시사문제에 대한 연설을 들을 수 있는 장소로 공원을 계획했다. 그는 당시 문명화된 도시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공원을 조선의 수도인 서울에 조성함으로써, 조선도 문명의 단계에 들어설 준비가 되었음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왼쪽부터 차례로 청일전쟁 직후 허물어진 영은문의 기둥 초석, 독립관, 독립문

협회의 지도부는 조선의 새로운 출발을 상징하는 공간을 만드는 작업에 적극적으로 인민을 동참시켰다. 즉 ‘조선이 자주 독립된 것은 정부에게만 경사가 아니라 전국 인민의 경사’라며, 독립문과 독립관 및 공원부지 건설을 위한 전국적인 모금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협회는 독립신문을 통해 독립문 건립 성금을 독려하고 보조금 헌납자의 명단을 발표하며, 인민의 더 많은 참여를 유도했다. 독립문 정초식 행사가 서울의 다양한 계층을 초청한 가운데 공개로 진행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수도 서울의 도시공간에 개개인이 기부한 돈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기념물이 만들어지는 현장을 보는 것 자체가 이들에게는 새로운 구경거리, 하나의 스펙터클이었을 것이다.

이후 자금 부족으로 애초의 계획대로 완성되지 못한 독립공원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토론회였다. 협회 지도부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강연과 토론을 통해 인민에게 정치와 사회에 대한 관심을 유발하고 그들 사이에 여론을 만들어낼 목적으로 토론회를 도입했다. 토론회의 인기는 빠르게 퍼져나갔다. 토론회가 열리는 날이면 서대문 밖 독립공원으로 향하는 길은 도시의 새로운 구경거리를 보기 위해 나온 몇 천 명의 도시민들로 북적였고, 독립공원의 토론회는 어느새 서울을 방문하는 지방민에게 하나의 명소가 되었다. 그 가운데 협회의 회원들과 청중들은 당시 조선의 상황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다양한 주제에 대한 서로의 견해를 교환하고 찬반을 다투는 과정을 통해 정치에 대한 관심과 정치참여에 대한 의식을 높여갔다.

거리의 정치: 말의 길, 언로(言路)를 열다

도성 밖 독립공원이 독립협회 지도부와 서울 도시민들에게 운명공동체의 일원임을 인식하고 정치적 의사결정을 학습하는 장이었다면, 도성 안 서울은 현실 정치의 중앙 무대였다. 따라서 토론회를 통해 높아진 정치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현실의 정치공간에 참여하고자 했을 때, 도성 안으로의 진출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당위의 문제였다. 1898년 3월 독립협회가 사대문 밖 독립공원을 떠나 문안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한 사건은 곧 이들이 정치에 입문(入門)하였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3월 10일, 독립협회는 러시아 사관과 고문관 철수에 대한 그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이 날의 집회과정은 독립관에서 토론회가 진행되던 방식과 유사했다. 집회는 만여명의 서울 도시민들이 미전 상인 현덕호를 회장으로 선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초청연사들이 백목전 2층 다락을 연단 삼아 연설을 하고, 이어 집회 참석자들이 러시아 사관과 고문관이 대한에서 철수하는 것이 전국 “동포 형제의 한 가지 원하는 바”라는 연설내용에 박수로 동의를 표하는 순으로 진행되었다. 집회는 독립협회 지도부와 집회 참여자들이 의결 과정을 통해 이와 같은 내용을 담은 편지를 외부로 발송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만민공동회의 요구와 친러 세력의 압력 속에서 고심하던 고종이 다음날 백성의 여론이 이와 같다며 러시아 사관과 고문관 고용 철회의 뜻을 밝힌 것이다. 종로에서 개최한 첫 만민공동회가 즉각적인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내며 성공을 이루자, 도성 안에서 개최되는 대규모 연설과 집회는 눈에 띄게 증가했다. 3월 만민공동회를 통해 대중동원이 정부를 압박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음이 증명되자, 독립협회 지도부가 대규모 집회를 협회의 새로운 정치운동방식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른바 ‘거리의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1898년 서울을 뜨겁게 달구었던 거리의 정치는 독립협회가 같은 해 5월 협회의 사무소를 종로에서 가까운 광통교 부근으로 옮기고, 6월 구리개에 위치한 장악원에서 특별회를 열면서 본격화되어, 10월부터 12월까지 관민공동회, 중추원 의관 선거, 독립협회 지도부 검거, 그리고 협회 해산이라는 일련의 사건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최고조에 달했다. 협회는 정치적 사안에 따라 외부, 중추원, 고등재판소, 경무청 등의 육조거리와 종로, 그리고 경운궁 등으로 장소를 옮겨가며 시위를 벌였고, 도성 안 곳곳 큰 사거리마다 만민회의 위원을 파견하여 거리연설을 펼쳤다.

사진 설명: 만민공동회 집회장소 (문화콘텐츠닷컴) ① 3월 최초의 만민공동회 – 종로 백목전 ② 10월 연좌법, 노륙법 반대집회 – 광화문 육조거리 중추원 앞 ③ 10월 관민공동회 – 종로거리 ④ 11월 철야장작불집회 – 육조거리, 종로거리, 경운궁 주변 ⑤ 11월 만민공동회와 황국협회의 격돌 – 종로거리, 경운궁 주변 ⑥ 11월 황제의 친유 – 경운궁 인화문 ⑦ 12월 김덕구 장례식 – 남대문~갈월리

토론회와 독립신문이라는 공론장의 경험을 통해 정치의식이 한껏 고양되어 있었던 서울 도시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정부 관료와 개화파 지식인들을 비롯하여, 상인, 학생, 백정, 부인들과 소수자인 벙어리와 맹인들까지, 말 그대로 빈부귀천과 남녀노소의 범주를 뛰어넘는 각계각층의 군상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자발적인 공개연설을 통해 정부정책을 규탄하고 만민회 공동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면서 스스로를 의미 있는 정치적 주체로 인식해갔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은 집회에 참여했던 많은 이들에게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다.

당시 19세의 영어학교 학생으로 만만공동회에 참여했던 장웅진은 30년 후 그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이제까지 천백년 동안 제국 전제정치에 젖어, 관리 앞에서는 평민의 몸으로 감히 얼굴도 쳐다보지 못하고 당황했던 것이 인민의 사상이었는데, 19세의 학생으로 십부대신을 앞에 놓고 정부의 매국적 행동을 여지없이 공격하여, 몇 만 명의 군중의 박수와 노호를 들은 경험은 일생일대 가슴 시원하고 핏줄기 들뛰는 경험”이었다고.

“무엇이 두려워 집회의 장소를 정하고 백성을 속박하시옵니까”
“집회의 범위를 정하는 것은 말길을 막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규칙을 정하고자 함이라”

고종을 비롯한 대한제국 정부는 사대문 안 서울의 심장부가 대중정치의 장으로 이용되는 것에 극도의 불편함을 드러냈다. 특히 고종은 조선후기 이래 대표적인 거둥길이자 국왕의 정치공간으로 이용되던 육조거리와 종로 일대를 그들의 정치공간으로 새롭게 전유하고 있는 만민회를 외세 못지않은 위협으로 느끼고 있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고종과 독립협회의 대립이 표면적으로는 협회의 집회장소를 둘러싼 갈등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협회와 정부의 갈등은 독립협회가 도성 안 장악원에서 특별회를 열면서 시작되었다. 1898년 6월 독립협회 지도부는 이른바 ‘적폐청산’을 위해 이용익과 조병식 등 부패한 수구파 관료들의 파면을 요구하는 시폐상소(時弊上疏)를 올릴 것을 결정하고, 상소준비를 위한 소청을 장악원에 설치했다. 이미 3월 종로 만민공동회의 성공을 통해 집회장소의 중요성을 인식한 협회 지도부는 도성 밖이 아닌 도성 안에서 그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그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악원은 악공들이 음악과 무용을 연습할 수 있는 넓은 뜰을 갖고 있고, 때마침 사용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소청의 장소로서 적합하다고 판단되었다. 협회 지도부는 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장악원을 떠나지 않을 것을 결의하고, 신문을 통해 장악원이 협회의 임시처소가 되었음을 알렸다.

독립협회의 장악원 장악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대한제국 정부는 긴장감을 드러냈다. 경무청은 도성 내 야간 순찰 인원을 늘리는 한편, 거리에 나와서 연설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내용의 경무청 고시를 내보냈다. 집회 장소를 둘러싸고 협회와 정부가 충돌한 것은 협회가 장악원에 소청을 설치한지 한 달이 되던 즈음이었다. 경무청에서 파견된 수백 명의 순검들이 장악원으로 통하는 구리개의 도로를 차단하고 독립협회의 회표를 단 도시민들이 장악원으로 접근하는 것을 저지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경무청은 독립협회가 ‘학문권면’과 ‘충군애국’을 목적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정치에는 간섭할 권리가 없으며, 또한 독립관이라는 원래의 회의장소를 버리고 장악원에서 특별회를 열은 것은 규칙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장악원에 모여 있던 협회 회원들을 모두 해산시켰다. 그리고 어떤 단체를 막론하고 성안에서 집회를 여는 것을 일절 엄금한다는 경무청 고시를 발표했다. 이후 경무청은 독립협회의 토론을 정치문제 이외의 것에 한정하고, 집회는 협회의 원래의 장소인 도성 밖 독립관에 한하여 허가하며, 그 이외의 장소에서 집회를 여는 것을 금지하는 것으로 그 규정을 보다 구체화시켰다. 공간의 봉쇄를 통해 말의 길, 즉 언로를 막은 것이다.

이에 독립협회 지도부는 ‘작정범위’ (酌定範圍), 즉 집회를 할 수 있는 장소를 제한하는 것은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며 조칙을 거부했다. 언로를 넓게 개방하는 것은 전통적인 유교정치뿐 아니라 서구의 근대정치에서도 중시되는 가치이며, 나아가 조선이 개명과 진보의 길로 나아감에 있어서도 반드시 갖추어야할 덕목이라고 강조했다. 정부 역시 토론회와 연설회가 갖는 대중 계몽의 효과에 대해 공감하고 있었던 까닭에, 집회와 연설을 원천적으로 금지하지는 못했다. 대신 집회의 장소와 연설의 내용에 제한을 두어 그것이 정치적 성격,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부를 비판하는 집회로 전환되는 것을 제어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후 독립협회와 대한제국 정부의 정치적 공방은 표면적으로 도성 안 집회금지 규정을 둘러싼 갈등으로 전개되었다. 회유와 타협, 그리고 충돌을 거듭하며 지루하게 이어지던 이 싸움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그해 12월 고종이 만민회를 진압하기 위해 전국에서 소집한 보부상과 만민회가 서울 한복판에서 격돌한 대규모 물리적 충돌이었다. 고종은 도성 안 집회금지 규정을 구실로, “이차(離次)하여 개회(開會)하는 것에 대한 금령이 있었는데 자리를 옮기고 그치지 아니하니 죄가 하나요, 독립협회를 이미 준허함이 있었는데 만민공동회라 천단히 명목을 세웠으니 죄가 둘이요, 칙으로 써서 물러가라 하였는데 항명하고 오히려 갈수록 더욱 심해지니 죄가 셋”이라며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

만일 우두한 무리들이 오만무례하게 두려워할 줄 모른 체 다시 지난날의 버릇을 답습하여 열 , 다섯 명씩 거리에 모여 모임을 열려고 하는 자들이 있으면, 파수 순검과 순찰 병정으로 하 여금 철저히 규찰하여 즉시 엄격히 금지시키도록 하라. 또한 거리와 마을에서 일이 없이 떠돌 아다니는 백성들로서 방청한다는 핑계로 빙 둘러서서 구경하는 자들도 역시 금단하라“ (고종실 38, 고종 351225)

이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 정부가 통제력을 잃는 1905년까지 서울에서 대규모 집회는 사라지게 된다. 1898년 개혁을 요구하는 도시민들로 가득 찼던 서울의 거리와 광장은 이제 고종의 황제권을 드러내기 위한 기념비와 공간들로 채워져 나갔다. 종로에는 고종의 즉위 40년을 기념하는 칭경기념비가 세워지고, 탑골공원의 팔각정과 음악당은 철책을 둘러 ‘문화적’ 활동만이 가능한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한말 서울을 대중적 정치의 공간으로 변화시켰던 만민공동회의 경험은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민들이 서울의 거리와 광장을 그들의 목소리로 채웠던 역사의 시작이었다.

<참고문헌>

『독립신문』
정교. 『대한계년사』
Don Mitchell. 『The Right to the City: Social Justice and the Fight for Public Space』, The Guilford Press, 2003
신용하. 「독립문, 독립관, 독립공원의 건립과 변천」 『향토서울』 59, 1999
김지영. 「조선후기 국왕 행차와 거둥길」 『서울학연구』 30, 2008
이태훈. 「한말 근대정치운동의 확산과 정치연설의 역할」 『역사문제연구』 27, 2012

필자소개
California State University, Chico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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