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발로 뛰어 쓴 책『민중의 집』
[서평아닌 서평]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새 길을 모색하다
    2012년 08월 21일 02:3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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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의 집] 서평이라기 보다는 현재 한국의 노동운동, 진보정치, 지역운동에 대한 필자의 고민과 생각을 [민중의 집] 책 비평을 빌려서 하고 있다. 강상구 진보신당 부대표가 보내왔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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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노동자 중심성’ 타령

‘노동자 중심성’이 무슨 사골인가. 10년 넘게 우려먹으면서 다 말아먹은 주제에 새로운 진보정당을 만들겠다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또 ‘노동자 중심성’ 타령이다.

하지만 모두가 다 알고 있듯이, ‘노동자 중심성’은 너무 많이 우려먹어서 이제 먹을 게 별로 없다. 약아 빠진 정치인들은 아마도 그때를 아주 잘 알 거라서, 쓸모없어질 딱 그 순간에 ‘노동자 중심성’을 쓰레기통에 버릴 것이다.

지금도 그렇고 그 순간이 와도 그럴 테지만 남들이 자꾸 ‘중심’이라고 얘기하는 노동자들은 한숨만 나온다. 진보정치가 힘을 얻기 시작하자마자 돈이나 내는 존재로 전락했던 노동자들은 그런 식이라면 애초부터 중심이 될 수가 없었다. 박근혜가 필요할 때만 시장에 가서 서민을 찾듯이 진보정치 역시 필요할 때만 공장에 가서 노동자들을 찾는 꼴이었으니까.

그래도 진보정치는 노동자 투쟁에 열심히 연대했다고? 그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파끼리의 연대는 조끼 입고 머리띠만 안 맸다 뿐이지 좌파 보다 훨씬 강고하고 전투적이며 어떤 땐 인간적이기 까지 하다.

‘노동자 중심성’은 진보정당이 아쉬울 때 조직노동자에게 하는 구애의 표현이 아니라 현실에서 새롭게 재구성되어야 하는 개념이다. 그렇지 않다면 ‘노동자 중심성’은 새로운 미래를 여는 자산이 아니라 몰락을 증명하는 과거의 유산이 될 것이다. ‘노동자 중심성’을 한낱 과거의 유산으로 전락시킨 건 물론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

민주노동당이 처음 원내에 진출한 직후인 2005년부터 ‘진보정당의 위기’가 거론됐었다. 이 때 있었던 몇 번의 토론회에서 지적됐었던 건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 의식화, 투쟁 사업을 장기적 관점에서 추진해야 한다.’ ‘비정규직, 하청노동자, 빈민서민의 이익대변보다는 안정적인 노동자의 이익만 대변하고 끌려간다는 인식의 문제’ 같은 것이었다.

당시 한 토론회에서는 “더 늦기 전에 <제 2 창당>의 결의로 <당 혁신운동>에 나서야 한다.”는 요구도 있었다. 놀랍다. 그 후로도 7년이 흘렀으니.

10년의 고민을 담은 책

한 편에서는 운동의 위기가 이야기 되고 또 한 편에서는 2012년 집권론이 힘을 얻어가던 이즈음 당 교육국장으로 마포에 갔던 나는 뒤풀이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려다가 무슨 중요한 일이 있는 것처럼 잠깐 따로 보자던 당시 마포지역위원회 정경섭 위원장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맥주집 2층의 커피숍으로 나를 끌고 간 정경섭 위원장은 앞뒤 없이 딱 이렇게 말했다. “노동조합의 지역개입을 어떻게 끌어내야 할까요?”

뜬금없고 싱겁고 그리고 너무 거대한 주제. 정말 아는 게 없어서 “저 같은 사람이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라고 대답하고 한 5분 만에 커피숍을 나왔었다. 책이나 읽고 남들 앞에서 말이나 하는 걸로 운동을 때우던 자의 종말이었다.

볼로냐 corazza 지역의 민중의 집. 3층 건물이며, 1층은 선거연합 사무실과 약국, 병원이 있고, 2층은 ARCI(이탈리아 문화교육단체) 사무실을 포함 지역단체들의 사무실, 3층은 강당.(사진=최준영)

그때 이후로 마포에는 민중의 집이 만들어졌고, 그 동안 노동조합이나 정당 지역조직에서 볼 수 없었던 각종 프로그램들이 진행됐다. 노동조합이 민중의 집과 함께 지역활동을 벌이는 사례가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했고 민중의 집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났다.

정경섭은 그때부터 혹은 2000년대 초반에 ‘노동조합의 지역 개입’이라는 주제가 나왔을 때부터 치자면 10년 넘게, 누구나 얘기했지만 아무도 실천하지 않았던 그 주제에 천착해 왔다.

‘민중의 집’은 그 오랜 동안의 고민과 실천의 산물이다. 저자는 이탈리아, 스웨덴, 스페인을 돌며 45일 동안 민중의 집을 방문 조사했으며, 유럽 방문 후 한국에 돌아와 2년 동안 각종의 자료를 찾고 분석해서 이 책을 썼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민중의 집을 이야기하지만 다른 수식어 없이 자기 책 제목을 그냥 ‘민중의 집’이라고 지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정경섭 뿐이다.

노동자들을 주체로 만드는 민중의 집

이탈리아에서 민중의 집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유럽에서 임금노동자, 소작농, 주변부 노동자, 주부 등 곳곳에 피폐하게 흩어져 있던 ‘일하는 자’들이 물질적▪상징적으로 결집하는 공간(18p)”이었다.

민중의 집은 사회주의의 풀뿌리 현장이었던 셈인데,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 최소 1천 5백 개가 이탈리아 전역에 퍼져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좌파정당 지지도가 높은 피렌체, 볼로냐, 밀라노 등에 민중의 집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스웨덴 민중의 집은 1890년대 남부지방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퍼져나갔으며 “스웨덴 사민당과 노총의 성장 기반이었고, 정당운동과 노동운동의 긴밀한 결합의 상징이었다(27P)”고 저자는 전한다. 스웨덴에는 현재 전국에 530여개의 민중의 집이 운영되고 있으며, 민중의 집 연합회가 전국 민중의 집의 상급단체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스페인은 한 때 전국에 900여개의 민중의 집이 있었다는데, 가장 대표적인 민중의 집인 마드리드 민중의 집은 “1908년 새로 문을 연 이후 꾸준히 성장하여 1930년대 초반에는 회원이 무려 10만 명에 달했다(31P)”고 한다.

확실히 민중의 집은 노동운동과 정당운동의 풀뿌리 전략이었다. 규모도 규모지만 중요한 것은 민중의 집이 하는 일이다. 마가렛 콘 교수는 당시 민중의 집이 어떤 의미를 지닌 공간이었는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 시기 노동자들은 오로지 도구적 가치에 의해 생산과정에 투입된 말 그대로 ‘객체’였지만, 민중의 집이나 협동조합에서 노동자들은 ‘주체’, 대안적 세계를 함께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45p)”

뼈아픈 지적이다. 무슨 운동을 하든 활동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변할 때의 기쁨을 누려본 사람이라면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같이 놀고먹는 게 답

그런데 노동자들은 민중의 집에서 어떻게 주체가 됐을까.

스웨덴 민중의 집의 핵심은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차별을 받지 않고 문화를 향유하는 연대의 정신(28p)”에 있다고 한다. 멋진 말이다. 이를 위해 필수적인 건 ‘지역사회 구성원의 의사소통 능력과 상호 이해를 강화’하는 것이란다.

지역사회 구성원의 의사소통 능력을 높이고 상호 이해를 강화하기 위해서 해야 될 일은 무엇일까. 우선 만나야 한다. 만나서 함께 먹고, 마시고, 놀아야 한다. 만나지 않았으면 몰랐을 이야기,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겼을 편견, 만나기 전에는 절대 만들어질 수 없는 동류의식은 죄다 만나야 알게 되고, 만나야 사라지고, 만나야 생겨난다.

저자는 공동체의 시작은 “놀이와 밥(375p)”이어야 한다는 말로 이를 설명한다. 따지고 보면 성장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자기계발로 사람 피곤하게 하는 신자유주의에 맞서 ‘놀고 먹자!’는 주장은 얼마나 선동적인가.

만나서 함께 나누는 ‘놀이와 밥’ 속에서 구성원들의 상호 이해는 높아지고 의사소통 능력은 강화된다. 그게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혹은 그 누구든.

“마포 민중의 집은 먹고 마실 수 있는 시설을 겸비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유용하게 이용된다. 지역 내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단체들은 대형 주방과 식탁, 모임 장소 등을 갖추지 못한 곳이 대부분이다. 이런 단체들이 공동으로 민중의 집을 이용하고 함께 공간을 나눠 쓰는 것은 마포 민중의 집이 가지는 주요한 전략 중에 하나다.”(359p)

확실히 그렇다. 필자가 구로에서 민중의 집을 하면서 느꼈던 가장 큰 깨달음 가운데 하나도 ‘부엌의 힘’이었다. 함께 모여 먹을 수 있는 시설은 생협의 마을 모임도 노동자들의 송년회도 고등학생들과 선생님의 동아리 모임도 모두 민중의 집으로 오게 한다.

유럽 민중의 집 활동가들은 지역에서 사업을 펼치기 위해서 일단 어떤 공간이 필요한지 연구하는데, “먹고 마실 수 있는 곳을 마련하는 것은 기본이고,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집이나 사무실보다 더 쾌적하고 우아한 공간을 창출(357p)”해 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우리는 노동자들과 주민이 아무 때나 올 수 있는 그런 공간을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쾌적한 공간의 사례를 그래도 찾아본다면, 에어콘 빵빵한 큰 사업장 노조 사무실에 조합원들이 밥 먹고 들러서 잠깐 커피 한 잔 하는 것 정도가 있을까.

회사 밖으로 나온 노동자들이 집 말고 잠시 들를 곳이라고는 술집 밖에 없고, 도시의 젊은 노동자들이나 실업노동자들이 늘 거쳐 가는 곳은 스타벅스나 까페베네 같은 곳이다. ‘집이나 사무실보다 더 쾌적하고 우아한 공간’은 돈을 내야 머무를 수 있는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공간’이고 그 나마 상당수는 거대자본에게 장악되어 있다.

어쨌든 만남의 기본은 놀고먹기에 있고, 민중의 집은 노동자들과 주민들이 편하게 와서 놀고먹는 곳이 되어야 한다. 이게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는 시작이다.

노동자로서의 정체성

“몇몇 역사학자들은 작업장을 기반으로 한 노동자 정체성이 이웃 간에 연대로 재강화할 때만 노동자로서의 의식이 발전했다는 점을 지적했다.(376p)”고 한다.

"Bruno Tosarelli" 앞에서 열리고 있는 정치토론(출처 : Bruno Tosarelli 40주년 기념 자료집)

이웃 간 연대와 인간관계의 형성은 노동자의 집단적 정체성 형성으로 이어진다는 게 사실이라면 민중의 집의 역할은 보다 분명해진다. 예컨대 산별노조가 천의 세로방향 실(날줄)이라면 민중의 집은 가로로 놓인 실(씨줄)이 되는 셈이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정체성을 형성해 나갈 때 그때부터 바로 그 노동자들은 ‘노동자 계급’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10년 전부터 얘기해왔던 노동조합의 지역개입전략은 이 말대로라면 결국 노동조합의 대국민지지획득전략이 아니라 노동자계급형성전략이 된다.

유럽사회주의 세력은 민중의 집을 “정치운동과 노동운동을 조직해 나가는 대중적 토대로 삼았고, 이를 통해 노동자의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사회주의의 이상을 실현(20p)”하려고 했다고 한다. 언제나 단결해 있는 자본가 계급에 비해 단결하여 ‘계급’이 되는 것 자체가 목표인 노동자에게 민중의 집은 주요한 전략적 거점이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스웨덴의 노동자 교육협회는 주목할 만하다. 노동자 교육협회는 민중의 집과 함께 스웨덴 풀뿌리 민주주의의 쌍두마차다. 노동자교육협회는 “전국-광역-지역단위로 조직되어 있으면서 회원 조직인 사민당과 노총, 여러 진보적 시민사회단체에 교육프로그램을 제공(30p)”한다고 한다.

1912년 사민당과 노총, 협동조합 조직들이 함께 만들었다는 노동자교육협회는 “당시에는 노동자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시작했지만 현재는 모든 종류의 시민교육을 지원(228p)”한다. 현재 “연간 75만 명의 스웨덴 사람들이 협회가 운영하는 약 3만 5천개의 스터디 서클과 교육과정에 참여하며, 연간 200만 명 이상이 협회가 주최하는 강연회나 음악회, 영화 상영 프로그램 등(229p)”에 참여한다고 하니 그 규모가 대단하다.

더 대단한 건 노동자교육협회의 10대 과제다.

“1. 계급사회 폐지, 2. 민주주의의 발전, 3.모든 사람들의 차이에 기반 한 평등, 4.대중운동 강화, 5.비영리 부문의 발전, 6.모두를 위한 문화, 7.페다고지 차원의 과제, 8.평생교육, 9.건강과 만족스러운 일터, 10.전 지구적 과제: 시장 주도의 지구화 반대 등”

더 바랄게 별로 없다.

지역에서 이웃과의 만남을 통해 강화되는 노동자로서의 정체성, 그 정체성을 더욱 뿌리 깊게 만드는 노동자시민교육 전담기관의 존재는 확실히 우리로선 부러운 일이다.

민중의 집은 가장 정치적인 공간

이탈리아 토리노 남동쪽 작은 도시 아스티의 산타 리베라 민중의 집. 이곳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목표는 일차적으로 지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주민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정당만의 힘으로 지역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고 거꾸로 정당 없이 지역운동만 가지고 지역을 바꾸는 것도 불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지역주민들이 직접 나서서 스스로를 조직하는 활동을 모색하려는 것이다.(150p)”

 민중의 집은 이런 의미에서 가장 정치적인 공간이어야 한다. 스스로를 조직하는 정치활동,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를 바꾸는 것. 이것이 바로 ‘정치’의 본령이다.

그렇다면 노동자정치세력화는 노동조합이 정당을 만들고 그 정당이 대중적 지지를 획득하는 것만으로 이해돼서는 곤란하다. 이럴 경우 노동자대중은 정당이 집권하는 데 사용되는 도구나 수단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게 아니라면 노동자정치세력화는 노동자정체성을 가진 새로운 주체를 계속해서 만들어 나가는 일, 그리고 이들이 사회적으로 주도권(헤게모니)을 잡아 궁극적으로 사회권력과 정치권력을 대체하는 일로 새로 정의되어야 한다.

물론 주도권을 잡아나가는 과정에서 선거 때는 표를 얻는 활동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정치세력화 운동의 핵심 원리가 되면 안 된다. 선거 참여는 사회권력과 정치권력 가운데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여러 방식 중 하나에 불과하다.

또한 정치권력을 장악한다고 해서 우리가 정치권력을 대체했다고 볼 수 없으며, 사회적 주도권 확보 없이 세워진 정치권력이 무너지는 건 한 방이다. 사실 사회적 주도권 확보 없는 정치권력 획득은 불가능하다.

노동자 정체성을 가진 주체 만들기

산타 리베라 민중의 집 활동가가 말하듯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를 바꾸는 일이 곧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의미여야 한다면, 노동자 정체성을 가진 주체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은 아마도 아래 다섯 가지 정도의 과정을 거치는 일일 것이다.

① 시민으로서 노동권 환경권 등 자기 권리 인식하기 ② 함께 협동하고 연대하면서 생활개선을 위한 공동의 노력을 하고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③ 대안적 삶의 방식을 개발하고 실천하기 ④ 권력에 맞서 다양한 형태로 대응하고 문제제기하며 저항하고 싸우기 ⑤ 이와 연결돼 현실정치에 대해 관심 갖고 참여하기.

4번과 5번이 없는 운동은 ‘착한 시민운동’에 그칠 가능성이 많다. 예전의 노동운동은 1번부터 5번까지를 다 했거나 하려고 했었는데 3번은 사라진지 오래 됐고, 4번과 5번은 돈 대고 몸 대다 지치는 걸로 결론 났다. 1번과 2번은? 그건 자기 회사 월급 올리는 ‘실리주의’로 귀결됐다.

‘민원해결사’ 노릇에, 노동자를 ‘위해서’ 그들을 ‘대변’이나 하는 정당운동이나 노조운동은 발전할 가망이 없다. 과거 노동운동이 성장하던 시기에 끊임없이 새로운 주체가 만들어졌던 것처럼 새로운 정치의 주체가 만들어지고 이들이 사회권력과 정치권력을 대체할 수 있을 때 그때에야 비로소 노동자는 정치적으로 세력화되는 것이다.

우파의 권력이 전국에 걸쳐 지역적으로 촘촘하게 짜여 있는 것을 감안할 때, 그리고 노동자 정체성이 이웃과의 연대로 재강화되어야 한다는 측면을 고려한다면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는 특히 지역에서의 정치세력화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노동자의 ‘지역정치세력화’이다.

노동자 중심성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다시 세워져야 한다. 민중의 집은 이에 복무할 수 있는 공간이며, 그런 의미에서 가장 정치적인 공간이자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새로운 노선이다.

사회운동이 모이는 중심으로서의 민중의 집

이탈리아 민중의 집은 “생디칼리스트, 개혁적 카톨릭 세력, 사회주의 세력 내 여러 분파들이 공존하면서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연대하는 대중정치의 공간(25p)”이었으며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이탈리아에 비해 스웨덴 민중의 집은 “준공공기관에 가까울 정도로 안정된 곳이 많았다. 민중의 집의 가장 기초적인 골격은 지역사회단체들의 네트워크이자 허브(29p)”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아무리 작은 민중의 집이라 해도 “최소 20개에서 많게는 60개가 넘는 조직이 회원조직(29p)”으로서 민중의 집을 같이 꾸려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구현하기 위해서 민중의 집은 지역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노동조합과 시민사회운동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가장 열심히 움직여야 할 곳은 현재로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진보정당이어야 할테지만.

이탈리아 재건공산당 볼로냐 지부 위원장인 로셀라 위원장의 이야기이다.

“예전에는 민중의 집에서 노총-정당-협동조합이 함께 회의를 했는데 지금은 연결선이 약해졌다.” “민중의 집의 정부 비판 기능은 예전에 비해 약해졌다. 당이 분당되지 않고 민중의 집과 노총 등이 함께 했을 때 민중의 집은 항상 노동운동 편이었고 자본가를 상대로 했지만, 지금은 당이 나뉘고 우리는 국회의원도 없다. 굉장히 힘든 상황이다.”(124p)

정당과 노조, 민중의 집의 연결선이 약해짐으로써 민중의 집의 정치적 색채도 옅어졌다는 얘기다. 결국 민중의 집이 정치적이기 위해서는 정당-노조-민중의 집의 연결선이 강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민중의 집을 반드시 정당이 운영한다거나 민중의 집의 의결구조를 정당이 장악한다고 해서 민중이 집이 잘 된다거나 정치적 성격을 가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정당과 노조가 민중의 집과 잘 연결되는 것이다.

이 연결은 곧 민중의 집을 중심으로 주민들이 끊임없이 왕래하고 소통하는 구조로 이어질 것이며, 그 구조는 곧 앞서 말한 대로 민중의 집을 ‘정치적 공간’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당이 그런 일을 해낸다면 그때부터는 우리가 늘 말하는 ‘조직화’의 의미도 바뀔 것이다. 우리 중심으로 사람들을 모으는 일이 아니라 우리를 매개로 사람들이 서로 만나게 해주는 일로 말이다.

민중의 집에서 당의 역할

로셀라는 과거 민중의 집의 간판은 ‘민중의 집’이었지만 “여기는 좌파정당의 집”이라고 쓰여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고 말한다.

마포나 구로 민중의 집이 ‘진보신당이 하는 곳’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고, 진보신당 서울시당 김일웅 위원장의 말처럼 강북의 작은 도서관이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진보신당이 하는 도서관’으로 동네에 소문났으며, 대구 서구의 도서관 ‘햇빛 따라’에서 상근하시는 김은자 동지가 진보신당 사람이라는 걸 다들 알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중요한 것은 진보정당은 우파가 지배하고 있는 풀뿌리 지역사회를 좌파적으로 바꾸기 위한 종합적인 계획, 이를 테면 ‘지역운동발전전략’이 있는가 하는 점일 텐데 돌이켜보면 진보정당의 지역 조직이 이런 식의 전략을 가졌던 적은 일부 정파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

전략이 있는 당이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당원인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노조가 지역과 사회로 나올 수 있도록 자기 사업장에서 노력하게끔 하는 일을 당이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조합의 간부가 아니라 보통의 노동자들이 다양한 시민사회 운동과 접하고 진보적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줄 수 있을 것이다. 녹색, 여성, 장애 같은 부문운동이 지역에서 주민노동자들과 용광로처럼 섞이게 하는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고, 이렇게 되면 주제넘은 말이지만 노동운동의 혁신에 진보정당이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전략이 없는 당은 민중의 집 존립 자체를 어렵게 하거나 혹은 민중의 집을 표류하게 한다. 지극히 현실적으로 ‘돈’ 문제가 민중의 집의 발목을 잡을 때도 있다.

“ ‘좌파의 집’이 볼로냐에만 15~16개 정도 있었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곳은 단 3곳뿐이다. 이탈리아 공산당이 좌파민주당과 재건공산당으로 나뉜 1990년대 초부터 그 수가 급격히 줄었다고 한다. 좌파정당의 당세가 기울면서 더 이상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문을 닫은 곳도 있었다.”(123p)

이탈리아에서는 “보수정권의 우세, 중도정당의 우경화, 좌파정당의 거듭된 분열로 고전하면서, 민중의 집=좌파의 집이라는 등식은 더 이상 성립되지 않게(25p)”되었고, 스페인에서는 스페인 내전 후 프랑코 독재정권이 수립되면서 파괴된 민중의 집이 주로 스페인 노총의 주도하에 복원되려 하고 있으나 이미 80년대 초반 중도노선으로 우경화한 사회노동당은 민중의 집을 완전히 잊었으며, 스웨덴 사민당이 운영하는 민중의 집은 지역사회 민중의 집과는 기능이 전혀 다른 대규모 컨벤션센터라고 한다.

다시 시작하려는 움직임.

로셀라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민중의 집 활동이 왕성했던 시절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곧 닥쳐올 것이다. 그때 민중의 집이 다시 사람들을 모으고 쉴 수 있게 해주고, 자본에 대항하는 기지 역할을 할 수 있길 기원하고 있다.(125p)”

민중이 집에 대해 환상을 가질 필요는 없다. 한때 전성기를 누렸던 유럽의 민중의 집은 그곳의 노동운동과 정당운동이 그랬듯이 옛날 같지 않다. 결국 유럽이나 한국이나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처지, 같은 마음이다. 모두가 잘 해야 한다.

덕분에 민중의 집을 하면서 드는 고민이 더 커진다. 대체 지역에서 사업장과 업종이 다른 노동자들을 단일한 정체성으로 묶는 게 가능한 일일까. 우리의 활동가들은 그 과정을 충분히 이겨낼 만큼 단련되어 있는가. 여전히 주민들을 ‘설득’하려는 경향이 있는 활동가들이 ‘소통의 매개자’로 변화하는 건 어떻게 가능할까. 새로 만난 사람들에게 인사조차 잘 안 하는 진보정당의 당원 문화를 바꾸는 것부터가 먼저 아닐까.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잘 못하면 민중의 집은 하나의 단순한 공간이자 잠깐 동안의 해프닝으로 끝날 테지만, 잘 할 수만 있다면 사회운동 전반을 바꿀 수 있는 거대한 기획이라는 점이다.

내 말로는 믿음이 안 갈 테니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자.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심광현 교수는 이 책 속에 인용된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직까지 ‘아래로부터’ 대중의 능동적 참여에 의한 진보운동의 재구성이 적극적으로 실천되지 못하고 있다. 조합원과 회원, 당원 등 기존 사회운동의 구성원들이 ‘민중의 집’을 통해 지역대중들을 만나고 또 스스로에게 능동적인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기존 사회운동자체가 다시 활력을 얻게 되는 ‘프로세스’. 민중의 집 건립운동은 사회운동 전반을 혁신하고 개조하는 공동의 프로젝트다.(363p)”

발로 뛰어서 쓴 책이 진짜 책

만남을 조직한다는 것. 이 말을 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사소한 일이라도 전화를 하고, 뭔가를 쓰고, 찾아가고, 만나서 이야기하고, 또 다시 찾아가는 등의 일을 반복함으로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겪어본 사람들만이 안다.

낯선 사람에게 내미는 악수가 수도 없는 어색함 끝에 소통의 기본임을 깨달은 길 위의 활동가와 단지 정치인의 뻔뻔한 위선으로 이해하고 있는 책상머리의 원칙론자와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만이 올바르다고 믿는 ‘투사’와 투쟁조차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 때론 광대라도 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 사이의 현실적 간극 역시 작지 않다.

“민중의 집은 공간 그자체이기 이전에 개인과 개인, 개인과 조직, 조직과 조직을 연결하는 메커니즘에 가까웠다.(19p)”

이런 류의 문장들이 이 책에는 곳곳에 적혀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말들, 단어를 연결시키는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이런 문장들. 그래서 별 것 아닌 것 같은 이 말들.

하지만 저자가 오랜 기간 몸을 움직여가며 얻은 작은 깨달음들을 모아 만들었을 이 말들의 무게는, 온갖 현란한 단어들을 열거하면서 철학자이자 역사가이며 운동가인 척 하는 자들 특히 그 중에서도 본인만이 원칙적인 체 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들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다.

서평을 쓰기 위해 두 번째로 책을 펼쳤을 때 나는 온통 이런 말들에만 밑줄을 그어 놨다는 점을 알게 됐다. 나는 이 말들 속에서 현실에서 발을 옮겨야 하는 우리 걸음에 놓인 그 무거움들과 자꾸 다시 만나게 된다. 때로는 감탄하며, 때로는 한탄하며.

필자소개
노동당 당원. 구로 민중의 집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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