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하역과 임청각
    [철도이야기] 선로를 돌린 이유
    By 유균
        2017년 06월 29일 12:0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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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고생한 이야기 하나  쓰겠습니다.

    요즘 역이 제 구실을 못하면서 더불어 옆에 있던 가게들도 망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표현하고 싶어 여기저기 물어보고 마땅한 장면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지인이 이하역과 판교역에 가면 비슷한 장면을 찍을 수 있다고 귀띔을 주어 출사 나갔습니다.

    #1621열차를 타게 되었는데 안동에서 다시 거꾸로 올라가느니 차라리 옹천에서 내려가는 편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철길 옆에 도로가 있기 때문에 걸어도 그리 힘들지 않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열차승무원에게 물어보니 그곳은 직접 가는 도로가 없다고 합니다. 또 열차승무원의 고향이 마침 ‘서지’여서 자세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하역의 정경(이하 사진은 필자)

    안동에 도착하니 12시 20분, ‘이하’가는 버스는 2시 20분으로 2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서지 신호장’에서 걷기로 마음을 먹고 서지행 버스를 타고 제대로 잘 내렸습니다. 서지에서 이하역으로 가는데 도로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헤맬 것 같아 철길 따라 죽 걸었습니다. 안동에서 서지로 갔으니 버스 가는 방향으로 계속 가면  당연히 이하역이 나오는 것이 맞지요. 초행이라면 누구든지 그렇게 갈 겁니다.

    그런데 가면서 조금 이상했습니다. 내려갈 때 분명히 터널이 2개였는데 3개를 지났고 중간폐색기도 너무 멀다는 생각이 들고 댐도 보이고 주위 환경을 보니 다시 도시로 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시간 반쯤 걸었는데 멀리서 ‘임청각’이 보이네요. 아뿔싸! 다시 안동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겁니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던지!

    이하역을 갈까 말까 생각하다 보니 2시! 열심히 뛰어가니 다시 제자리! 그래서 결국 그 버스를 탔습니다.

    이하역에 가서 원하는 그림을 담고 그 주변을 둘러보니 일제 강점기 때 그 원형을 거의 유지하고 있는 관사가 보였습니다. 정말로 반갑더군요. 망설이기는 했지만 역시 가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사에는 사람이 살긴 하는 데 아무도 없어 이하역으로 가 커피 한 잔 마시며 근무자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하역은 혼자 근무하는데 공교롭게 지정휴무를 써서 안동역에서 조근자가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하역에 대한 취재는 불가능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그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있네요. 요즘 이런 관사는 정말로 보기 어렵습니다

    사진도 찍고 몸도 이제 좀 쉬었으니 안동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갑갑한 문제가 계속 생기네요. 4시쯤 되었는데 버스가 끊겼다네요. 여객열차도 없고 화물이라도 타려고 했는데 휴일이라 운휴랍니다. 또 할 수 없이 걸어가는데 거기는 히치하이크도 안 되네요. 큰 도로까지 한 40분을 걸어가서 또 20분 정도 기다리다 안동에 갔습니다. 그래서 저녁 약속 다 빵구났지요.

    밤늦게 부산에 도착해서 고향이 안동인 친구에게 물어보니 선로를 돌린 이유를 설명해주네요.

    그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영주에서 안동으로 들어오는 초입에 진행방향 우측으로 ‘임청각’이라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큰 규모의 살림집인 고성 이씨의 대종택이 있습니다. 세칭 99칸 기와집으로 알려진 이 집은 안채, 중채, 사랑채, 사당, 행랑채는 물론 아담한 별당(군자정)과 정원까지 조성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이었습니다.

    집주인은 18세기 시(時)·서(書)·화(畵)·악(樂)에 일가를 이룬 허주(虛舟 ; 이종구 : 1726-1773)로 한말 독립운동가 아홉 분이 이 집에서 출생하였습니다. 특히 석주(石洲) 이상룡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國務嶺=지금의 國家元首)을 역임한 분입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없애버리고 싶겠지요. 그래서 중앙선을 부설할 때 선로를 돌려 이 집을 지나가게 만들었고 결국 50여 칸의 행랑채와 부속건물이 철거당했습니다.

    또 학봉 김성일 선생님은 유성룡과 더불어 퇴계학파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한말까지 영남학파의 중추적 역할을 한 분입니다. 그분의 묘소가 ‘서지’리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중앙선이 이 묘소를 관통하게 되어 있었지만 제자, 후손, 유림 수백 명이 반대하고 총독부에 진정을 낸 결과 선로가 묘소를 우회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대단하지요!어때요! 이 정도면 길을 잘못 들어도 고생한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서지신호장은 이하역과 안동역 사이에 있습니다

    필자소개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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