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속의 문명은 버겁다
[늡다리 일기]산에서 죽을 팔자
    2017년 06월 16일 12:1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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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에서 문명은 버거운 짐이었다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시작이 요란하다. 우르릉! 쾅쾅! 번쩍! 번쩍!. 30여 분을 그렇게 골짜기가 터지도록 고함을 질러 댄다. 지은 죄가 많아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창턱에 턱을 되고 빗방울을 세고 있었다.

그때 또 한 번 번쩍하더니 전화기에서 지지직 불꽃이 튀었다. 이미 늦었다. 번개보다 빠를 순 없었다. 뛰쳐나가 보았지만 태양전지판과 연결된 인버터랑 콘트롤러가 타버린 뒤였다. 게으른 내 탓이었다. 천둥 몇 번 치고 말겠거니 한 안일한 생각 탓이었다.

비가 그친 뒤 마루에서 본 앞산 전경

아랫세상에서 져 올린 늡다리의 문명기기가 번개 한 방에 모두 타 버렸다. 다시 5년 전 태양광전기를 설치하기 전으로 되돌아 가버린 셈이었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그런 기분. 지킬 것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홀가분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동안 전자 제품들을 지키려고 콘센트를 뽑았다 꽂았다 하면서 하늘 눈치를 얼마나 살폈던가… 마치 예전에 기르던 개가 집을 나간 뒤, 더 이상 사료를 져 올리지 않아도 된다는 홀가분했던 그런 마음이랄까. 차라리 번개가 고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다. 산속에서 문명은 버거운 짐이었다. 타버린 전자 제품이야 다시 고치고 사면 그만이지만, 가뭄 끝에 내린 단비 때문이었는지 그 상실감이 그리 크질 않았다.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제법 내렸는데도 계곡물은 불지 않았다. 목마른 나무들 차지였다. 비를 기다리던 나에게는 반가운 일이지만 딱 하루, 날을 잡아 온 손님들에게는 원망스러운 비다.

몇 년째 비가 많이 오질 않아 계곡수량이 턱없이 모자라다.

올 초, 늡다리를 올라왔던 손님이 이번에는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 그 손님이 그랬단다.

“…. 아무튼 죽여주는 곳이야.”

늡다리는 이런 피라미드 방식으로 손님이 늘어났다. 아무도 모르는 자기만 알고 있는 동막골쯤으로 여기는 사람들 때문이다.

친구 꼬드김에 못 이겨 왔다던 손님들이 다리가 풀려 휘청거린다. 배낭을 내려놓고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난 후에야 얼굴에 웃음기가 번진다.

땀이 식기 전에 계곡으로 내려가 씻게 한 후 늦은 저녁을 먹자마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머무는 동안 내내 이슬비가 내렸다. 맑은 날에는 보지 못할 산속 풍경으로 애써 위안을 삼는 듯하지만, 사람들 마음이 또 어디 그런가.

늡다리 손님은 피라미드 방식으로 늘어난다

텃밭에 잡초가 훌쩍 커버렸다. 농사랄 것까지는 없지만 혹시나 해서 늘 넉넉하게 심었다. 역시 먹을 이가 없어 작년에도 절반 이상을 뽑아 버렸다. 그래 올해는 조금만 심어야지 했는데, 사람 마음은 또 그런 게 아닌가 보다. 뽑을 땐 뽑더라도 밭을 놀리긴 싫은.

먼저 밭을 점령한 풀을 뽑아야 했다. 뙤약볕에 쪼그려 앉아 풀을 뽑자니 오금이 저리고 허리가 아파왔다. 해마다 반복되는 일이지만 밭에 잡초를 뽑고, 땅을 뒤적이고, 고랑을 내고, 비닐을 덮고, 모종을 심고, 물을 주는, 혼자서 하는 일이라 더디기만 한, 그래 짜증이 나는 이때쯤에는 그 누구도 고구마 한 알 주기 싫어진다.

예전에 무쇠 가마솥을 지고 올라올 때 마음이 꼭 그랬다. 무쇠솥이 얼마나 무겁던지, 우리집에서 공짜밥은 절대 안 준다고 다짐을 했더랬다.

사람들이 아무생각 없이 밭을 파헤쳐 다 먹지도 못할 고구마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을 때나, 고추를 몽땅 따서 배낭에 챙겨갈 때나, 우리집 사기 밥그릇이 맘에 든다고 배낭 속에 넣어 갈 때는 속이 정말 많이 상한다.

이러다가, 우리 집을 올라오는 사람들 뒤치다꺼리만 하다가 어느 날 허망하게 죽어버리는 건 아닐까?

산꾼의 팔자는 산에서 죽을 팔자

비 갠 뒤라 날은 화창한데 요즘 내 맘이 편치는 않다. 우리 집을 올라오는 사람마다, 나를 보는 사람마다 한 마디씩 하는 바람에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할지 참 난감하다.

어떤 이는 고생 그만 하고 대충 살라고 충고를 해 주기도 하는데, 내 성격도 그러하고, 산속이라는 곳이 그냥 대충 살다가 갈 수도, 또 그렇게 살다 가기도 싫다. 힘이 드는 날도 있지만, 맨 날 힘이 들지도 않고, 입가에 거품 물고 오르내린 적은 있지만 고생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으니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을, 이제는 힘이 든다고, 무르팍이 녹슬었다고 해서 포기할 수 있는 그런 늡다리가 아니다. 누가 하지 말라고 해서 못할, 하라고 한다고 해서 할 나이도 아니고…. 어차피 산에서 죽을 팔자다.

오래 전에 산선배가 일러준 말이 생각난다. 산에서 맺은 인연은 산에서 끊고 내려가는 법. 그것이 산꾼의 팔자다. 지난 일은 모두 추억이 된다.

혼자 오래 살다보니 새도 날 겁내지 않는다. 먹이를 주면 방안까지 들어온다.

마루에 앉아 앞산을 쳐다본다. 참 좋다. 달리 표현할 재주가 없다. 바람이 쓰담고 지나가는 녹색물결에 잠시 넋을 빼앗긴다. 혼자 보기 아깝다는 생각도 잠시 해본다. 올해는 봄다운 봄 한 번 만져 보지 못하고, 뙤약볕이 마당을 점령해 버렸다.

햇살이 눈부신 한낮. 이제는 멸종 위기종 명단에 이름을 올린 도마뱀 두 마리가 마른 흙벽을 옮겨 다니며 먹이 사냥을 하고 있다.

마당엔 어제 어질러 놓은 삽이며 괭이 같은 연장들이 뒹굴고 있고, 패다만 장작쪼가리가 도끼날에 찍힌 채 널브러져 있다. 치워야지 하는 것은 맘뿐. 보는 사람도, 그것을 지금 당장 치우지 않는다고 야단 칠 사람도 없다. 혼자 살다보니 눈만 게을러지는 것 같다. 게으름을 한껏 피우고 싶은 나른한 한낮이다.

* 늡다리 일기 앞 회의 글

필자소개
늡다리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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