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힘, 공감의 힘
[변방의 노동상담 이야기] 전신불수
    2017년 06월 12일 09:48 오전

Print Friendly

1.

2013년 11월이나 12월쯤이겠다. 연세 지긋한 어머니가 찾아왔다. 다짜고짜 “회사 앞에다 집회 좀 열어 주이소. 억울해 못 살겠심다.”하시는 거다. 회사가 아들 산재 처리를 방해해서 산재 인정도 받지 못하게 됐단다. 거기다 식물인간으로 누워 지낸 지 오래 돼 가정도 파탄 지경까지 왔다는 것이다.

모친은 나이 73세였다. 아들 김00씨는 1997년 23세 나이로 M반도체 회사에 입사했다. M반도체에는 3,000여명의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김 씨는 입사 후 사무기술직으로 가스 공급장치 유지·보수 업무를 담당했다. 반도체 회사가 취급하는 가스는 이제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히틀러가 유태인을 학살할 때 사용한 아르신, 포스핀이다.

입사한 지 9년이 지난 2006년 겨울 김 씨가 쓰러졌다. 약혼자를 놔둔 채 그는 전신불수가 되어 버렸다. 병명은 ‘바이러스성 뇌염’이다. 과로, 과중한 업무, 작업환경 등으로 면역기능이 저하되어 발병 또는 악화되었다는 것이 입증되면 산재로 인정받을 수는 있지만 그렇게 쉬운 건 아니다. 평소 김 씨가 밤늦게까지 연장근로를 자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가족은 곧 산재 신청을 접수했다.

그러나 김 씨는 산재로 인정받지 못했다. 뒤늦게 확인하니 회사가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한 출퇴근 기록에는 연장근로 내역이 별로 없었다.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한 행정소송 과정에서 원고인 김 씨 측은 M반도체에 가공되지 않은 출퇴근 기록 즉, 현장을 출입할 때 사용하는 ID카드 체크 내역을 제출할 것을 요구했으나 M반도체는 끝까지 제출하지 않았다.

왜 제출할 수 없는지 이유도 알려주지 않았다. 이렇게 모르쇠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이 M반도체는 행정소송의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법원까지 갔지만 결과는 패소였다. 다시 M반도체를 상대로 민사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지만 또 대법까지 패소, 거기다 회사를 문서 위조죄, 관리자를 위증죄로 고소했으나 역시 패소했다.

그러니까 김 씨의 모친이 찾아온 때는 근로복지공단과 회사를 상대로 벌인 7년 동안의 송사가 모조리 패소한 뒤였다. 아들은 대구의 병원에서 전신불수 상태로 투병 중이었다.

2.

솔직히 말해 한 보따리 송사자료를 읽는 것도 고역이었다. 희망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물론 모친의 주장도 일리는 있었다. 회사가 ID카드 체크 내역을 제출해달라는 가족들의 간절한 요구를 왜 굳이 외면했을까 충분히 의심이 들 만했다.

그러나 모든 판결은 확정된 상태다. 이 문제를 가지고 지역의 단체 활동가들과 상의도 해보고 변호사의 자문도 구했지만 모두들 고개를 흔들었다. “억울한 사정은 이해하지만 더 이상 할 게 없네요. 마음만 힘드시니 그만 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이렇게 말씀드리고 돌려보냈다.

마음이 불편하긴 했지만 잊어버렸다. 그렇게 7개월 정도 지났을 것이다. 그 어머니가 다시 찾아오셨다. 도와달라고, 억울해 못 살겠다고, 병원비로 집안이 파탄 상태라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7개월 만에 다시 찾아 온 모친의 호소에 나는 두 손을 들었다. “예 알겠습니다. 같이 한 번 해 보십시다.” 사실 내 어머니가 생각났다.

내가 보기에 김 씨의 질병인 뇌염은 직업병 군에 포함되는 것도 아니어서 사회적인 영향이 크지 않을 것 같았다, 어머니는 회사로부터 일정한 보상을 받고자 한다, 따라서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저런 사정을 종합해 보면 절대 오래 싸울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법원 확정 판결이라는 너무나 명백한 증거가 “회사는 책임이 없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실제 김 씨가 과로를 어느 정도로 했는지 추정할만한 것도 전혀 없다. 작업환경과 뇌염을 직접 연결시키기에는 너무 복잡한 것들이 많다. 그 회사 내의 노동조합은 다른 직업병 문제로 경험해봤지만 지역 사회와 소통도 안 되는데다 김 씨는 소속 조합원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사회적 공감을 불러일으켜 회사가 대화에 나서도록 만들 것인가?

3.

그래도 확신은 있었다. 늙은 어머니의 억울한 심정과 행동은 그것만으로도 사회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힘이 있다. 나를 포함해 활동가들은 그 매개가 되어 작은 힘을 보탤 뿐이다. 무엇보다도 산재로 인정받으려는 가족의 절박한 노력에 대응한 회사의 처사는 충분히 의심과 비난을 살만했다.

나는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지역 사회에 내놓을 요구와 명분이 간단명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산재 은폐의 진실을 공개하라, ID카드 체크 내역을 내놓아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싸움의 첫발을 종교인들이 내디뎠다. 김인국 신부, 조순형 전도사, 김태종 목사, 진화 스님 등 지역의 종교인들이 김 씨의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전신불수 상태인 김 씨를 대동하고 진실을 공개할 것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한 것이다.

기자회견 후 모친께 대구에서 청주로 입원실을 옮기시고 근처에 월세 방도 하나 잡으시라 말했다. 추석 쇠고 오시겠다는 걸 그러면 같이 할 수 없다고 당장 올라오시라 했다.

어머니와 지역의 노동조합, 단체들이 매일 돌아가면서 회사 앞 피켓 시위를 했고 출근하는 사원들에게 전단지를 나누어주었다. 내친 김에 직업병 제보도 홍보했다. 신문사, 방송사들도 관심을 갖고 취재를 시작했다. 아마 회사로서도 고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회사는 일체의 연락을 전해오지 않았다. 이 싸움을 끝내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회사와 만나야 했다. 회사가 대화에 응하는 순간 해결될 것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회사도 연락하기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회사와 만나지? 회사가 만남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할 방법이 무얼까?

생각 끝에 어머니가 대표이사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것과 병행해서 회사가 소속 사무기술직들의 출퇴근 기록을 어떻게 관리하여 왔는지 여러 경로를 통해 알아보았다(김 씨의 경우 3년이 경과했기 때문에 노동부의 점검 대상에서 제외되는 문제가 있었다).

4.

2014년 9월 30일 회사 앞에서 집회가 개최되었다. 어쩌면 한 개인, 한 가족의 불행일 수도 있는데 여기에 공감한 지역의 종교인, 노동자, 시민 100여 명과 언론방송사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김 씨의 어머니, 아버지가 나왔고 전신불수 상태인 김 씨도 환자복을 입고 휠체어에 실린 상태로 나왔다.

어머니가 휠체어에 실린 아들 옆에서 편지를 낭독하는 동안 여러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집회가 끝나고 참가자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앉아 있기로 했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들의 휠체어를 밀고 정문을 통해 회사에 들어가 책임자에게 편지를 전달하겠노라 선언했다. 회사는 경비실에다 맡겨놓으라고 경찰서 정보관을 통해 전해왔지만 그렇게 끝낼 수는 없다. 책임자가 직접 나오지 않으면 편지를 갖고 들어가겠다고 통보했다. 누가 이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한때 사원이었던 전신불수의 청년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결국 회사의 인사노무 및 총무 책임자가 직접 나와 1시간 가까이 면담을 했다. 그 자리에서 좋은 방향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다는 답변을 얻었다. 어머니와 지역 사회의 공감이 힘을 합쳐 회사를 대화의 장으로 나오게 한 것이다.

그리고 제보가 들어왔다. 회사가 사무직, 사무기술직들에 대해 속칭 ‘시간꺾기’ 방식으로 연장근로시간을 관리해왔다는 제보다. 즉, 일정 시간을 꽉 채워야만 해당 시간을 연장근로한 것으로 인정하고 그에 따른 수당을 지급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출퇴근기록 역시 일정 시간을 채워야만 연장근로한 것으로 기록해왔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시간외근로를 했을 경우 그 시간을 정확히 기재하여 보관하도록 강제한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것이다. 제보를 받고 고발장을 접수했다. 노동부에도 고발 취지를 설명하고 회사에 출퇴근 기록부와 ID카드 체크 내역을 제공받아 불법 여부를 확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 후의 과정은 자세히 쓸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회사 측과 여러 차례 만나 의견을 교환하고 합의안을 마련했다. 대화를 결렬시키기엔 우리도 회사도 부담이다. 우리로서는 이 싸움의 대의명분이 ‘은폐한 진실을 공개하라’는 것이었는데 보상금(혹은 위로금)의 액수를 둘러싸고 협상을 벌이다 그 액수를 높이자고 대의명분을 내세웠다, 뺐다 하는 것은 사회의 공감을 얻기 어려운 방식이라 생각했다. 어머니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적절한 선에서 마무리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이 싸움에 함께 한 지역 분들을 모시고 식사를 대접했다. 1년 쯤 후 들은 얘기로는 큰 병원으로 옮긴 후 투약제를 몇 번 바꾸고 나서 김 씨의 병증이 놀랄 정도로 좋아졌다고 한다.

5.

이 글을 쓰면서도 부끄러운 것이 있다. 이를테면 삼성 반도체의 희생자들과 반올림 활동가들이 견뎌왔던 지난한 투쟁에 비하면 이 싸움은 애초부터 그 목적이 너무나 제한적이고, 개별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이 사례를 소개한 것은 때론 공감의 힘이 법의 강력한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함께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문제로 몇 가지 도움을 청하기 위해 어느 국회의원실에 연락을 했는데 왜 돌려보내지 않고 받았느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법원의 종국적인 판결은 강력한 힘이 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 싸움은 애초부터 최소한 이 정도의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던 싸움이었다. 어머니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포기하지 않은 이상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는 어머니가 내민 손을 잡았을 것이다.

세월호가 그렇고 쌍용자동차가 그렇듯이 어머니가 내민 손을 지역의 노동자, 시민들이 기꺼이 잡아주었고 어머니가 편지를 낭독할 때 함께 눈물을 흘려주었다. 이렇게 공감의 힘은 대법원의 종국적인 판결을 이기기도 한다.

필자소개
청주노동인권센터.음성노동인권센터 노무사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