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상 뒤엎은 영국 총선,
    보수당 과반 실패, 노동당 약진
    제레미 코빈 “노동당이 영국 정치의 얼굴 바꾸었다”
        2017년 06월 10일 02:4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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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 벤 (Big Ben)으로 가는 템즈 강(江)은 자욱한 안개로 뒤덮였다. 웨스터민스터 브릿지를 건너기 위한 피할 수 없는 내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맨 앞에서 다리를 건널 주인공이 누가 될지를 놓고 호사가들의 목소리만 높아지고 있다.

    영국 조기총선 결과, 보수당이 과반의석을 확보하는데 실패해 테레사 메이(Theresa May) 총리가 물러날 위기에 처했다. 총 650석 중에 보수당은 318석, 노동당은 262석, 스코틀랜드국민당(SNP)은 35석을 차지했다. 자민당(LD)은 12석, 민주적 통일당(DUP)은 10석, 신페인(Sinn Féin)은 7석, 웨일즈민족당(Plaid Cymru)은 4석을 차지했다. 영국 녹색당(England and Wales)의 유일한 하원의원이자 당수인 캐롤라인 루카스(Caroline Lucas)는 3선에 성공했다.

    보수당은 제1당의 자리를 지키기는 했지만 현재의 330석에서 12석을 빼앗긴데다 과반수에 8석이 미달하는 ‘헝 의회'(Hung Parliament)’가 탄생함에 따라 연정이 불가피해졌다. 과거 한차례 연정을 했던 자민당이 유력한 상대이지만 자민당의 팀 패런(Tim Farron) 대표는 투표 당일 “어떤 선거결과가 나오든 보수당과 노동당의 연정에는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일찌감치 선언한 것이 걸림돌이다. 북아일랜드의 지역정당인 DUP는 과거 IRA의 해산과 북아일랜드의 자치권을 부여하는 평화협정에 강력하게 반대한 전력 등으로 보수당이 파트너로 선택할 가능성은 높지 않을 전망이다. 이에 따라 정부 구성이 교착상태가 계속될 경우 다른 정당들의 양해 하에 사상 두 번째로 보수당만의 소수파 정부가 탄생할 가능성도 남아 있다.

    보수당 메이 총리

    실패로 끝난 메이 총리의 승부수, 당내 투쟁 조짐

    이번 조기총선은 브렉시트(유럽연합(EU) 탈퇴) 협상을 앞두고 압도적인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메이 총리가 전격적인 결정을 내림에 따라 실시됐다. 조기총선이 발표될 당시만 하더라도 노동당에게 20% 이상을 앞서는 것으로 나타나 메이 총리의 승부수가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브렉시트에 힘을 실어달라는 주장만 반복한 것이 오히려 유권자가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 국민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진 유권자들이 지금은 하드브렉시트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다.

    특히 당내에서 논의조차 된 적이 없는 노인요양 대상자를 축소하는 공약을 내놓았다가 노인층의 거센 역풍에 직면하면서 지지율이 급락했다. 노동당의 제레미 코빈 당수는 ‘치매세’라고 공세에 나서면서 지지율 격차를 좁히는데 성공했다. 맨체스터에 이어 투표 직전 일어난 런던 브릿지 테러도 메이 총리에게 치명적이었다. 메이 총리는 5년 동안 내무장관으로 재직할 때 지속적으로 경찰 숫자를 줄인 것이 유권자들의 분노를 가져왔다. 메이 총리는 인권법을 개정해서라도 테러를 차단하겠다고 진화에 나섰지만 지지율의 눈금은 움직이지 않았다.

    메이 총리의 결정이 몇몇 측근들에만 의존하는 것이 실책을 거듭하는 원인이라는 것이 언론의 분석이다. 역풍을 맞은 갑작스런 노인요양 공약이나 경제정책이 희미한 총선공약이 모두 측근들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전격적인 조기총선 발표도 보수당 지도부들은 배제한 채 측근인 닉 티모시(Nick Timothy)와 피오나 힐 (Fiona Hill)의 수석 보좌관 등과 논의한 탓에 메이 총리는 선거결과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선거결과가 발표되자 벌써부터 메이 총리의 사퇴를 촉구하는 당내투쟁이 시작되고 있다. 데이비드 캐머런 (David Cameron) 전 총리 시절 2인자였던 조지 오스본(George Osborne) 전 재무장관은 다우닝가(Downing Street)의 측근들이 주도한 “역대 최악의 총선공약”이 재앙의 선거결과를 가져왔다며 메이 총리의 사퇴를 촉구하고 나섰다. 오스본 전 장관은 총선공약에 대해 철저한 “부검(postmortem)”이 필요하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 외무장관이 “토리(보수당 애칭)의 전면에 나설 것”을 요청하면서 총리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메이 총리가 실각하고 보수당 주도의 연정이 이뤄질 경우 총리 후보 자리에 한발 앞서 있는 인물은 보리스 존슨 외무장관이다. 국민투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캐머런 전 총리가 사임할 당시 존슨 장관이 총리 후보로 가장 먼저 거론되었지만 평소 잦은 독단적인 행보로 인해 당내 적들이 많다는 것이 약점으로 작용했다. 이 때문에 캐머런 전 총리가 사임할 당시 보수당 의원들은 당을 통합으로 이끌 적임자가 필요하다는데 의견이 모아지면서 메이 내무장관이 급부상했다.

    위기에 빠진 당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이번에도 비슷한 의견들이 주류를 형성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당내 의원들에게 신망이 높은 차세대 주자 앰버 러드(Amber Rudd) 내무장관이 유력한 후보다. 러드 장관은 메이 총리가 추진하고 있는 ‘하드 브렉시트’와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EU에서 탈퇴하더라도 단일시장과 관세동맹은 유지하는 것을 선호하는 입장이다. 예상치 못한 악재는 자신의 헤이스팅스-라이(Hastings and Rye) 선거구에서 무명의 노동당 후보에게 불과 190여 표 차이로 간신히 승리하면서 경력에 치명상을 입었다.

    에너지 장관 등 내각의 주요 자리를 거친 마이클 패런(Michael Fallon) 국방장관도 유력 후보다. 업무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과 당내 적들이 없다는 것이 장점이지만 정치력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붙어 있는데다 확실한 아군들이 없다는 것이 약점이다. 예상치 못한 선거결과에 따라 당장 열흘 후에 시작될 예정이었던 브렉시트 협상도 보수당에게는 난제다. 데이비드 데이비스(David Davis) 브렉시트 장관이 임시 성격의 총리를 맡을 가능성도 남아 있다.

    BBC방송은 메이 총리의 측근의 말을 인용해 “메이 총리가 (아직은) 사임할 의사가 없다”고 보도했다. 메이 총리가 공식적으로 사퇴를 거부하고 자민당이나 DUP와의 연정에 나선다면 당내 투쟁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단순다수득표제의 최대 피해자인 자민당은 2010년 보수당과 선호투표제 도입을 연정의 조건으로 합의했지만 보수당의 사보타주로 국민투표에서 부결됨에 따라 당의 지지기반을 대거 잃으면서 한 자리 숫자의 정당으로 몰락한 앙금이 거센 탓에 연정에 대해 부정적이다. 자민당의 팀 패런도 당의 분열로 이어질 수 있어 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DUP와의 연정은 보수당내 거센 반발을 불러올 수도 있다.

    코빈 노동당 당수

    노동당 코빈 당수, 좌파의제를 전면에 내세우며 사실상 승리

    선거결과 노동당은 32석을 늘린데 이어 보수당의 과반을 저지한 것으로 나타나자 제레미 코빈(Jeremy Corbyn) 당수는 “노동당이 영국 정치의 얼굴을 바꾸었다”며 노동당의 승리를 선언했다. 제1당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지 못했지만 코빈은 “메이 총리는 즉각 사퇴하고 국민이 원하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는데 협조할 것”을 촉구하면서 노동당에게 권력을 넘기라고 주장했다. 실현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자민당과 스코틀랜드국민당과의 정책공조를 통해 사상 두 번째의 노동당 소수정부를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의석 숫자를 늘리기 위한 메이 총리의 승부는 실패했지만, 정부 구성은 의석 숫자만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승부수를 국민들 앞에 던진 것이다.

    선거 초반만 하더라도 노동당의 앞날은 어두웠다. 여론조사의 발표가 그대로 투표 당일까지 이어진다면 코빈 당수의 정치적 생명도 마지막이 될 것으로 예상됐다. 보수당의 총선 공약과 메이 총리의 몇 차례 실족이 노동당에게 기회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었다. 두 차례의 테러도 보수당의 악재로 작용했고 노동당에게는 호재인 것도 분명했다. 하지만 노동당이 약진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데이비드 밀리밴드(David Miliband) 당수 시절 당내 다수파들은 당을 끊임없이 우회전 시키면서 노동자 당원들의 대거 이탈을 가져왔고, 당의 기반인 도시들에서 노동자들의 외면을 받아 2015년 총선에서 몰락을 자초했다. 밀리밴드가 사퇴하자 안젤라 이글 (Hena Eagle)을 중심으로 하는 우파들은 다시 당권에 나섰지만 코빈의 호소에 응답한 노동자들이 대거 노동당으로 복귀함으로서 벤(Tony Benn) 좌파 당수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원내노동당은 코빈을 당수에서 몰아내려는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노동자 당원들의 바리게이트로 또 다시 좌절됐다.

    조기총선이 시작되자 코빈은 우파들이 오른쪽으로 구부린 막대기를 왼쪽으로 구부리며 선거에 대응했다. 좌파들의 전통적인 의제인 주택, 의료(NHS), 대학(등록금), 교통 등을 개혁하는 공약을 전면에 내세웠다. 당내 우파들이 보수당의 캐머런 총리가 추진하는 트라이던트 핵잠수함 계획에 찬성표를 던진 것을 바로 잡기 위해 폐기를 공약했다. 반세기만에 토니 벤을 비롯한 노동당 좌파들의 노선이었던 ‘일방적 핵 폐기’의 시작을 선언한 셈이었다.

    좌회전의 신호는 성공했다. 노동당은 제조업 쇠락지역인 러스트 벨트(Rust Belt)를 다시 탈환했다. 노동자들은 맨체스터, 리버풀, 그리고 북부지역의 에딘버러와 글래스고를 붉게 물들이는데 응답했다. 좌회전 공약에 노동자들이 응답한 것이 승리의 요인이었다. 이른바 코빈 전략 리스트(Jeremy Corbyn’s target list)도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주요 전략지역인 잉글랜드 남부, 베드포드(Bedford), 브리스톨(Bristol)에서 대부분 승리했고, 웨일즈 지역에서는 압승을 거둬 노동당 지도부들조차 놀라움을 표시했다. 특히 켄터베리(Canterbury) 선거구에서는 코빈이 발탁한 신예 로즈 더필드(Rosie Duffield)를 내세워 30년간 의원직을 유지하던 보수당의원을 0.3% 차이로 눌러 화제를 모았다. 켄터베리 선거구는 1885년 설치된 이래 노동당이 의석을 차지한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

    노동당이 선전을 거둠에 따라 코빈 당수와 좌파들의 입지가 강화될 전망이다. 새롭게 당선된 초선의원들 중에는 좌파성향의 의원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는 것도 코빈에게는 커다란 원군이다. 원내노동당에서는 코빈 당수가 여전히 소수파에 불과하지만 약진한 선거결과에 따라 우파들의 목소리는 잦아들 전망이다. 메이 총리가 실각한다면 눈앞으로 닥친 브렉시트 협상에서 코빈 당수는 단일시장과 관세동맹을 유지하는 ‘소프트 브렉시트’를 당론으로 밀어부칠 것으로 보인다.

    위기에 빠진 스터전, 독립투표 재추진 난망

    스코틀랜드 국민당(SNP)의 니콜라 스터전(Nicola Sturgeon) 당수는 적신호가 켜졌다. 지난 선거에서 스코틀랜드를 석권하며 54석을 차지해 강력한 지도력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던 니콜라 스터전은 35석을 차지하는데 그치면서 당수 자리마저 흔들리고 있다. 에딘버러를 자민당에 내준데 이어 심장인 글래스고도 노동당에게 빼앗김에 따라 지도력에 치명상을 입었다. 조기총선에서 현재의 의석을 지킨 후 스코틀랜드 독립투표를 재추진하려는 계획도 차질을 빚을 전망이다. 노동당의 소수정부에 신경 쓰기보다는 당을 추스르는데 전념할 것이라는 전망과 소수정부 구성에 적극 나서면서 당의 시선을 돌릴 것이라는 전망이 엇갈리고 있다.

    녹색당은 두 번째 하원의원의 탄생을 기대했지만 캐롤라인 루카스 대표가 3선 고지를 밟은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레이트 런던의 세인트 판크라스(St Pancras) 선거구를 떠나 셰필드 (Sheffield Central)로 선거구를 옮기면서 10% 이상의 득표를 기대했던 나탈리 베넷(Natalie Bennett) 전 대표는 8%를 얻는데 그쳤다. 강력한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는 노동당의 폴 블롬필드(Paul Blomfield)의 선거구에 도전한 것은 다소 의외라는 분석이다. 블롬필드는 71%를 득표해 전국 최다득표율을 기록했다. 코빈 당수가 녹색의제에도 적극적이기 때문에 노동당의 소수정부가 탄생할 경우 녹색당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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