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다운 나라, 노조다운 노조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2017년 06월 08일 07:5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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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6월 항쟁 30년이다. 꼭 30년 만에 다시 87년 6월에 버금가는 항쟁이 있었다. 우리는 현직 대통령을 탄핵과 동시에 감옥에 보냈다. 세계적으로도 드문 투쟁을 성공적으로 했다. 깜깜한 밤, 오로지 촛불 하나에 의지하여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하여 아주 많이 온 줄 알았다. 그러다 문득 돌아보았다. 뭔가 이상하다. 주위 풍경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 익숙하다. 정신을 차리고 찬찬히 보니 사실 그리 멀리 온 게 아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지난 2012년 박근혜의 당선 직후 “지금 펼쳐지고 있는 정치는 순전히 김대중과 노무현이라는 두 대통령의 오류에 바탕을 둔 정치다. 조금만 더 국민과 노동자 대중의 마음을 잡는 정치를 했다면 이명박, 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지는 수구 반동의 정치를 낳지는 않았을 것이다.”라는 글을 썼었다. 그 정치는 지난 9년간 야만의 시대를 불러왔다. 세월호에서 수백 명이 죽었고, 평화로운 집회 도중에 백남기 농민도 죽임을 당했다.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절망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가? 수백만의 촛불로 비로소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렸다.

    2016년 12월 촛불집회의 한 장면

    문재인 대통령은 “촛불혁명”이라 자주 말한다. 그러나 냉정하게 돌아보면 혹자가 “촛불혁명=만회혁명”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듯 지난 9년 동안의 암흑을 만회한 데 불과하다. 아직은 혁명의 가능성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사회운동의 대응이 이후 이것이 혁명이었는지 아닌지를 규정하게 될 것이다.

    군부독재 타도 이후 진행된 87년 6월 항쟁 주역들의 정치는 ‘노동을 배제한 민주주의’로 귀결되었다. “타는 목마름으로” 함께 외쳤던 그 민주주의에 아쉽게도 노동 현장의 민주주의는 없었다. 노동자들은 6월 항쟁에 뒤이은 7,8,9 대투쟁으로 스스로의 권리를 찾았고,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진 두 대통령의 오류는 무엇이었는가? 하나만 꼽자면 노동운동의 지지를 버린 데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인 2003년 1월 9일 두산중공업에서 배달호라는 노동자가 ‘65억원 손배가압류 철회, 해고자 복직, 노조탄압 중단’을 촉구하며 분신자살을 했다. 당시 이 죽음을 두고 이런 진단이 있었다.

    “2004년 총선에서 6월 항쟁 주체가 의회권력을 장악하여 항쟁을 혁명으로 끌어올린다면 그것은 권위적 보수주의자들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현실로부터의 커다란 진보를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6월 항쟁의 이 혁명적 국민통합이 7~9월에 대한 배제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혁명을 필요로 하게 될 불구적 혁명으로 남게 될 것이다. 배달호의 죽음이 시사하는 것은 바로 이점이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후 정치는 ‘노동 배제의 길’을 선택했다. 손쉬운 정리해고, 필수유지업무 등 공공부문 파업권 제한, 비정규직 확산을 불러 온 악법 등은 모두 김대중, 노무현 시대에 진행되었다. 이를 넘어서야 ‘진정한 혁명’이 가능하다. 문재인 정부가 돌아봐야 할 지점이다.

    2003년 2월 13일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민주노총을 방문해 간담회를 가졌다.

    사실 노무현은 취임식을 하기도 전에 민주노총을 방문했었다. “민주노총이 합리적으로 대화하고, 협상할 수 있는 상대가 되었으면 한다.”라고 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배달호가 죽고,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자 이용석이 죽어야만 했을 때 “분신을 투쟁 수단으로 삼는 시대는 지났다”라며 노동자들의 아픔에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주노총은 노무현 정권 퇴진 투쟁을 해야 했다.

    모든 실천은 교훈을 남긴다. 문재인 정부는 그로부터 무엇을 배웠을까? 그렇다고 막 출범한 정부에 대해 노무현과 같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이를 백안시하거나 나 몰라라 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문재인 대통령이 같은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지난 시절 왜곡된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이명박, 박근혜가 저지른 각종 불법적인 노동탄압에 대해 반대편으로 강하게 휘어야 한다. 민주노총이 제기하는 “민주적 노정‧노사관계 구축, 최저임금 1만원, 비정규직 문제 해결, 공무원과 교사,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조 할 권리, 노동시간단축, 사회안전망 확대” 등등이 그것이다.

    동시에 우리도 촛불로 만든 정부가 촛불이 지향했던 목표를 올바로 실현해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협력과 견제’가 필요하다. 정권 탓만 할 것은 아니다. 노동운동 역시 지난날의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물이 들어오면 잽싸게 몸을 껍데기 속에 집어넣는 조개처럼 다시 노동조합이라는 자신들만의 울타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는 안 된다. “정치적 성숙은, 노동운동이 자기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 제도를 변혁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라는 충고가 생각나는 이유다.

    나라다운 나라, 노조다운 노조

    노동운동은 수십 년 동안 쌓여 온 적폐 청산을 위한 사회제도 변혁의 맨 앞에 있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검찰, 언론 등 사회적 적폐를 청산하려 한다면 가장 강력한 우군이 되어야 한다. 이번 대선 결과가 보여 주듯 보수진영은 아직 건재하다. 납작 엎드렸다가 기회가 되면 다시 나타나는 ‘바퀴벌레 보수’는 진영을 정비하는 중이다.

    “나라다운 나라”를 자주 언급하는 대통령을 맞아 우리가 할 일은 “노조다운 노조”를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 지난 역사가 보여준 것은 개혁을 말하는 보수·중도 여당의 실패는 곧바로 노동자의 삶과 진보정치에도 타격을 준다는 점이었다. 현재 진행 중인 국회 청문회가 보여주는 것처럼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다. 한편으로는 개혁을 추동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혁의 한계를 넘어 한국사회의 진보적 재편을 모색해야 하는 고단한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최근 문재인 정부의 일자리 위원회 참여 여부를 둘러싸고 민주노총 내부에서 찬반 논란이 있다. “조속한 참여 결정을 통해 공공부문 일자리, 비정규직 정규직화 방안 등 정부의 일자리 정책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는 참여 의견과 “노·정 교섭 등을 포함하여 정부의 입장을 추가적으로 더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반대 의견이 있다. 예전 노무현 정부의 노사정위원회 참여 여부를 둘러싼 갈등이 떠오른다. 당시 대의원대회에서 진행된 폭력적인 모습은 언론의 먹잇감이 되었었다.

    ‘대화와 투쟁’, 그 칼날 위의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바깥에서 비판하는 것만이 아니라 참여 속에서 노동자의 힘을 강화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갓 출범한 정권에 대한 “신자유주의 정권의 한계에 머무를 것” 등등의 섣부른 예단보다는 참여를 통한 모색이 더 필요하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태복음 10장 16절)” 예수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며 한 말이다. 마찬가지로 원칙과 방향을 유지한 선상에서의 지혜가 필요하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맑스의 말이다. 하지만 노무현의 비극으로 끝난 개혁세력의 집권이 이번에는 희극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 여부는 일차적으로 문재인 정부의 몫이다. 그러나 촛불에 참여한 우리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 돌아보니 비록 애당초 있던 곳에서 멀리 전진한 것은 아니지만 참여했던 대중들의 뜨거운 열기는 이후 역사를 발전시킬 소중한 자원이다. 6월 항쟁이 그러했듯 촛불 항쟁 역시 새로운 길을 열게 될 것이다. 30년 만에 온 역사적 전환점,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해야만 한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역사적 소명이다.

    필자소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전 정책실장. 정치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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