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신의 추억③ - 애향단 활동
        2012년 08월 20일 05:1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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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초등학교 바로 아래에 살았기 때문에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는 엎어지면 코 닿을 데로 채 100m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시 학교에 등교하는 일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애향단이란 게 있어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동네 친구들이 모두 모여 함께 행진하여 등교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학교 앞 50m 정도 되는 삼거리에서 동네 친구들이 다 모이길 기다렸다가 ‘상포 애향단’의 깃발아래 줄을 맞춰 행진을 시작하였고, 학교 운동장에 들어서서는 두 줄로 열을 지어 정렬한 후 애향단 단장의 지시에 따라 교정에 있는 태극기를 향해 ‘국기에 대한 맹세’를 큰소리로 복창한 후 애향단 깃발(그 때는 애향단 국기라고 불렀던 것 같다)을 교정에 꽂고 교실로 들어가야 했다.

    형형색색의 동네별 애향단 깃발은 태극기 바로 아래에 나란히 꽂혀 바람에 펄럭이며 아이들이 하교할 때를 기다렸다.

    70년대 애향단 조기청소 모습

    학교에 장학사라도 올라치면 그날은 난리도 아니게 된다. 학교 청소는 전날 이미 깔끔히 해놓은 상태이고, 당일은 아침 등교일부터 하나의 전투가 시작되는 것이다.

    애향단 단장이 이끌고 애향단 깃발을 든 기수가 선두에 서면 우리는 두 줄로 줄을 맞춰 팔을 힘차게 흔들며 등교를 한다. 교문에 들어설 때부터는 팔의 높이는 더욱 더 높이 올라가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복창할 때는 거의 군대 수준의 목소리가 운동장에 울려 퍼진다. 이러한 힘찬 등교 행렬은 동네별로 계속 이어지는데 마치 군부대 열병식을 방불케 했다.

    당시에는 월 수 토 3일은 아침에 등교하자마자 전체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 교장 선생님 훈화도 듣고, 학교 방침도 전해 듣는 30분 정도의 조회라는 게 있었다.

    월요일은 애국조회, 수요일은 중간조회라 불렀는데, 토요일의 조회는 애향단조회로 특별히 동네별로 정렬을 해서 조회가 진행되었다. 토요일은 학년에 관계없이 모두 4교시만 하고 끝나는 관계로 이날만큼은 동네별로 모여 애향단의 깃발아래 함께 하교를 했다.

    애향단이 한 일은 이것만이 아니다. 일요일이면 동네에 모여 동네청소도 하고 화단가꾸기도 해야 했다. 우리는 화단에 칸나도 심고, 코스모스 길을 단장하기도 했다.

    만약 이 행사에 참석하지 않으면 애향단 단장에 의해 명단이 작성되어 학교에 전달되어 불이익을 당했다. 당시 애향단 단장이 되면 팔뚝에 애향단 단장이라고 씌어진 완장을 차고 동네별로 대오를 이끌 수 있었기 때문에 꽤나 어깨에 힘을 줄 수 있는 자리였다.

    그 ‘애향단’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72년 4월 4일자 경향신문에 보면 문교부가 “새마을운동의 지원을 위해 전국에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1만 5천개의 애향단을 조직”하라고 각 시도교육위원회에 ‘시달’한 것으로 나온다. 유신이 시작될 즈음에 만들어진 이 ‘애향단’은 자발적인 조직이 아니라 문교부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관제 조직이었던 것이다.

    이어 “문교부는 새마을 봉사활동의 말단 조직이 되도록 하는 애향단을 지도교사 밑에 두어 봉사단으로서의 구실을 하게 했다”는 기사가 이어진다. 애향단이 새마을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확인케 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면서도 “문교부는 애향단의 성격은 학생의 자발적인 향토봉사에 있는 것이므로 형식에 구애되거나 강제성을 띠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는 대목에서는 당시에는 ‘자발적’이라는 말이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음에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유신 정권은 아이들에게 ‘충효정신을 함양하고 협동심을 기르도록 한다’는 미영 하에 학교생활뿐만 아니라 방과 후 생활, 심지어는 등하교 생활조차도 철저히 관리하고 통제하고자 했다. 나아가 아이들의 노동력조차 국가적 사업에 효과적으로 동원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중심에 바로 ‘애향단’이 있었다.

    초등학생에게조차 학교생활의 통제도 부족하여 방과 후까지 관리하고 통제했던 시절, 초등학생의 노동력조차 동원하는데 여념이 없던 시절, 그게 바로 그 유명한 유신시대였던 것이다.

    필자소개
    민주노동당 의정지원단장, 진보신당 동작당협 위원장을 역임했고, 현재 친구였던 고 박종철 열사의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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