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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극우파] 이탈리아 북부동맹
        2017년 06월 07일 11:0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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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정치가 다시 요동치고 있다. 집권 민주당의 루이지 베르사니 전 대표가 탈당을 선언하고 새로운 중도좌파정당의 창당을 공식선언했다. 민주당은 더 이상 중도좌파정당이 아니라는 통첩장이었다. 신당의 명칭은 ‘민주와 진보운동’(MDP)으로 결정됐다. MDP의 공동대표에는 로베르토 스페란차(Roberto Speranza) 전 민주당 원내대표와 토스카나 주지사 엔리코 로시(Enrico Rossi)가 선임됐다. 하원의원 40석, 상원의원 15석, 유럽의원 3석의 규모로 민주적 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를 전면에 내걸고 있다.

    하원과 상원 양원제인 이탈리아는 하원에서 의결된 법안이 상원에서 몇 년씩 표류하면서 처리가 지연되는 것이 다반사였다. 상원에서 다수당을 차지하지 못한 민주당은 번번이 상원의 벽에 가로막혀 집권당의 체면을 구기기 일쑤였다. 마테오 렌치 총리는 상원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법안을 국민투표에 부쳤지만 제도개혁을 주장했던 오성운동(Five Star Movement)는 다른 이유를 들어 야당들과 함께 반대운동에 나서면서 좌절됐다. 국민투표의 부결은 오성운동의 입지만 확장시켜주었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렌치는 총리와 당수직을 사퇴했다.

    하지만 불과 몇 달 만에 렌치 전 총리가 임시당대회에서 당수 선거에 출마할 것을 선언하고 9월 조기총선을 밀어붙이려고 하자 당은 곧바로 내분으로 치달았다. 민주당이 지금은 옅은 분홍색의 모호한 중도좌파정당이지만 스페렌차 전 원내대표와 로시 주지사는 공산당(PCI) 시절부터 붉은 심장을 지키고자 한 맹장들이었다. 대중적인 지지로 피렌체 시장에 오른 후 그 지지율을 바탕으로 일약 총리 후보를 차지한 렌치 전 총리와는 태생부터 달랐다. 분당의 수혜자는 베페 그릴로(Beppe Grillo)가 이끄는 오성운동이 차지할 전망이다. 오성운동은 민주당의 지지율을 추월하며 9월 총선에서 집권을 목전에 두고 있다.

    위험한 포퓰리즘 포괄정당, 오성운동

    TV 프로그램의 사회자인 베페 그릴로는 정치풍자로 전국적인 인기를 모았다. 그의 정치풍자가 못마땅했던 정치권은 그를 TV에서 추방했다. 베페 그릴로는 정치풍자를 광장으로 끌고 오면서 이전보다 더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그러면서 베페 그릴로는 미국 민주당 대통령 당내경선에서 하워드 딘이 시도했던 소셜 네트워크를 통한 아래로부터의 조직 건설에 주목했다. 부패한 정치인을 추방하기 위해서는 전국적인 지역조직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베페 그릴로의 제안은 그의 인기에 힘입어 단기간에 수십만 명이 참여하는 네트워크조직으로 성장했다. 조직의 목적은 “깨끗한 국회(Clean Parliament)”를 만드는 것이었다.

    베페 그릴로는 깨끗한 국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부패한 정치인들이 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정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판단했다. 의원을 계속해서 할수록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확신에 따라 “재선 이상 금지법”을 주장했다. 2007년 V-Day(Vendetta-Day, 엿 먹이는 날)라고 명명된 대규모 대중집회를 성공시키면서 정치권을 압박했다. 거리로 나온 수십만의 시민들을 보면서 베페 그릴로와 네트워크는 고무되었지만 이듬해 총선은 그들을 경악시켰다. 부패와 추문의 대명사인 베를루스코니가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에 화려하게 복귀했기 때문이었다.

    2008년 v-day의 모습

    현수막을 들고 있는 백발의 인물이 베페 그릴로

    정치에 직접 개입하기로 결정한 베페 그릴로는 이듬해 10월 오성운동(공공 수도, 지속 가능한 교통, 지속 가능한 개발, 인터넷 무료, 생태주의)을 창당했다. 의회와 정당에 대한 불신을 이유로 당을 표방하는 대신 운동을 당명으로 채택했다. 오성운동은 유로존 탈퇴(리라화 복귀). 채권국에 대한 채무상환도 거부, 긴축정책 중단 등을 주요하게 내세우고 있지만 의원세비 삭감, 정당보조금 폐지, 재선이상 출마금지와 같은 포퓰리즘 성격을 강조하면서 단시간에 지지를 끌어 모았다.

    2012년 지방선거에서 오성운동은 베네토 주(주도 베네치아)와 에밀리아로마냐 주(주도 볼로냐) 등 몇몇 곳에서 지방의회(코무네)를 장악했다. 베를루스코니의 자유의 인민(PdL)과 북부동맹의 지지표를 대거 흡수한 결과였다. 하락세를 거듭하고 있는, 북부지역이 주요기반인 북부동맹은 당의 기반이 뿌리째 흔들리는 치명타를 입었다. 2013년 하원의원 선거는 좌파들의 고백처럼 “오성운동이 선거의 최대 승리자”로 기록됐다. 25.5%의 득표율로 109석을 차지하며 집권을 노리던 자유의 인민에 불과 16석이 부족한 3당으로 부상했다. 이듬해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자유의 인민을 제치고 2당에 오르며 집권민주당을 턱밑까지 추격했다.

    오성운동의 지지율은 베페 그릴로의 인기에 기반하고 있다. 그의 개인 블로그는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 중의 하나”로 불리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오성운동의 약점은 베페 그릴로 그 자체이기도 하다. 언론의 표현을 요약하면 “오성운동의 결정권은 베페 그릴로의 입에만 의존”하고 있다. 이를테면 오성운동은 베페 그릴로 개인의 포괄정당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결정에 반대하는 의견을 낸 의원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제명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탈당을 선택하는 의원들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베페 그릴로는 “9월 총선에서 승리해도 총리 자리에 오르지 않을 것”을 공언하며 사심 없이 당을 이끌 것을 강조하면서 진화에 나서고 있다.

    쇠락해가는 극우정당 대표주자, 북부동맹

    1989년 새롭게 창당한 이탈리아 극우정당인 북부동맹(Lega Nord)이 본격적으로 하원의원 선거에 뛰어든 것은 3년 후였다. 이때만 하더라도 당수인 움베르토 보시(Umberto Bossi)가 당의 유일한 상원의원이었으며, 하원의원도 고작 한명에 불과한 미니정당이었다. 1992년 선거에서 북부동맹은 55석을 차지하며 일약 제4당 자리에 올랐다. 북부동맹은 2년 후 실시된 조기총선에서 미디어재벌인 베를루스코니가 창당한 전진이탈리아(FI)와 선거연합정당인 ‘자유동맹’을 결성하고 110석이 넘는 의석을 차지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불과 5년 만에 제1당을 차지한 전진이탈리아와 연정을 구성하며 유럽전역을 충격에 빠트렸다.

    북부동맹은 이탈리아 파르마(Parma) 지역에 위치한 포(Po) 강(江)을 경계로 북부지역의 독립을 추진하는 것이 당의 주요 목적이다. 다른 극우정당들과 마찬가지로 유럽회의주의(EU탈퇴)도 당의 이데올로기 중에 하나다. 밀라노를 주도로 하는 롬바르디아(Lombardia)가 주요 기반이다. 비옥한 평원이 드넓게 자리 잡고 있어, 포도를 비롯해 각종 농업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밀라노를 중심으로 제조업도 잘 발달되어 있다. 요컨대, 잘 사는 북부주민들이 낸 세금이 자신들이 아니라 가난한 남부지역에 사용되고 있다며 ‘독립북부공화국’을 건설하자는 것이 북부동맹이 주장이다. 제노아, 토리노, 베네치아, 남부티롤 등이 역사적으로나 문화(언어)적으로 다른 것도 작용하고 있다.

    1987년 지방의회선거에 참여하면서 북부동맹(Northern Alliance)으로 이름을 개칭하고 이후 지역정당의 이미지를 탈각하기 위해 소규모 지역정당들과 통합을 거쳐 다시 당명을 연방북부동맹(Lega Nord Fedelale)로 변경했다. 1996년 대성공 이후 당의 지지율은 계속해서 하락세를 면치 못하다가 집권당인 좌파민주당(DS)이 내부분열로 분당된 상황에서 실시된 2008년 선거에 베를루스코니와 손을 잡고 과거의 지지율을 회복하며 연정에 참여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베를루스코니가 다시 부패와 탈세, 추문으로 얼룩지면서 북부동맹도 몰락의 길을 걸었다. 현재는 북부지역 두 곳의 주 의회를 장악하고 있지만, 하원과 상원의원은 각각 15석과 12석으로 추락해 창당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움베르토 보시

    극우정당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하지만 북부동맹 역시 당의 설계자이자 지도자인 움베르토 보시(Umberto Bossi)를 빼놓고 설명할 수는 없다. 젊은 시절 움베르토 보시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강력한 옹호자였다.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한 보시는 공산당이 주장하는 의료정책에 매료됐다. 이제 막 출발한 의료제도는 전국민이 대상이 아닌데다 소득의 7%에 이르는 과도한 의료세는 서민들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그런 그는 우연한 기회에 스위스와 인접한 이탈리아 최북단 소도시들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주의정당인 발도스탄 연합(Valdostan Union)의 지도자 브루노 살바도리(Bruno Salvadori)를 만나면서 사상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교감을 나누던 살바도리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보시는 그가 주장하던 노선을 자신이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북부동맹의 전신인 롬바르디 동맹(Lega Lombardy)을 결성한 것은 1981년이었다.

    1994년 북부동맹이 베를루스코니의 자유동맹과 첫 연정을 하고 있을 때 ‘탄젠토폴리 (Tangentopoli: 뇌물의 도시)’라는 밀라노 스캔들이 터졌다. 관련 정치인과 공무원들의 연이은 자살 소식이 뉴스를 도배하고 크락시 전 총리가 망명하는 등 뇌물이 일상화된 이탈리아에서도 유례없는 대형스캔들이었다. 총리인 베를루스코니가 연루되어 검찰에 기소되었고 북부동맹의 지도자인 보시도 가담한 혐의로 소환되었다. 당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보시는 연정을 탈퇴하며 조기총선이라는 승부를 꺼냈지만 10년간 동맹은 과거의 영화를 회복하는데 실패했다. 2008년 총선에 보시는 베를루스코니와 다시 손을 잡고 그의 화려하게 복귀의 대가로 연정에 참여하는 일시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연정 내내 베를루스코니가 부패 등에 연루되면서 북부동맹의 지지율은 다시 급락했다.

    보시의 롬바르디동맹의 출발은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은 사회운동을 지향하는 결사체였다. 선거에 대한 계획은 북부지역의 지방의회가 주요 타깃이었다. 이후 북부동맹은 북부지역에 위치한 주도가 밀라노인 롬바르디(Lombardy)와 베네치아 두 곳의 주에서 집권을 하고 있다. 두 지역을 기반으로 인근 주에서도 지지율을 계속 늘려가고 있다. 볼로냐(Bologna)가 주도인 에밀리아-로마냐(Emilia-Romagna)에서 20%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고, 제노아가 주도인 리구리아(Ligulia)에서도 20% 이상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제3당에 올라있다. 남진(南進) 타깃은 제2당까지 올라선 피렌체가 주도인 투스카니(Tuscany)이다. 투스카니는 집권 민주당의 엔리코 로시 주지사가 탈당해 새로운 중도좌파정당인 MDF에 참여해 민주당의 조직이 급속하게 와해되고 있다. 피렌체 시장 출신인 마테오 렌치 전 총리는 총리 사퇴 후 당권을 재 장악했지만, 자신의 지지기반에서 MDF를 진압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틈을 북부동맹이 공세적으로 파고들고 있다.

    북부동맹은 2013년 총선에서 롬바르디 주지사인 로베르토 마로니(Roberto Maroni)을 당수로 교체하고 전면에 내세웠지만 성적표는 더 낮은 점수였다. 보시가 다시 당수 복귀했지만 9월로 예정된 조기총선은 오성운동이 북부지역에서 북부동맹의 지지표까지 흡수하고 있어 당의 전망은 적신호다.

    이탈리아 좌파는 지금

    합법적으로는 유럽에서 전후 최대의 지지율을 가지고 있던 이탈리아 공산당은 90년대 이후 수차례의 우회전을 통해 중도정당인 민주당으로 탈각했다. 후퇴를 거듭하던 당내 좌파들은 탈당해 MDP를 창당하며 과거의 좌파세력을 규합하고 있다. 아직은 한 자리 숫자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는 이들이 유의미한 의석을 조기총선에서 차지할지는 미지수다. 한 표라도 더 얻는 정당에 과반수 의석을 보장해주는 선거법 탓에 “MDP에 투표하는 것은 오성운동의 집권을 도우는 것”이라는 이탈리아의 비판적 지지가 MDP의 최대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게다가 머리만 크고 다리는 무거운데다 다국적 연합체인 MDP이 얼마나 과거의 경험을 살려 기민하게 대응할지 아직은 의문부호다.

    공산당이 탈각해 중도좌파정당보다 더 오른쪽으로 이동을 계속하고 있을 때, 니키 벤돌라(Nichi Vendola)가 이끌고 있는 좌파생태자유(SEL)가 민중들의 새로운 희망으로 주목을 받았다. 니키는 십대 중반에 공산당(PCI)에 참여해 당이 분당될 때 공산주의 재건당(PRC)에 가담했다. 2005년 지방선거에 PRC의 첫 아풀리아(Apulia) 주지사에 당선되면서 차세대 대표주자로 호명됐다. 2006년 총선에서 PRC는 창당 이후 최대의석(41석)을 얻으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당을 절대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파우스토 베르티노티(Fausto Bertinotti)의 독단적인 행보가 잦은 분란을 야기했다. 비틀거리던 당은 2008년 조기총선에서 전후 최초로 공산주의자가 단 한명도 하원에 없는 최악의 성적표를 받으며 몰락했다. 니키는 PRC을 떠나 생태주의자들을 포함한 좌파생태자유(SEL)의 창당을 주도하고 주지사 재선에 성공했다.

    이탈리아 하원의원 선거는 인구가 아주 적은 일부지역에서 소선거구 단순다수득표제를 실시하는 것을 제외하고 전면적인 비례대표제를 실시하고 있다. 하지만 제1당이 안정적으로 정부를 운영할 수 있도록 1%라도 더 얻은 정당(정당연합)에게 의석의 55%인 340석을 보장한다. 이런 제도 탓에 가장 딜레마에 빠진 것은 SEL이었다. 독자적인 선거대응은 민주당의 집권을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베를루스코니의 총리복귀를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2013년 총선에서 SEL은 민주당과 정당연합으로 선거에 대응하며 베를루스코니의 재등장을 저지했다.

    민주당 렌치 총리의 일방통행와 거듭된 우회전으로 당이 내분에 빠지자 니키는 SEL을 새롭게 재창당하기로 결정했다. 2016년 겨울, 민주당의 하원의원이자 좌파경제학자인 스테파노 파시나(Stefano Fassina)가 주도하는 ‘좌파의 미래(Future to the Left)’와 베페 그릴로의 독단적인 결정에 반발해 탈당한 오성운동의 개혁파들과 ‘Italian Left(SI)’를 새롭게 창당했다. 9월로 예정된 총선에서 SI는 다시 고민에 빠져있다. MDP가 총선에 독자적인 대응을 분명히 하고 있어 SI까지 독자대응을 한다면 오성운동의 집권은 더 확실해질 전망이다. 중도좌파정당의 색깔도 희미해진 민주당과 손을 잡는 것은 당의 분란을 초래할 수도 있어 어떤 선택을 할지 주목되고 있다.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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