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선 쟁점으로 부각한
    영국 공공서비스의 재국유화 문제
    [세계의 노동자] 총선, 브렉시트, 민영화의 대안
        2017년 06월 05일 10:0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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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8일 총선을 앞둔 5월 16일, 영국 노동당이 ‘소수 아닌 다수를 위하여’(For the Many, Not the Few)라는 제목으로 총선 매니페스토(공약집)를 발표했다. 공약에는 제레미 코빈(Jeremy Corbyn) 당수의 지도로 진행되는 노동당의 좌경화 시도가 드러나기 때문에 영국뿐 아니라 세계 차원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받고 있다.

    특히 1980~90년대를 거쳐 민영화된 대중교통, 에너지, 상수도를 비롯한 다양한 공공서비스에 대한 공적 소유 확대 방안이 부각되면서 30년 동안 정치권에서 논외로 치부되던 ‘공공서비스 재국유화’를 정치 쟁점으로 제기하여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총선 공약집을 들고 있는 노동당 제레미 코빈 대표(방송화면)

    영국 공공부문 민영화의 폐해

    마가렛 대처 총리의 영향으로 영국은 민영화가 가장 많이 진행되며 세계 민영화 흐름을 촉발시킨 나라로 유명하다. 1980~90년대 공공부문 민영화가 영국 노동자민중에게 큰 피해를 입힌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오늘날 영국의 철도요금은 유럽에서 가장 비싸고 요금제도도 가장 복잡하다.

    1989년 민영화 이후 일반 가정의 상수도 요금은 40%나 올랐다. 작년에는 민간 전력회사들이 고객들에게 수백만 파운드 이상의 요금을 과다 청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민간기업의 횡포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공공기관의 분할, 민영화와 업무 외주화는 또한 해당 노동조합의 조직률 하락과 교섭력 약화를 야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사회에서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자유경쟁에 대한 신념이 깊기 때문에 최근까지 노동당 내에서도 민간시장을 주어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했다.

    매니페스토, 새로운 패러다임

    이번 매니페스토로 노동당은 과거 경향과의 단절을 꾀하고 있다. 매니페스토는 ‘재국유화를 경험한 나라에서 교훈’을 얻으면서 ‘저렴한 요금, 책임성 강화와 지속가능한 경제를 실현하기 위해 주요 기간산업을 공적 소유로 되돌리겠다’고 선언한다.

    구체적으로 보자. 민간 철도회사에 의해 운영되는 철도노선은 프랜차이즈 계약이 만료되는 시점에 공적 소유로 되돌리고, 에너지 공급망에 대한 통제권을 회수, 공적 분산형 에너지 체제로의 전화를 추진하겠다고 한다. 지역별 상수도 공기업을 육성하여, 그들 간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2014년 매각으로 민영화된 우정공사를 빠른 시일 내에 재국유화한다는 구상도 제시했다.

    재국유화를 위한 노동·사회단체의 투쟁

    재국유화 공약은 영국 사회에서 상당한 논쟁을 촉발했지만 매니페스토에 담긴 내용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일부 영국 노동조합들이 수년 간 주장한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예컨대 최근 5년 동안 영국노총(TUC)과 교통 분야 가맹조직들이 철도 재국유화를 궁극적인 목표로 하는 ‘철도 행동 캠페인’(Action for Rail Campaign)을 진행하고 있다. 이 캠페인은 요금 인상과 같이 이용자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당면 문제를 출발점으로 분할민영화의 문제점에 대한 대국민 선전과 교육 사업이 중심이다. 또한 민영화를 가속화시키는 유럽연합 지침을 비판하고 미래 공공철도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정책 연구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에너지 민주주의

    영국 에너지 산업의 일부 노조들은 재국유화와 재생에너지 도입을 중심으로 하는 에너지 체계 전환 요구로 창립된 세계 연대체인 ‘에너지민주주의노조네트워크(TUED, Trade Unions for Energy Democracy)에 참여하고 있다. 이 노조들은 지난 2월 28일부터 이틀간 전략 워크숍을 진행한 후, 3월 13일 노동당 에너지 그림자 장관(그림자 장관: 집권당의 내각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는 야당의 분야별 장관)을 만나 제안사항을 제시했다. TUED의 웹사이트에 따르면 이 면담에서 그림자 장관은 분기별 1회의 정기 면담과 지속적인 대화를 제안했다고 한다.

    TUED의 영향은 매니페스토에 뚜렷이 드러난다. ‘지속가능한 에너지 체계’라는 항목에는 단계별 에너지 국유화 방안과 함께 재생에너지 도입, 주택 및 공공건물 단열 사업과 프래킹 금지 계획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서술돼 있다.(프래킹: 수압파쇄공법. 물, 화학제품, 모래 등을 혼합한 물질을 고압으로 분사해 바위를 파쇄해 석유와 가스를 분리해 내는 공법. 주로 세일가스 채취에 사용되나 프래킹 기술에 사용되는 화학물질이 지하수와 토양을 오염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환경운동의 반대 투쟁이 촉발됐다.)

    노동조합뿐 아니라 최근 재국유화를 요구하며 활동하는 사회단체들도 많아지고 있다. 예를 들어 2013년에 창립된 ‘우리 소유다’(We Own It)는 추가적인 민영화를 저지하고 재국유화 주장을 위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정책 및 여론조사 사업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노동조합과 사회단체의 활동은 이번 노동당 재국유화 공약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배경이다.

    재국유화와 브렉시트

    작년 6월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에서 영국노총(TUC)은 잔류 입장을 택했고, 조합원들을 설득하기 위한 잔류 찬성 캠페인을 진행했다. 그러나 국유화를 우선시하는 일부 가맹노조들은 영국노총의 입장과 달리 잔류 캠페인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공개적인 탈퇴 입장을 발표했다. 그들은 단일시장의 통합을 목표로 제정되는 유럽연합의 지침들이 민영화를 되돌리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고 주장했다. 이 노조들은 브렉시트를 재국유화를 실제 추진할 기회로 보고 있다.

    그러나 테리사 메이 총리가 현재 추진하는 방향으로 브렉시트가 진행된다면 재국유화는 영국이 유럽연합에 속했을 때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지만 올해 초 메이 총리는 유럽의 단일시장에 대한 접근을 보장하는 합의를 체결하지 못한 채 탈퇴하게 되면 유럽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세금 인하와 추가적인 규제완화를 추진하겠다고 발언한 바 있다. 또한 메이 총리는 영국의 국가의료보건서비스(NHS)가 미국과의 새로운 자유무역협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총선 운동이 한참 진행 중인 6월 1일에는 보건부에서 발표한 연구용역 보고서가 자산건전화 방안으로 제시한 NHS 자산 매각 등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노동당이 집권한다고 해도 재국유화가 가능한 브렉시트가 된다는 보장은 없다. 노동당은 유럽연합과의 ‘합의 없는’ 탈퇴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있는데, 그럴 경우 유럽연합 지침의 상당 부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재국유화 추진을 고수한다면 브렉시트에 대한 공약을 지키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영국 총선 전망

    한계가 많지만 영국 노동조합과 사회단체들의 성과인 영국 노동당의 재국유화 공약은 신자유주의 경제를 극복(완화?)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경제적 패러다임의 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총선 여론조사에 따르면 보수당이 여전히 노동당을 앞서고 있어 노동당이 집권해서 실제 공약을 실행할 기회를 얻을 가능성은 아직은 낮아 보인다. 작년 브렉시트 투표 후에 실패에 대한 책임을 둘러싸고 노동당 내 심각한 갈등이 발생했다. 또한, 브렉시트 전후 과정으로 인해 영국 사회 전반에서 반이민자, 외국인 혐오주의를 비롯한 보수 민족주의 정서가 강화되고 있다. 그 여파로 5월 5일에 치러진 지방의회 선거에서 노동당은 320개 의석을 잃고, 보수당은 500개 의석을 추가하며 노동당은 참패했다.

    매니페스토 발표 후 여론조사에서 노동당과 보수당 간 격차는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총선 1일주일 전인 현재 시점에서 일부 여론조사에서 보수당은 노동당을 3%포인트 차이로 간신히 앞서고 있다. 정치 평론가들은 흔들리던 지지자들이 노동당으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젊은 층과 새 유권자들이 노동당을 지지하고 나서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의 승리는 여전히 쉽지 않아 보인다.

    재국유화 캠페인의 한계

    영국 노동운동과 노동당의 의존적인 관계를 고려했을 때 노동당의 패배는 재국유화를 관철하는 데에 큰 걸림돌일 수밖에 없다. 정책 결정 과정에서 노동조합의 참여를 보장하는 제도가 없고, 민영화 이후에 조직률과 투쟁력이 크게 하락한 상황에서 영국 노동조합들은 노동당을 통한 입법 활동과 노동당 후보에 대한 지지운동을 중심으로 한 전략을 채택해 왔다. 이에 많은 노조 활동가들은 노동당이 집권하지 않으면 법제도 개선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자연스럽게 말한다. 새로운 전략적 방향이 없는 한 총선 후 재국유화를 다시 의제화할 기회가 사라질 수 있다.

    다른 문제는 브렉시트 관련 모든 의제가 그렇듯이 재국유화의 근거가 대부분 민족주의적인 기조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철도 행동 캠페인에서 만든 한 포스터는 해외철도기업의 영국 진출 현황을 출신 국기로 나타는 그래픽과 함께 “이제 영국 철도 75%는 전체적 또는 부분적으로 외국 국가에 의해 소유된다. (중략) 영국의 높은 철도요금은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국철 운영 보조금에 쓰이고 있다.”를 굵은 글자로 배치했다. 매우 선동적인 이 포스터는 사실 현실에 대한 왜곡이다. 대부분의 경우 영국에서 철도를 운영하는 해외기업들은 모회사가 공기업이더라도 영국에서 창출하는 수익을 본국의 공공교통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 수익 사업의 확대를 위해 사용하고 있다.

    영국 철도에 진출한 외국 기업의 지분

    아래로부터, 왼쪽으로 향하는 브렉시트를 위해

    노동당이 이번 총선을 통해 집권하더라도 향후 영국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이 보다 강한 단결을 통해 투쟁력을 강화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공서비스의 재국유화를 반드시 고려해야 할 정치적 의제로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울 수 있다. 또한 브렉시트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유럽의 다른 노조와 연대 관계를 유지·강화하려면 새로운 선전 기조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국가 대(對) 국가가 아니라 공공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모든 유럽 민중 대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더 크게 봤을 때 아래로부터, 그리고 왼쪽으로 향하는 브렉시트의 비전을 구체화하기 위해 범유럽 노동자와 좌파세력의 깊이 있는 토론이 시급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소개
    공공운수노조 국제·통일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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