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시와 삶] 곁가지에 휘둘리지 말고 올곧은 몸통 키워 가기를
    2017년 06월 01일 11:3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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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

도시에서 나고 자라
흙벌레에도 기겁을 했는데
손에 호미를 쥐고 보니
세상사가
땅에 다 있다

상추 어린잎은
비올 때 옮겨야 하니라
일전 마른 날
빼곡히 모여 있길래
좀 너른 공간에서 살라고
몇 포기 덜어 꽁꽁 심었더니
모두 말라 죽어 있더라

터전을 바꾸려면
아무나 잡아 내치는 게 아니라
하나라도 살아 남도록
단비 촉촉히 내리는 날을
기다려야 한다는 진리
봄비 오는 날 깨우쳤네

토마토 곁가지
아끼지 말고 쳐내야 덤불이 안되니라
잎사귀 하나까지 아끼다가
몸통이 두 개 되어
기여 뿌리가 견뎌내지  못하더라

살면서
내 것이라 아까워 버리지 못한 것이
어디 한 둘일까
곁가지에 휘둘려
몸통을 아득히 잊고 살아왔음을
흙고랑에 주저앉아 깨우치고 있네

<시작노트>

늦은 밤  우연히 한잔하고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앞에 스물남짓한 아이가 갈짓자로 걷고 있었다.

아득한 옛날 생각에 갑자기 눈가가 뜨거워졌다.

스무 살 적 대학 신입생 환영회 날 난생 처음 와본 맥주집, 죽~ 늘어선 선배들에 주눅 들어 있었는데  어느 선배가 우리 테이블로 와서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으냐, 우리 사회엔 우리가 배운 것보다 더 많은 진실이 있다고 말했다.

난 눈을 부릅뜨고 그 말에 귀를 기울였으나 그 선배는 나 아닌 다른 친구만 바라보며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다음날 그 선배를 찾아가서 나도 그 써클에 가입하고 싶다고 말하자 그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점퍼스커트 차림에 빳빳하게 다린 손수건을 책갈피에 끼우고 지하써클에 가입하겠다고 하니 얼마나 황당했을꼬…

그래도 우겨서 그 독서서클(지하써클)에 가입하여 난쏘공, 전환시대의 논리, 자구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등 나를 뿌리째 흔들어 밤새 눈물짓게 했던 책들을 접했다. 그리고 심장을 두드리던 광주 대자보와 비디오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때부터 나의 인생은 그야말로 180도 달라졌다. 속도는 다소 느렸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고 있었다. 이후 나의 20대를 사로잡았던 가치관은 아직도 내 삶의 척도가 되고 있다

내 앞에서 술에 취해 걷고 있는 저 젊음도 부디 지금의 방황이  건강한 앞날의 밑거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곁가지에 휘둘리지 말고 올곧은 몸통을 키워 나가기를 기원하며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필자소개
1987년 노조를 만들었다가 해고를 당하고 이후 민중당에서도 활동했고 지금도 거리의 시인으로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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