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월동과 팽목항,
    기억해야만 하는 그 곳들
    공공운수노조 광주순례에 참여하고
        2017년 05월 26일 10: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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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이키기 싫은 현대사의 비극을 뒤로 하고 5월의 햇빛은 찬란하기만 하다.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며 살 수 있을까? 이 자리를 빌어 소속 없는 ‘시민’에게도 기꺼이 자리 한 켠 내 준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조합원들께 감사 드린다.

    기억하기 싫은 그 날을 위해 떠난 여행

    지난 5월 18일 37주년 광주 민중항쟁 기념식에서 9년 만에 ‘님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다. 참가자들은 그동안 합창으로 불렀던 곡을 제창으로 부르니 감개무량했다고 한다. 나는 사실, 합창과 제창의 차이를 잘 몰랐다. “합창은 뭐고 제창은 뭐야?” 뉴스를 보던 남편에게 물었다. “합창은 부르고 싶은 사람만 부르고 제창은 다 부르는 거야.” 남편은 그것도 몰랐냐는 듯 말했다. ‘그게 그렇게 큰 차이인가?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도마 위에 오르네’라며, 중얼거렸다.

    광주를 제대로 알고 싶었다. 매일 아침, 신문을 보지만 볼일 보는 동안 훑어보기 때문에 자세히 보지 않는다. 신문도 때로는 믿을 수 없는 걸 쓰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니 현실 감각도 떨어지고 아픈 역사도 잊히는 것 같다. 직접 공부하고 현장도 보고 싶었다. 물론 대학 시절에는 총학생회에서 주최하는 광주항쟁을 잊지 말자는 프로그램에 참가해서 망월동에 가 보았다. 하지만 그 때는 20대였고, 생각이 깊지 않았다.

    때마침 광주 망월동 참배와 세월호 3주년을 추모하고자 팽목항을 방문한다는 웹자보를 페이스 북에서 보았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에서 주최하는 것이다. 조합원이 아닌 일반인도 참여가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일단 신청을 했다. 그 행사는 지난주 금요일(19)~토요일(20), 1박 2일의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의 조합원들과 같은 버스를 탔다. 조합원이 아닌 일반 ‘시민’은 나 혼자였다. 불현듯 광주항쟁의 그 ‘시민군’이 떠올랐다. 만약 내가 그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나는 시민군이 될 수 있었을까? 나도 모르게 고개가 좌우를 가로 저었다. 난 아마 제일 먼저 집으로 도망가서 아랫목에 이불 뒤집어쓰고 엉엉 울고 있었을지 모른다. 간단히 소개를 마치고 잠이 들었는지 눈을 떠보니 어느새 광주 톨게이트다.

    이하 사진은 필자와 공공운수노조

    이하 사진은 필자와 공공운수노조

    망월동 구 묘역에는 낮 2시 경 도착했다. 구 묘역에 묻힌 민족민주열사 중 공공운수노조 조합원이었던 이용석, 이병렬, 박종태, 진기승 열사의 묘가 그곳에 있다. 참가자 모두 국화꽃 한 송이를 들고 헌화했다.

    네 분의 열사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은 이용석 열사다. 2003년 10월 26일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가 진행 중이던 종묘공원에서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분신했다. 32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그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애석하기만 했다. 더구나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설움을 폭로한 것이라 더욱 가슴이 아팠다.

    박종태 열사는 당시 40세 였고, 화물연대 광주지부 1지회장을 맡았다. 2009년 3월 16일 문자 한통으로 30원 수수료 인상을 요구하던 대한통운 택배 노동자 78명이 집단 해고를 당했다. 박종태 열사는 이에 맞서 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수배의 어려움을 딛고 해고된 택배 노동자들과 전국을 돌며 해고의 부당성을 알리고 함께 해줄 것을 호소했다. 2009년 4월 30일, 자신의 죽음이 부당한 해고 철회와 화물연대 사수에 밑거름이 될 것을 믿으며 “대한통운은 노조탄압 중단하라!”는 현수막을 걸고 산화하였다.

    이병렬 열사는 당시 42세였다. 전북지역 내 다양한 사회활동에 관심을 갖고 참여 했으며 민주노총 공공노조 전북평등지부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2008년 5월 25일 전주 코아백화점 앞 선전전 중 분신하여 6월 9일 운명하셨다.

    진기승 열사는 당시 48세 였다. 2010년 9월에 공공운수노조 전북지역버스지부 가입해 활동 했다. 하지만 민주노조 조합원에 대한 차별, 노노 갈등 유발, 노조 탈퇴공작, 회유, 징계 및 해고 등의 압박을 견뎠다. 한국노총 조합원들과의 시비를 이유로 억울하게 구속되어 3개월의 형기를 마쳤으나 결국 해고되었다. 1년 8개월 간 해고자의 길을 걸었다. 2014년 6월 2일 “나같이 억울한 해고를 당하지 않도록 똘똘 뭉쳐 투쟁”할 것을 당부하고, “버스노동자가 대우받는 세상에서 태어나고 싶다.”는 유서를 남긴 채 투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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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네 분들 외에도 구 묘역에 묻힌 많은 민족민주열사들은 모두 열악한 노동환경의 개선을 요구했으며 부당한 사회에 맞서 항거 하다가 돌아가셨다. 1년에 한 번 묘역에 참배하고 가는 것으로 그 분들의 죽음을 대신할 수 없다. 각자의 현장에서 늘 고민하고 자본에 맞서 싸우는 것이 남은 이들이 할일 이라는 무거운 숙제를 안고 발걸음을 돌렸다.

    다음 방문지는 광주시 서구 내방동에 있는 <5.18 자유공원>이다. 망월동에서 30분을 달려 오후 4시 30분경 도착했다. 그곳은 5.18 광주 항쟁 당시 신군부들의 강경진압에 맞서 싸우다가 구금된 시민군이 재판을 받던 곳이다. 원래의 위치에서 100m 떨어진 곳에 원형으로 복원해 만들었다.

    공원은 자유관, 헌병대 중대내무반, 헌병대 본부사무실, 헌병대 식당, 영창, 법정으로 구성돼 있다. 제일 먼저 영창을 체험했다. 영창 입구에는 험악한 군인 복장을 분이 야구 방망이를 들고 서 있었다. “저는 진짜 군인은 아닙니다. 그 날을 재현하기 위해서 입은 겁니다.” 그리고 대뜸, “너희들은 더이상 시민이 아니다. 편하게 걸어서 들어 갈 수 없으니 앉아서 두 팔로 귀를 잡고 들어가라.” 위압적인 말투가 꼭 그 날 계엄군과 같았다. 깜짝 놀랐다. 체험자들은 모두 그의 구령과 지시에 맞춰 앉아서 어기적거렸다. 1분쯤 걸었을 때 일어나라고 했다. 겨우 1분을 걸었을 뿐인데도 다리가 아파서 힘들었는데 시민군은 그 자세로 2시간이나 걸어 영창에 들어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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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창에 들어가 보니 온몸에 소름이 돋고 으스스한 공포가 밀려왔다. 20펑 정도 됨직한 방 서너개에 강제로 끌려온 3000명 중 대다수가 수용됐다는 말을 듣고 기가 막혔다. 옴짝달싹 못하고 죽음의 공포에서 떨어야 했던 죄 없는 시민군을 상상하니 전두환과 그 일당을 살려준 정부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자유관에서는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폭압의 장면이 담긴 영상을 틀어 주었다.

    첫날 일정은 그렇게 마쳤다. 다시 버스로 30분 이동해 숙소인 목포 축구유스호스텔에 도착했다. 저녁 식사 후 다음날 일정을 확인하고 방 배정을 받았다. 방 배정을 받기 전, 다 같이 일어서서 부른 <오월의 노래 2> 가사가 귓가에 맴돌아 잠이 오지 않았다. 소주 한 잔 안 마실 수 없었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려나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 날이 다시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아침에 깨니 머리가 무겁다. 처절했던 37년 전, 그 날을 간접적으로 체험했기 때문일까?(숙취때문이 아니라고 하면 믿어줄 사람이 있으려나?) 그게 아니라면 생각만 해도 아픈 세월호를 보러 간다는 부담 때문이었을까.

    숙소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을 달려 세월호가 누워 있는 목포 신항에 도착했다. 누워 있는 세월호는 누더기 옷을 입은 것처럼 형편없었다. 온전한 인양을 바랐지만 3년 동안 바다밑에서 잠들어 있던 세월호는 이미 찢길 대로 찢겼다. 그 세월을 견뎌온 유족들 가슴처럼 갈기갈기 찢긴 채 뭍으로 올라왔다. 처참하다는 한마디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모습은 마치 광주에서 학살당한 시민군을 보는 듯 했다. 마침 그 날은 미수습자인 허다윤 양의 유해가 발견된 날이었다. “다윤이가 행불자가 될까봐 두려웠습니다. 저도 유가족이 되고 싶었어요. 이제라도 다윤이의 유골이 발견되어서 다행입니다. 고맙습니다.” 다윤 양 어머님이 울먹이며 말씀 하셨다. 아이의 유해를 붙잡고 반가워해야 하는 현실, 차라리 꿈이라면 한바탕 울기라도 할 텐데….

    무거운 몸과 마음을 뒤로하고 목포 신항을 떠났다. 1시간을 달려 팽목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시 반, 아침에 깼을 때 보다 머리는 더 무거웠다. 천근 쇠스랑이라도 찬 것처럼 발걸음은 잘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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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란 리본으로 둘러싸인 부두, 빨간 페인트로 칠해진 등대를 보니 왜 진작 오지 않았을까, 하는 미안함에 사무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사고 지점에서 30Km 떨어진 팽목항, 언제 그런 참혹한 일이 있었냐는 듯 바다는 잔잔했다. “왜 우리를 구하지 않았나요?” 라고 묻는 아이들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듯했다. 국가 폭력으로 희생된 아이들의 목소리다.

    마지막으로 팽목항에서 약 200여명의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조합원들과 결의를 다지는 집회를 했다. “안전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각자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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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소개
    전 동자동사랑방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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