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워드로 본 프랑스 대선
    400여만표 사상 최대 백지 기권표
        2017년 05월 09일 12: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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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변은 없었다. 프랑스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앙 마르슈(전진)’의 에마뉘엘 마크롱 후보가 66.06%를 득표하며 당선됐다. 결선투표를 앞두고 블루칼라를 집중공략하며 이변을 장담했던 마린 르펜 후보는 여론조사와 크게 다르지 않는 성적표를 받는데 그쳤다.

    이번 대선은 프랑스 선거사상 보기 드문 몇 가지 진기록은 남겼다. 1977년 생으로 만 39세인 마크롱은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젊은 대통령이라는 영광을 차지했다. 또한 전후 사회당과 공화당 소속이 아닌 최초의 대통령이라는 기록의 소유자에 올랐다. 하원의석이 단 하나도 없는 원외정당의 후보가 당선된 것은 앞으로도 깨어지기 힘든 기록으로 남을 전망이다.

    마크롱과 르펜

    마크롱(왼쪽)과 르펜

    블랑스 blancs

    사회당과 공화당에 실망한 국민들은 새로운 대안정치의 출현에 목말라 있었다. 중도좌파와 우파의 대안으로 떠오른 것은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이었다. 반이슬람과 반난민 정책을 전면에 내건 르펜은 단시간에 여론조사 1위 자리를 차지했다. 르펜의 약점은 반유럽연합(EU)을 제외하고는 뚜렷한 경제정책이 없다는 것이었다. 르펜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상 최대의 부채비율과 25%에 육박하는 청년실업률을 해결한 적임자로는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대형투자은행인 로스차일드와 올랑드 대통령 내각에서 경제장관으로 일했던 마크롱의 화려한 경력은 르펜에 비해 유리하게 작용했다.

    선거 초반 여론조사 1위는 공화당의 프랑수아 피용이었다. 하지만 피용은 후보로 선출된 이후 부인과 자녀들을 허위로 보좌관에 등록시킨 사실이 드러나면서 지지율이 폭락했다. 지지율이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공화당 지도부들은 후보를 알랭 쥐페 전 총리로 교체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피용은 완주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마크롱은 극우정당 르펜의 대항마로 급부상하며 여론조사 1위에 뛰어올랐다. 부패정치인을 고집한 공화당의 패착이 마크롱에게 가장 큰 행운이었다.

    투표율과 기권은 각각 77.4%, 23.4%를 기록했다. 역대 최저 투표율과 최고 기권율에 해당하는 수치다. 주목할 것은 백지(무효표 포함) 투표를 한 유권자가 407만 명(11.5%)으로 나타난 대목이다. 마크롱과 르펜을 지지하지 않는 유권자들이 대거 선거를 보이콧할 것이라는 그동안의 예측이었다. 하지만 유권자들은 불참하는 대신에 투표용지를 ‘blancs(백지)’으로 선택하면서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불굴의 프랑스’의 멜랑숑 지지자들을 제외하고, 수백만 명의 유권자들이 “투표에 참여하는 동시에 결선투표를 부정”하는 유례없는 정치행위를 선택했다.

    러스트 벨트 Rust Belt

    프랑스 경제상태를 한마디로 압축한 단어가 ‘르 크런치(Le Crunch, 중대국면)’이다. 세계경제의 침체로 인접 국가들이 긴축재정과 노동유연화, 복지비용 축소 등을 통해 간신히 경제성장률을 끌어가고 있는 것에 비해 프랑스의 시계는 오히려 뒤로 움직였다. 제로(Zero)로 후퇴하는 경제성장률과 국내총생산(GDP) 대비 민간부채는 갈수록 늘어났지만 집권 사회당의 올랑드대통령은 제대로 된 처방을 내리지 못하고 시간만 허비했다. 오히려 해고를 쉽게 할 수 있는 ‘마크롱 법’과 정리해고 요건을 완화시키는 ‘엘콤리 법’을 도입하면서 노동계급의 지지기반이 뿌리 채 흔들렸다.

    프랑스 북동부의 알자스-로렌 지역은 유럽 최대의 철강제철소들이 위치해 있었다. 가격하락 등으로 채산성이 떨어지자 인도 재벌 미탈스틸이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제철소들을 잇따라 폐쇄하면서 철강의 도시는 하루아침에 유령의 도시로 변모했다. 대규모 실업이 계속되면서 지역경제 전체가 도미노처럼 흔들리며 러스트 벨트로 전락했다. 알자스-로렌 지역은 사회당의 전통적인 지지기반이었다. 2012년 대선에서 사회당의 올랑드는 제철소의 국유화를 검토하겠다고 공약하면서 지지기반을 지키는데 성공했다.

    집권 초기에 올랑드는 사회당에서 왼쪽에 위치한 브누아 아몽을 경제장관(Junior Minister)으로 기용했다. 가장 먼저 1천명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외국기업이 이전이나 폐업을 할 경우 인수기업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해야만 한다는 규제를 담은 ‘프랑드르 법’을 도입하면서 기대에 부응했다. 하지만 집권 중반까지 경제지표가 개선될 조짐을 보이지 않자, 고용유연화 등 우회전을 시작했고 이에 반발하는 아몽을 해임하고 마크롱을 등용했다.

    2017년 1차 투표에서 사회당은 알자스-로렌을 비롯한 러스트 벨트 지역에서 참담한 성적표를 받았다. 사회당 지지자들은 대거 이탈했고 북동부 지역의 러스트 벨트에서 르펜이 1위를 차지하면서 결선투표에 진출하는 발판이 됐다. 민주당에 실망한 러스트 벨트의 노동자들이 트럼프에게 대거 표를 던진 현상이 프랑스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허니문 honeymoon

    프랑스 하원의원 선거는 6월 11일에 실시된다. 대통령 선거와 마찬가지로 50% 득표자가 없을 경우 곧바로 일주일 후에 결선투표가 실시된다. 대통령 결선 투표가 끝난 다음 달에 실시되기 때문에 당선자를 배출한 정당이 1당에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 달 만에 표심이 급변할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프랑스 하원의원 선거를 허니문이라고 부른다.

    현재 하원의원 577석 중에 사회당(PS) 273석, 공화당(PR) 199석, 녹색당(EELV) 9석, 공산당 (PCF) 7석, 좌파당(PG) 3석, 국민전선(FN) 1석을 차지하고 있다. 마크롱이 소속된 앙 마르슈(En Marche)은 의석이 없다. 앙 마르슈가 허니문의 바람을 등에 업는다고 하더라도 과반수의 의석을 획득하는 것은 현재로서 쉽지 않을 전망이다. 관건은 1당의 위치를 확보하느냐 하는 것이다. 1차 투표에서 대부분의 서부지역에서 1위를 차지한 것과 공화당의 전통적인 강세지역인 남부지역에서도 높은 득표율을 올린 것이 하원의원 선거 1차 투표에서 다수의 결선 진출자를 배출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1당으로 가는 희망적인 지표들이다.

    결선 진출은 실패했지만 공화당은 지역기반이 여전히 탄탄하다는 것과 막판에 지지층을 어느 정도 재결집시켰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1당이 가능하다는 것이 자체 주장이다. 사회당은 역대 최악의 성적표를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최악의 경우 50석 이하로 몰락할 수도 있다는 여론조사도 등장했다. 좌파당은 멜랑숑의 선전으로 기존의 의석보다 늘어날 전망이지만 급격하게 의석이 확보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북동부 지역에서 사회당을 밀어내고 국민전선과 결선에 진출하는 선거구도에 기대를 걸고 있다.

    국민전선은 하원의원 선거에서 약진을 호언하고 있다. 결선투표에서 북부 대도시 릴(Lille) 남부에 위치한 랑스(Lens)와 아라스(Arras)를 중심으로 하는 데파르트망(department, 광역지자체)에서 마크롱을 꺾고 55% 이상의 득표를 올렸다. 인접한 랑(Laon)이 포함된 데파르트망에서도 50% 이상의 득표를 올리면서 벌써 4~5석의 당선이 확정적이다. 기대를 걸고 있는 또 다른 곳은 유일한 하원의원이자 르펜의 조카인 마리옹 르펜의 선거구인 몽트레동(Montredon)이다. 국민전선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마린 르펜의 인기를 능가하는 마리옹 르펜은 개인적인 지지도를 활용해 남서부 일대에서 국민전선의 지지율을 끌어올리고 있다.

    프랑스2차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후보가 프랑스 북부 2개 데파르트망(department)에서 50% 이상의 득표율을 올리며 승리했다

    코아비타시옹 cohabitation

    여론조사기관은 제1당의 자리를 놓고 앙 마르슈와 공화당이 접전을 벌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현재까지는 앙 마르슈가 공화당에 근소하게 앞서 제1당을 차지할 것으로 보고 있지만 과반수에는 미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앙 마르슈가 여론조사기관의 예측대로 의석을 차지한다면 총리를 지명하기 위해서는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밖에 없다. 공화당과 대연정을 수립하지 않는 한, 파트너는 사실상 사회당이 유일하다. 6월 총선이 여론조사기관의 예측대로 전개된다면 사회당을 탈당한 대통령 후보(당선자)가 사회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프랑스 정치에 등장할 전망이다.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공화당이 제1당을 차지하는 것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1차 투표에서 앙 마르슈와 공화당의 후보가 얼마나 진출할지도 불분명한데다 어느 정도 지지율로 올리는가 하는 것도 변수다. 결선투표에서 사회당과 좌파당, 국민전선의 지지자들의 표심을 예측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처럼 투표에 참여한 유권자들이 대거 백지투표를 던지는 사태가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

    공화당이 1당을 차지할 경우 대통령과 총리의 소속정당이 서로 다른 동거정부, 즉 코아비타시옹(cohabitation)이 등장하게 된다. 1986년 사회당 소속의 미테랑 대통령 당시에 우파연합이 하원의원에 승리하면서 시라크가 총리 자리에 오른 것이 시초였다. 프랑스 역사에서 세 번 등장한 좌파와 우파정당의 동거정부와는 전혀 다른 동거정부가 등장할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있다. 선거결과가 어느 쪽으로 나오든 양당체제의 해체와 사회당의 몰락은 분명해지고 있다.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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