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유배지,
‘늡다리’에는 돌쇠가 산다
"이런 곳 하나쯤은 지켜져야 돼"
    2017년 05월 06일 10:0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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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봉 선생의 새로운 칼럼 ‘늡다리 일기’를 시작한다.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곳에서 바람, 나무와 숲, 물와 태양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는다. 많은 관심 부탁한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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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잔인한 달”이 분명 했다.

아무도 올라오지 않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질 않았다. 햇살은 점점 따가워지는데, 앞산은 초록으로 제법 여유를 부리고 있는데, 난 할 일 없이 산속에서 쌀벌레처럼 살았다. 산속의 4월은 원래 그런 달이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나른하고 외롭고 배고픈 달이다.

5월부터는 밭을 갈아 씨를 뿌려야 한다. 상추 고추 깻잎 호박 가지 등 여름 내내 먹을 푸성귀들을 길러야 하는, 이제부터 일을 해야만 하는 철이 된 것이다. 느리게 왔다가 빠르게 가는 게 산속의 계절이다.

없어서 불편한 것보다 없어서 좋은 것이 더 많은 곳, 꿈꾸는 유배지 늡다리. 내가 집을 짓고 사는 곳이다.

계곡 입구에서 5킬로미터. 나는 걸어서 다닌다. 그냥 걸어 다니는 것이 아니라 지게를 지고 다닌다. 단 한 번도 빈 몸뚱이로 오르내린 적이 없다. 찻길이 없기 때문이다. 자전거도, 오토바이도, 당나귀도, 포크레인도 다니지 못한다. 오직 지게 하나에 의지해 살고 있는 셈이다.

쌀을 비롯한 생필품은 물론 자재 하나하나를 지게로 져 나른다. 길이 좁다보니 길고 넓은 것은 못 지고 간다. 그래 반으로 나눠지고 올라가 다시 길게 만든다. 가끔 짐을 져다주는 사람들도 있다. 고마운 이들이다. 분명 복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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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없다. 드릴 같은 공구를 한 번 쓰자면 발전기에 넣을 휘발유를 지고가야 한다. 당연히 컴퓨터도 못한다. 휴대폰? 물론 안 터진다.

우리 집에서 휴대폰을 켜면 휴대폰이 초기화면으로 되돌려진다. 시간은 계곡 입구에서 늡다리로 출발했던 시간, 1980년에서 멈춰진다. 우리 집에서는 문명의 시간이 멈춰져 버리는 것이다. 어떤 이는 겁을 먹기도 하고, 어떤 이는 신기해하기도 한다.

가끔 늡다리를 올라온 도시 아이들은 늘 하던 밥투정을 우리 집에서도 한다. 그러면 나는 빙긋이 웃으며 밥그릇을 치운다. 집에서 하루 굶는 것하고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쪼르르 달려갈 슈퍼가 없다는 것을, 늡다리까지 배달해줄 피자가게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다.

그래 ‘깔딱메기’ 두세 마리를 숯불에 구워놓으면 처음에는 손가락도 못 대던 아이들이 피터지게(?) 싸우는 곳이 늡다리다.

어떤 아이들은 또 나방, 거미 같은 곤충을 보고 산이 무너져라 비명을 지른다. “산 속에 벌레가 없으면…” 아이들에게 한참을 설명한다. “살충제로 벌레들이 박멸이 된다면…” 난 아이들 비명소리가 시끄러워서라도 진즉에 약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서로 불편하지 않게 사는 방법을 터득했다고나 할까?

어쨌든 아이들은 벌레들과 하룻밤 동거를 하고 나면 상당히 친해진다. 그것은 어른들도 똑같다. 우리 집에는 없어서 불편한 것보다, 없어서 좋은 것도 있다. 병원균이 없다. 특히 감기 바이러스가 없다. 아이들이 달달달 떨면서 물놀이를 하고 한겨울 얼음계곡에서 머리를 감아도, 충분히 감기에 걸리고도 남을 별짓을 해도, 우리 집에서는 감기가 안 걸린다. “숲이 건강해 감기 바이러스라는 벌레는 서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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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늡다리인가?

사람들이 나에게 늘 묻는다. 이렇게 불편함을 각오하면서까지 이런 오지에 터를 잡고 사는 이유를. 산 때문이다. 아니 길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산길 때문이다.

산이 전부였던 젊은 시절, 선배들의 성화에 못 이겨 산길 달리기에 목을 매던 그 시절이 못내 아쉽고 안타깝다. 수많은 산을 오르고 또 올랐지만 기억에 남는 산길은 손에 꼽을 만큼이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왜 그래야만 했는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아쉽다.

산길에 한이 맺힌 사람이 어디 나 하나 뿐 이겠는가마는, 암튼 나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나 혼자 오르내릴 수 있는 그런 길을 7년이나 찾아다녔다. 그리고 늡다리로 오르는 길에 반해버렸다. 그 길을 걷다가 그 길 위에서 쓰러져 죽어도 좋을 만큼, 늡다리까지 오르는 길은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를 미치게 한다. 한 마리의 짐승처럼 길을 걷다가 문득 너무 외로워서 울고, 나를 보기위해 고개를 내민 풀꽃 한 송이가 반가워 눈물이 흐르고,

하늘을 뒤덮은 나비떼들의 군무에 전율을 느끼고, 어쩔 수 없이 서울로 가야하는 내 자신이 서러워 길 위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를 울릴 수 있는 그곳에 스스로 유배지를 만든 것이다.

꿈꾸는 유배지 늡다리.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이지만 충북과 경북과 강원도가 한자리에 모인 삼도봉-어래산 아래쯤이다. 그래선지 늡다리는 일기예보가 항상 빗나간다. 어느 지역 일기예보를 들어야할지 난감할 때가 많은 곳이다.

백두대간 도래기재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소백산과 태백산을 가르며 흐르는 내리계곡에 자리잡은 늡다리는 널빤지로 만든 다리 ‘널다리’가 있었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다.

칠룡동, 응애골, 무쇠점터, 늦은목이, 사기점터, 명생동 등 근동에 살던 화전민들이 이 다리를 건너 경북 춘양, 충북 단양, 영월 5일장을 보러 다녔다.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이 휴전선을 넘어 청와대로 향했던 사건 이후 백두대간 골골이 박혀 살던 화전민들에게는 소개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거기 40여 년 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수풀에 묻혀버렸다. 그러니까 늡다리는 예전에 화전민이 살던 터고 늡다리까지 오르는 길은 그때 자연스럽게 난 길이다. 내가 일부러 낸 길이 아니다. 그리고 그 길로 심마니들도 다니고, 나도 다니고, 멧돼지도 다닌다.

지게질부터 배웠다. 빈 몸으로 올라도 빠듯한 산길을 짐을 지고 걷는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계곡으로 굴러 떨어지기를 서너 차례, 지금은 이골이 났지만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황토와 돌을 뺀 나머지, 그러니까 통나무를 비롯해 모든 자재를 지게에다 지고 올라가 집을 지었다. 보잘 것 없는 황토집 세 채지만, 아직도 지게질을 하고 있다.

흙집이라는 것이, 산속 생활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일을 하다가 모자라면 마을까지 내려갔다가 올라가면 하루가 다 간다. 그래 모든 것이 느리다. 아랫마을 사람들이 나를 보고 미친놈이라고 하는 이유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늡다리를 다녀갔다. 늡다리를 올라온 사람들은 모두 한 마디씩 한다. “자동차가 다닐 수 있게 도로를 닦아라… 헬리콥터로 포크레인을 달아 올려라….” 모두들 하룻밤을 자고 간 사람들의 조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대꾸를 한다.

“도로가 놓이면 계곡 망가지는 건 시간문제라고… 많이 경험하지 않았느냐고…이제 우리나라에서 이런 곳 하나쯤은 지켜져야 하지 않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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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늡다리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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