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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노동운동의 현재
    [세계의 노동자] 분열·퇴행과 가능성
        2017년 05월 04일 12:3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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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의 다른 칼럼 ‘미국 우선주의’ 속의 미국

    4월 초, 미국 및 전 세계 노조들이 참가하는 국제회의에 참석하려고 뉴욕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여러 국제 노조활동가들과 이야기하고 그들이 전 세계적 정치 위기 속에서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에 대해 들어볼 기회를 가졌다.

    나라마다 상황이 다르고 구체적인 역사적/사회적 맥락에 따라 양태가 다르지만, 내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느낀 것은 예기치 못한 새로운 세계에서 국제 노동운동이 방향성을 못 찾은 채 헤매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 세계에서, 심화되는 불평등과 발전의 희망에 대한 좌절은 기존 정부와 기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추진한 중도 좌파와 보수 정부들에 대한 지지가 무너지면서, 우파 인민주의가 자리를 잡을 정치적 공간이 열렸다. 그간 유지된 (신)자유민주주의 헤게모니의 붕괴와 노동조합 존재 자체에 대한 새로운 공세에 직면하여, 각국 노동운동들은 대응책을 둘러싸고 분열되어 모든 균형을 잃은 듯하다. 게다가, 우파 포퓰리스트 정당과 정치인들에 대한 조합원과 미조직 노동자들의 실질적인 지지가 일으킨 불안감, 그리고 수많은 노조들이 오랜 시간 동안 관계를 맺어온 기성 중도좌파 정당들의 약화로 인한 혼란이 압도적이었다.

    내가 직접 볼 수 있었던 미국 노조들의 상황이 좋은 예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건강보험제도에 대한 공격, 환경규제 철회, 외국인 혐오 이민정책 등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국에서 계속되는 동안, AFL-CIO(American Federation of Labor and 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 미국노동총연맹)로 대표되는 기성 노동조합들은 이러한 움직임과 어떻게 관계를 설정해야 할지, 새 행정부 하에서 어떻게 생존해야 할지에 대해 아무런 합의도 없었다.

    트럼프와 미국 노조운동

    AFL-CIO 지도부는 수세적인 자세로 대응하고 있다. Right-to-work(유니언샵 폐지)의 전국적 도입을 예상하면서, 지도부는 부서의 통폐합과 상근자에 대한 해고로 심각한 재정 불안에 대비하고 있다. 노조 지도부는 협조 방안을 모색하며 행정부를 접촉하고 있다.

    폭스 비즈니스(Fox Business)와의 최근 인터뷰에서 AFL-CIO의 트룸카(Trumka) 위원장은 “불법 이민자뿐 아니라 합법 이민자들도 임금을 저하시킨다”는 트럼프의 인식에 대한 지지를 표했으며 NAFTA 재협상과 인프라 건설에 대해 대통령과 협력하겠다는 바람을 표했다. 그는 그 후 3월 8일에 트럼프를 만나 이 문제들에 대해 논의했다. 이 모든 일들은 전국의 개별 조합원과 많은 지역지부들이 대부분의 무슬림 국가 출신자들의 입국을 금지하는 트럼프의 행정명령에 반대하는 시위에 적극 참가하고 있었을 때와 같이 시간에 일어났다.

    트럼프

    미국 대선 중 트럼프에 열광하는 노동자과 미국 시민들

    몇몇 미국 노조활동가들에 따르면 트룸카 위원장의 최근 행보는 그 자신의 입장보다는 그가 AFL-CIO 내에서 느끼는 압박 때문이라고 했다. 한편으로, 그는 트럼프의 환경규제완화 계획, 송유관과 도로 및 인프라 확장 프로젝트, 그리고 심지어 멕시코-미국 국경 장벽건설 계획까지도 적극 지지하고 나선 건설업계노조(AFL-CIO 내 건설산업노조연합체)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다.

    트럼프의 정책들이 자기 산업 내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고 믿는 노조들은 AFL-CIO 지도부가 일자리 같은 ‘생계의 문제’를 제쳐두고 여성과 이민자의 권리 같은 ‘부차적인’ 문제들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다는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트럼프 당선에 있어 많은 AFL-CIO 조합원들이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알고서, 지도부는 이러한 주장에 민감해졌다.

    트럼프 행정부와의 타협은 없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의료, 공공서비스, 운송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노조들을 포함해 여러 노조들은 이러한 경향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노조들 대부분은 AFL-CIO 지도부의 힐러리 클린턴 지지에 반해 버니 샌더스 캠페인을 지지하기 위해 작년에 처음으로 한데 모였었다. 이들은 미국 선주민 영토를 통과하는 다코타 액세스 송유관 건설 반대 투쟁에서 다시 연대하여 뭉쳤다. (이 투쟁은 처음에는 오바마 행정부가 최종 건설안을 승인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을 때 승리로 끝나는 듯 했지만, 올해 2월 트럼프가 이 결정을 보류하면서 결국 패배로 끝났다.)

    이 노조들에 따르면, 환경을 보호하고, 인종차별을 종식하고, 거대 화석연료기업의 권력에 제동을 걸기 위해 그들을 하나로 모았던 송유관 투쟁은 AFL-CIO 내부에 깊은 균열을 만들었다. 이들에게 AFL-CIO를 탈퇴하겠다는 명확한 계획이나 민주당을 넘어서는 뚜렷한 정치적 전략은 없지만, 몇몇 활동가들은 이런 방향으로 움직이고자 하는 바람이 있음을 말해줬다. 그러나 이런 노조들조차 조합원의 상당수가 트럼프에게 투표하는 데 초조한 의식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포용과 차별 반대의 원칙에 충실하면서 이런 노동자들에게 다가갈 방안에 대해 고심 중이다.

    필리핀의 노동운동

    미국 노동운동의 분열상은 다른 나라들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과거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에서는 무려 7천 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킨 마약과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포퓰리스트 대통령인 로드리고 두테르테(Rodrigo Duterte)가 여전히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높은 지지율을 누리고 있다. 두테르테는 만연한 단기계약 근로(contractual labour) 근절 공약을 포함해 인민주의 정책들을 공약으로 걸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대중담론은 손쉬운 희생양을 제공함으로써 필리핀 노동자 계급과 중산층의 불안에 호소한다.

    이 경우에는 이민자 대신 마약복용자와 경범죄자들이 희생양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마약 근절’ 캠페인에서 표적이 된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경제성장에서 뒤쳐진 가난한 사람들이며, 어떤 경우에는 지역 경찰이 누명을 씌운 활동가들이다. 나와 대화를 나눈 필리핀 노조간부는 자기 노조의 현장간부는 최근 살해당했다고 말했다.

    2012년, 이념적으로 분열된 필리핀 노동조합들의 대다수가 민영화나 임금인상 같은 공통의 문제에 대해 함께 싸우기 위해 NAGKAISA(연합)이라는 새로운 연합체를 결성했다. 그러나 오늘날 NAGKAISA는 두테르테 행정부와 어떻게 관계를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갈등으로 인해 거의 와해되었다. 진보적 노총인 SENTRO(‘센터’)가 두테르테에 반대하는 가운데, NAGKAISA 회원 조직 대부분은 두테르테에게 희망을 걸었다. SENTRO의 입장에서, 파시즘으로 향하는 우파 정부에 반대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일이지만, 두테르테를 지지하는 대중과의 연계 방안은 해결할 과제다.

    유럽 극우파의 득세와 노동자들

    유럽에서도 우파 인민주의 세력에 대한 노동계급의 지지는 뚜렷한 현실이 되었다. 최근 프랑스의 대선 1차 투표에 명백히 들러난 사실이다. 이전의 사회주의 정부가 어긴 약속들에 실망한 공업쇠락지역 노동자들의 표는 민족주의의자이자 반(反) 이민자이며 반(反) 유럽연합 입장이 뚜렷한 국민전선(FN)의 마린 르펜 후보의 결선투표 진출을 가능하게 했다.

    이와 비슷한 경향이 작년 영국의 브렉시트 투표에서도 나타났다. 엄청난 수의 노조 조합원들이 브렉시트에 투표했다. 유럽연합의 친-민영화 성향 및 긴축재정 횡포에 대한 비판에 기반을 두는 좌파적 브렉시트 운동도 있었지만 우파적 캠페인이 지배적이었으며 실업과 고용 불안, 노동조건 악화의 원인으로 이민자들 및 그들을 받게 하도록 한 유럽연합에 대한 비판에 기반을 두었다.

    각각의 경우, 노조들의 행동 방식은 불분명했다. 프랑스에서는 좌파 후보 장 뤽 멜량숑(Jean-Luc Melenchon)의 출마에도 불구하고 선거 과정에서 노조들 대부분이 확실한 입장을 내지 않았다. 4월 23일 결과가 나온 후, 프랑스 최대의 노총인 CGT(프랑스노동총동맹)는 극우 호보인 르펜 ‘반대’ 캠페인 호소하고 나섰지만, 그들이 그 외의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영국에서는, 노조들이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도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태다. 국민투표에 이르는 과정에서, 영국 정부와 유럽연합 모두의 신자유주의적 성격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도 노조 대부분은 ‘잔류’ 입장을 지지했다. 이러한 노조의 활동가들은 ‘탈퇴’ 입장을 지지한 소수에 대해 이해를 표명하면서도, 탈퇴가 유럽연합 지침이 보호하던 사회적 권리의 약화/소멸 및 자유화의 확대를 의미할 것임에 분명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쪽도 좌파적 또는 노동자 입장에서의 탈퇴’ 방안을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브렉시트 캠페인에 존재하는 민족주의 수사(修辭, rhetoric)의 영향은 노동운동 내에서 이전보다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 영국 최대의 산별노조인 유나이트(UNITE)의 지도부 선거에서, 현 사무총장인 렌 맥클루스키(Len McCluskey)는 강력한 반(反) 이민자 친(親) 화석연료기업 경향의 후보자와 대결하여 간신히 이겼다.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의 모순이 광범위한 불만과 정치적 위기를 초래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선명한 대안적 정치 비전을 제시 못한 채 기존 중도좌파 정당과 자신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노동조합들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의 실패에 불만을 품은 노동자들을 조직해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각국 노동운동은 더 권위주의적인 형태의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정치인들과 그들의 민족주의적 사상에 자리를 내주었다.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ci)의 말대로, “낡은 것은 사라지고 있으나 아직 새로운 것은 등장하지 못한 사실에 있다.”

    멜랑숑, 버니 샌더스, 제레미 코빈

    음울한 상황이지만, 전체적인 그림은 아니다. 주류적인 신자유주의 담론이 힘을 잃으면서, 프랑스의 멜랑숑(Melenchon), 미국의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와 녹색당의 대통령 후보 질 스타인(Jill Stein), 영국의 제레미 코빈(Jeremy Corbyn) 등 새로운 좌파 정치세력들이 뚜렷이 부상하여 젊은 노동자들과 예비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아직 일관된 정치전략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일부 노조들은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있으며 이러한 젊은이와 관계를 맺도록 새로운 형태의 의사소통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더구나 전통 노조 조직들의 분열 상황 속에서 새로운 연대의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유럽에서는, 유럽연합의 긴축 및 시장 자유화에 대한 ‘불복종’ 요구가 늘어나 더 많은 노동조합 활동가들로 하여금 사회적 보호의 강화 없이는 더 이상의 유럽 통합을 거부한다는 입장을 취하도록 했다. 필리핀에서는, 두테르테에 반대하는 노동조합들이 도시빈민 및 농민단체와 함께 새로운 연대체를 결성하여 두테르테의 암살단에 반대하고 단기근로계약 (Contractualization)에 대한 그의 공약의 허위성을 알리려 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AFL-CIO의 방어적 태도에 대해 못마땅한 노조들이 서로 간에, 그리고 사회운동세력과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이들은 5월 1일 ‘이민자 없는 날’을, 그리고 6월에는 ‘피플스 서밋(People’s Summit)’을 조직하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이것이 통일된 정치적 방향을 논의하는 장(場)이 되길 희망하고 있다. 캐나다와 멕시코 노조들과 함께 이러한 노조 중 일부가, 국내산업 보호가 아닌 보편적 노동자 권리의 원칙에 기반하여 NAFTA 재협상에 대한 공동 입장을 논의하기 위해 대륙적 회의를 소집하고 있다.

    권리를 박탈당한 다른 사회집단들과의 더 깊은 연대와 함께, 노동조합들과 새로이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젊은이들, 그리고 그들이 지지하는 좌파 정치운동 간의 교류의 확산은, 노동조합들이 “낡고 죽어가는”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탄생시킬 수 있도록 하는 한 가지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마르세유

    프랑스 대선 1차 선거운동 중 마르세이유의 대규모 멜랑숑 지지 집회

    필자소개
    공공운수노조 국제·통일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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