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현의 위기로 읽는 촛불대선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불평등과 노동 배제"
        2017년 05월 04일 11:3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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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지금 ‘재현의 위기(the crisis of representation)’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번 대선 또한 이의 특성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두 남녀가 사랑하는 현실을 소설과 영화가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두 남녀가 소설과 영화 속의 사랑을 모방하여 사랑한다. 실제로 흑인이 백인에 비하여 더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흑인을 폭력적으로 묘사한 미국 드라마가 편견을 낳고 결국 흑인을 폭력적이게 만든다. 게임 중독에 걸린 아이가 친구를 살해하고 오랜 동안 게임 속의 악마를 죽였다고 착각한다.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허위 보도가 이라크전을 만들어 실제 최소 2만 명 이상의 사람을 죽였지만 아직 대량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처럼, 재현의 위기론은 구체적인 현실이 있고 이를 텍스트, 가상세계, 언론, 여론조사가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후자가 현실을 구성하는 현상을 분석하는 이론을 말한다.

    이번 촛불대선에서도 이런 재현의 위기, 현실과 가상의 전도 현상이 극렬하게 빚어지고 있다. 정책대결은 사라지고 여론조사가 현실을 구성하고 있다. 문제가 많고 허술한 여론조사임에도 비판적 분석 없이 크게 보도되면서 대선이란 현실이 여론조사 발표 이후 오랜 동안 문재인과 안철수, 두 후보 사이의 양강 대결이 되었다. 그 원인을 보수표의 이동이라고 해석함에 따라 선두에 선 두 후보는 보수층을 견인할 정책과 인물로 더욱 우클릭하였다. 최근에 와서는 유승민 후보의 낮은 지지율로 인하여 소속 의원 가운데 절반이나 탈당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촛불로 없어져야 할 수구 반동 정당이 개인적, 도덕적, 사회적, 역사적인 면에서 도저히 대선 후보가 될 수 없는 자를 중심으로 지지율이란 허상을 둘러쓰고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텔레비전 토론을 통하여 안철수 후보의 실상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양강 구도는 확실하고 안 후보가 문 후보를 역전하였을 것이다.

    탄핵촛불

    작년말 광화문광장의 촛불집회 모습

    엄연히 촛불대선인데 촛불을 끄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번 대선은 연인원 1700만 명의 시민이 촛불을 들고 저항하여 현직 대통령을 밀어내고 만든 자리다. 촛불은 지역구도와 기울어진 운동장마저 없애고 민주공화국으로서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할 지도자가 나올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심상정 후보를 제하고는 대선 후보 가운데 아무도 촛불의 의제를 전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있다.

    2월 임시국회에서도 제1, 2 야당의 대표였던 두 대선 후보는 촛불의 압박, 여소야대, 여권의 분열,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 등 해방 이후 최고로 좋은 여건임에도 단 한 건이라도 개혁입법을 통과시키는 데 진력하지 않았다. 시민들이 이러려고 촛불을 든 것이 아니라며 광장에서 외쳐도 촛불의제를 정책에 반영하기는커녕 오히려 연일 우향우하고 있다.

    이번 대선이 건국 이후 최초의 ‘야야 대결’임을 내세우지만, 현실은 자유주의 보수 사이의 대결이다. 국민들은 박근혜 정권의 도를 넘은 국정농단에 분노하여 촛불을 들었고, 이 분노는 여당을 분해하였고 여당 후보들을 괴멸시켰다. 현재 1, 2위 후보 가운데 누가 되든 정권교체가 되리라고 한다. 하지만, 안철수 후보는 보수층의 지지를 받고 양강에 올랐다가 순전히 자신의 잘못과 모자람으로 추락하고 있다. ‘어대문’이란 말처럼 당선이 거의 확실한 문 후보의 복지 정책은 여당의 유승민 후보보다 더 진보적이지 않으며 증세 계획이 부실하여 현실성과 진정성이 없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빙산의 일각이고, 자본-국가-사법부-종교권력층-어용지식인 및 전문가 집단으로 이루어진 지배동맹체의 권력과 자본의 독점이 국정농단의 근원인데, 문 후보는 자본-보수관료-jtbc-김앤장-보수지식인으로 구성된 리셋코리아의 수장인 홍석현을 만나 모종의 협의를 하였다.

    이번 촛불의 근본 원인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모순이고 그 피해자는 노동자와 농민인데, 유력 후보들이 이의 극복도, 노동도 말하지 않고 있다. 유력 후보들 모두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하지만, 그를 위한 대전제인 불평등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대안을 정책으로 제시하지 않고 있다. 주지하듯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는 불평등과 노동배제다.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고 빈부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노동자의 태반인 1,100만 명이 같은 일을 하고도 정규직의 절반 임금을 받는 비정규직이다. 이 정권에서 가장 배제되고 소외된 자들이자 가장 선두에서 투쟁한 자도 이들이다. 게다가 노인의 절반이 빈곤층이고 청년의 절반이 거리를 떠돌고 있다. 국민들도 불평등의 극복을 가장 원한다. 그럼에도 대선국면에서 이 담론은 사라졌다.

    이번 텔레비전 토론에서 “중소기업은 경우가 다르지만, 30대 대기업의 경우 매년 기업이 벌어들이는 당기순이익의 단지 1.5%만 투자하면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다. 이명박 정권 3년간 환율조작만으로 서민 돈을 빼앗아서 재벌 준 것이 얼마인 줄 아는가. 당시 강만수 부총리가 947원이었던 환율을 무역이나 경제상황과 별 관련이 없이 1,276원으로 35%를 끌어올렸다. 단순화시켜서 설명하면, 하루 100달러의 경유를 사용하는 트럭 기사는 9만 원만 낼 기름값을 12만 원 내는 것이고 반대로 삼성은 100달러 짜리 상품을 팔아서 9만 원 벌 것을 12만 원 벌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서민의 주머니에서 재벌로 간 돈이 무려 174조 원이나 된다. 그 결과 국민의 97%인 임금노동자와 자영업자의 실질소득은 15.3% 이상 감소했다.

    국민이 게을러서 가난한가. 이처럼 국가와 자본이 야합하여 합법적인 사기로 국민을 수탈하는 것이 신자유주의 체제의 실상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극복 없이 새로운 대한민국도, 모든 국민이 행복한 나라도 불가능하다.”라고 말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어떤 후보도 이런 식의 말을 하지 않았다. 촛불이 있었던 그 자리에서 노동자들이 고공농성을 하고 유력 후보가 비정규직과 정리해고의 철폐, 최저임금 1만원 인상, 조세의 혁신적인 개혁, 기본소득 등 불평등을 완화할 근본적인 정책들을 내놓지 않음에도, 이에 대한 논의나 지지율의 변동이 거의 없다.

    이처럼 재현의 위기가 지배하는 대선 국면에서 유권자로서 국민들은 여러 층위의 기만을 당하고 있다. 하지만, 가상은 가상일 뿐이다. 가상에서 남북통일을 수천 번 하더라도 실제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재현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여실지견(如實知見), 곧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유력 후보들은 이 기만이 영원히 통할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고 남은 기간이라도 현실을 올바로 보고 모순들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정책을 공약으로 제시할지어다. 토론을 통하여 실상이 드러나자마자 바로 추락한 안철수 후보를 반면교사로 삼기 바란다. 이번 촛불에서 주권자로서 자각하고 승리의 경험을 한 시민과 노동자들이 일터와 지역, 온라인에서 속속 광장을 조직하고 있다. 진실을 통찰하는 순간 기만은 분노로 변한다.

    대통령의 파면은 1단계일 뿐이고, 우리는 지금 촛불혁명의 험하고도 긴 여정에 있다. 때로 혁명의 과정에서 반동이나 퇴행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역사는 때로 방향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혁명의 역사만큼은 지향성을 갖는다. 그 방향이란 집단의 자유가 더 확대되고 정의가 구현되는 길이다. 그러기에 반동이나 퇴행은 필연적으로 실패로 귀결될 뿐만 아니라 많은 희생을 야기한다. 유력 후보, 특히 문재인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되고도 역사에 반동으로 기록되지 않으려거든 촛불의 이념을 계승하는 정책과 처신이 과연 무엇인지 곰곰 숙고하기 바란다.

    필자소개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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