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정이라는 모멘텀
'극우 vs 범민주'와 '범보수 vs 진보'의 이중전선
    2017년 05월 03일 01:0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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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이은 TV 토론회를 통해 확연히 드러났듯, 정치 지도자로서의 ‘비르투’(= 결단력, 담력, 능력)로나 ‘정치적 올바름’ 면에서 심상정은 단연 발군이다. 정의당의 공약은 가치성·구체성·실현가능성에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다.(경향신문ㆍ경실련 공동 평가. <경향신문> 4월 28일자) 그런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망설여야 하나?

심상정을 제외한 다른 유력 네 후보가 하나같이 TK PK 출신 중장년 남성에 학벌 엘리트라는 사실은 과연 우연일까? 이는 차별이 깊이 내재화되어 거의 자연화된 한국 현실정치의 모순을 드러낸다. 특정 젠더(남자 이성애자)와 세대(50-60대), 지역(영남)에 주로 근거를 두거나 그것을 대표하는 문, 안, 유, 홍 중의 하나로만 선택해야 한다 생각해보라. 이런 ‘대의’ 민주주의는 정상인가?

심상정이 감당하는 무게는 분명 현재의 지지율과 한 사람의 후보 몫 이상이다. 물론 그 무게는 진보정당이 지는 무게다.

이는 노동자ㆍ여성ㆍ성적소수자 등의 참담한 정치적ㆍ사회적 소외를 생각하면 더 분명해진다. 돼지발정제를 써 강간 모의한 사실을 버젓이 젊은 날의 추억으로 써놓은 혐오와 ‘꼰대질’의 화신이 유력 ‘보수’ 후보로 설치고, 성소수자와 노동조합에 대한 혐오와 악선동이 횡행하는 선거판에서, 이 땅의 여성ㆍ(비정규)노동자ㆍ성소수자들의 시민권이란 과연 무엇인가? ‘국가’와 주류들로부터 2등시민(아니 그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기준으로 지지 후보를 정해야 할까? 심상정 후보의 지지율이 무당층, 20-30대 여성들을 중심으로 상승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사진=심상정 블로그

2.

이 사회의 주류 자리와 기득권을 차지하는 세력과 그 지지자들이 선거를 빌미로 차별과 혐오를 아무렇지도 않게 양산하는 현실은 멈춰져야 한다. 지난 4월 25일의 TV 토론회를 계기로 대선판은 의미가 바뀌었다. 환멸과 수동혁명으로서의 대선이 아니라, ‘촛불’로서의, 싸움으로서의 대선은 의외로 성소수자 이슈로부터 점화되었다.

지배적인 것과 소수적인 것 사이의 전선은 이중적이다. 하나는 홍준표로 대표되는 혐오ㆍ수구 극우 세력 vs 범민주진영의 전선이고, 다른 하나는 범보수ㆍ다수자 vs 진보ㆍ소수자 사이의 전선이다.

두 전선은 교차하고 또 길항한다. 큰 교집합을 갖지만 하나만이 진리가 아니다. 후자에 든 사회적 과제는 전자로써 해소될 수 없이 그 자체로 중요하다. 물론 전자는 후자의 토양이나 배경이 된다.

그런데 분단과 극우의 지배가 지속돼온 한국에서는 ‘민주 대 반민주’로 표상되는 전자가 언제나 압도적 힘을 발휘했을 뿐 아니라, 후자를 압박하고 해소해버렸다. 그 때문에 진보정당과 노동운동은 물론, 여성주의도 생태주의도 클 수 없었다. 언제나 “다음에”라는 ‘시기상조론’과 (더 큰 파도가 밀려오니 조개 줍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식의 ‘비판적 지지론’(라 쓰고 맹목적 지지라 읽는다)이 횡행했다. 공분을 일으킨 더민주 원내대표 우상호의 5월 2일 발언은 전혀 낯설지 않은 것이다.

불가피한 ‘현실’이라고? 무슨 말인지 이해한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한국 민주주의가 양과 질 양면에서 여전히 왜소하고, 또다른 악순환에 처한다는 사실도 직시해야 한다. ‘민주’에 불가결한 노동ㆍ여성ㆍ생태의 가치가 유보ㆍ억압되는 상황이 평등과 사회적 다양성을 약하게 했으며, 이는 혐오ㆍ억압과 극우 논리가 더 활개치게 만드는 핵심 배경이 된다. 여성의 권리와 노동조합의 힘이 제대로라면 과연 홍준표 같은 자가 ‘보수’로 표를 모으고 범죄적인 발언을 쏟아낼 수 있겠는가?

두 개의 전선을 같이 돌파할 수밖에 없고, ‘민주’와 ‘진보’ 양자는 서로 지렛대로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 지금은 그럴만한 보기 드문 좋은 기회다.

촛불 광장을 기억해보자. 단지 박근혜 탄핵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노동’과 ‘여성’의 고통, 그리고 가냘픈 장애인ㆍ성소수자의 목소리가 함께 외쳐지지 않았나? 그리고 그것이 힘을 합하여 여기까지 온 것 아닌가?

3.

지난 4월 25일의 TV 토론회에서 심상정은 유일하게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옹호했다. 고공 농성 중인 하청 노동자들을 찾아간 것도 심상정뿐이었다. 취업난에 시달리는 여대생들이나 일하는 엄마들이 유세장에 나온 심상정을 안고 눈물 흘리는 모습도 상징적이다. 그들에게는 제대로 된 ‘여성정치’ ‘여성 대통령’이 절실히 필요할 것이다.

조직과 자금의 취약함 같은 근본적인(그러나 강요된) 한계를 딛고, 이번 대선에서 정의당은 선전하고 있다. 심상정 후보의 득표가 15%를 돌파하기를 기대하는 이유는 당연히 심상정 개인에 대한 지지 때문은 아니다. 또한 높아진 지지율이 심상정 개인의 영달을 위한 자원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심상정도 완벽 무결한 정치인은 아니다. 진보정당 운동에 관심 있는 시민이나 거기 뛰어든 분들이라면 누구나 아픈 기억과 회한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겠지만,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에서부터 통진당 해산까지의 복잡다단한 이합집산의 과정에서 심상정 의원에게도 오류가 있었다. 특히 진보신당을 탈당하는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전체 진보정당 운동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의 하나인 심상정 본인이 말끔한 사과 등을 통해 이를 청산하지 못한 것은 실로 아쉽다.(심은 정의당 대표 경선 당시 레디앙과의 인터뷰를 통해 사과했다. 기사 링크-편집자) 또한 ‘심노유’로 표현되는 정의당의 명망가 중심정치를 극복하지 못하고, 차세대 진보 정치인을 키워내지 못한 것에도 가장 오랜 기간 당대표직을 맡아온 심상정에게 ‘정치적’ 책임이 있다.

그러나 아직 다 끝나지 않은 복잡하고 아픈 과거를 딛고 한국 정치가 ‘진보’해야 한다면, 또한 진보정치의 얼마 되지 않는 인적 자원이 소중하다면, 지금의 ‘돌파’는 꼭 필요하다. 또한 한국 정치가 달라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면, 무엇보다 진보정당의 확고한 존재가 필요하다. 이런 말을 레디앙 지면에서 할 필요가 있을까? 1개의 혐오-극우정당, 3개의 보수정당이 국회 의석과 지자체 단체장 자리를 거의 다 차지하는 사회에서, ‘실질적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리를 잡을 리 없다. 세계화와 금융화를 통해 구조화된 양극화와 신자유주의의 극복을 위해서도, 또 2천5백만 비정규직 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도, 몇 가지 정책을 교정하는 정도로는 어림없다. 정부ㆍ기업 뿐 아니라 문화ㆍ교육을 근저에서부터 바꿔나가야 한다. 재벌의 힘과 무한경쟁으로부터 인간과 자연의 삶을 보호해야 한다.

과연 문재인과 보수야당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30년 ‘민주화’의 역사를 보거나 이번 문재인 캠프의 공약을 봐도 흔쾌히 긍정적인 답을 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노무현 정부의 공과를 잘 기억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몇 가지 공이 있지만 양극화와 신자유주의는 전혀 막지 못하거나 오히려 조장했다. 과반 의석을 갖고도 아무런 개혁을 못했고, 노동자와 여성의 삶을 근본적으로 개선하지는 못했다. 다수 의석을 가진 보수야당이 나름의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라도, 왼쪽에서의 강한 견인과 박근혜 잔당에 대한 협공이 필요할 것이다.

4.

오랜 과제였으나 계속 난관에 봉착해온 ‘진보의 재구성’과 진보정당의 재기에 필요한 계기를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이번 대선에서의 선전은 중요하다. 2008년 이래 계속 난관에 봉착해온 ‘진보의 재구성’과 진보정당의 재기를 위한 모멘텀도 필요하다. 진보정당들은 딜레마에 처해 있다. 대중화에 힘써 ‘현실적’이려 하니 의회정치에 함몰되거나 목소리 작고 소외된 사람들의 현실로부터 멀어지고, 원칙을 지켜 소수파 중의 소수파에 머물러서는 애초의 존재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다. 내부적으로도 오래된 이념과 운동문화 때문에 조직적 미성숙이 극복되지 않고 있다. 현재를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대중과 실천에 근거하는 수밖에 없다.

최소한 둘 중 하나가 필요하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그래도 원내 의석과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기반이 있는 정의당이 명실상부한 ‘친노동’ㆍ‘친여성’ 진보정당이 되든지, 녹색당이나 노동당이 새로운 힘을 얻고 자기 자리를 제대로 확보하는 일이다.

이번 19대 대선은 정의당의 내부적 한계를 보여주는 선거이기도 하다. 밖에서 보기에 가장 아쉬웠던 것은, 심지어 박근혜 잔당도 한 오픈 프라이머리도 없었고, 자당 후보보다 남의 당 후보를 더 지지하는, 또 남의 당 후보를 비판했다고 자기당을 탈당하겠다 위협한 당원들이었다. 이 ‘과잉 정치 전략’을 소지한 이들은 정의당의 태생적 한계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정의당은 기본적으로 ‘친 노동’과 ‘친 여성’ ‘친 소수자’ 정당이 되어야 한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노동 정책과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정책이 관건으로 보인다.

또한 새로운 당내 민주주의와 기율도 동시에 마련해야 한다. 당내에 다양한 의견 분파를 수용하고 정치적 활동을 보장하는 새 틀을 마련해야 한다. 이런 노하우와 성숙함을 이제는 진보정당이 가질 때가 되지 않았나?

요컨대 어떤 경우든 새로운 참여자들과 강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이번 대선에서 후원하고 표를 주는 시민들이 그것을 만드는 원천 자원이 되어야 한다. 이번 대선의 선전이 새로운 적-록-보, 즉 노동ㆍ환경ㆍ성 등의 연대의 모멘텀이 되면 좋겠다. 반복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정의당을 위시한 진보정당 모두가 자기한계를 넘어 업그레이드 되어야 한다. 좋은 기회가 왔다.

* 글의 일부 내용은 <경향신문> 5월 3일자 필자의 칼럼 <심상정 지지율과 차별 없는 민주주의>와 같음.

필자소개
당적 없는 서울 은평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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