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리(익산)역 사고,
    미군 폭격과 화약 폭발
    [철도이야기] 1950년과 1977년
    By 유균
        2017년 05월 03일 12:2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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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의 이리 폭격사건

    사진 찍고 취재하러 돌아다니다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역이 있어 소개합니다. 이 고장에서는 목화를 많이 재배하였으며 목화꽃이 솜 모양으로 피어난다, 하여 ‘솜리’라고 불렀다 합니다. 그런 이름이 일제 강점기 때 솜리를 한자식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속리인 裡里(이리)로 만들어 원래의 의미가 훼손된 채 사용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95년 5월 행정구역이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되면서 현재의 명칭인 익산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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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역 전경

    익산역 주변에는 추모비가 4개 있습니다. 두 개는 광장에 있으며 1950년 7월 11일 미군이 이리역을 폭격하여 민간인 희생으로 인한 비와 일제 강점기 때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비입니다. 나머지 두 개는 역 내에 있으며 마찬가지로 미군의 폭격에 의한 비와 1977년 11월 11일 화약 폭발사고 때 돌아가신 철도원의 넋을 기리는 순직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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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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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익산역 광장, 우 익산역 내 승무사무소 순직비

    위 사진은 익산승무사무소 앞에 있는 것으로 1958년 건립되었습니다. 현재, 추모제는 지내고 있지 않으며 승무사무소에서 주관하여 비를 세운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런데 순직비 앞에 당연히 있어야 할 안내문이 없어서 어떤 이유로 순직비가 세워졌는지 익산승무사무소에 질의했더니, 6.25 전쟁 당시 이리에서는 기관고(기관차사무소)가 제일 큰 건물이었답니다. 이 때문에 미군의 폭격 대상이 되어 돌아가신 분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랍니다. 이 정도가 들은 전부이었기에 더 자세히 알고 싶어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다행히 내용이 있네요.

    폭격 사건의 진상

    1950년 7월 11일 당시 미군은 천안을 점령하고 남진하려는 북한군에 맞서 천안부근 정의라는 마을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와 같은 시기 한국군은 진천-청주지역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면서 뺏고 빼앗기를 거듭하는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접전지역과 적지 않은 거리를 두고 있었던 익산은 전쟁의 기운을 느낄 수 없을 만큼 평온하였다. 경찰서를 비롯한 관공서들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일상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의 시간인 11일 오후 2시를 넘어서 비행기 두 대가 이리역을 중심으로 하늘을 2-3바퀴 맴돌았다. 당시는 전시상황이었기 때문에 철도기관사들은 물론 민간인들은 습관적으로 비행기의 국적을 살펴본다. 그날 2대의 비행기는 중앙에 별 모양과 그 양옆으로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 미공군의 마크가 선명한 미군의 중폭격기 B24 두 대였다. 그 전에도 미군기가 날아다니는 것을 종종 본적이 있던 철도청 소속직원들은 그 날도 그냥 흘려보내려다 아군임을 알리기 위해 태극기를 흔들며 미군기를 환영하였다. 그 순간 익산역 일대를 선회하던 폭격기는 시커먼 무엇인가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직원들과 민간인들은 낙하산이 떨어진다고 신기해하며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었다. —(중략)—곧 이어 굉음과 함께 엄청난 화염이 이리역 일대를 삼켜버렸다.

    미군폭격기가 이리역 일대에 사재하여 작업 중이던 기관차는 물론 구내시설에 대해서도 가공할 폭격을 가하였다. 이리역 직원들은 폭격을 받으면서도 적이 아님을 표시하기 위하여 피신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나서서 두 손을 저으며 소리소리 외쳤다. — 생각다 못하여 태극기를 휘두르며 사무소로 뛰어갔던 직원들은 그대로 폭풍과 함께 산산이 흩어졌다. —지구가 갈라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사람들은 어디론지 없어졌다. 미군의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이리역 일대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고 당시 이리운전사무소에 근무하던 직원들은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타버리거나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러나 미군의 폭격으로 인한 피해는 이리역 구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미군의 폭격은 이리역과 접해있었던 송학동 주변의 50여 채의 민간에도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50여 채의 민가에는 일가족, 아니면 자식들을 학교에 보낸 부모들이 일상생활에 전념하고 있었다. 하지만 폭격으로 50여 채의 민가는 온데간데없었고 민간인들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리역 일대를 무차별 폭격하여 약 200여명의 사상자를 낸 미군 폭격기는 약 10분 뒤 또 다시 이리역 상공에 나타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변전소와 전라선 철길 수변에 집중적인 폭격을 가하였다. 변전소 주변에는 5일 만에 우시장이 열려 김제, 군산, 임피 등에서 장을 보러 온 수많은 민간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전라선 철도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 군에 입대하려는 젊은이들이 김제 방면에서 이리역을 향해 변전소 옆을 걷고 있었다. 2번째 폭격으로 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과 군에 입대하려던 청년들 약 100여명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미군폭격기에 의한 양민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4일 후 익산역 일대의 상공에는 일명 ‘호주기’라 불리는 미 공군소속의 전투기 4대가 나타났다. 전투기들은 편대비행으로 익산역 상공을 상회하며 일대를 살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또 다시 기수를 아래로 돌려 저공비행을 하면서 폭격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고 있던 사람들과 무고한 양민들을 향해 로켓포를 쏘고 기총소사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 민간인들을 직접 겨냥한 미군 전투기의 기총소사는 30-40분간이나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또 다시 몇 십 명의 무고한 양민들이 희생되었다.

    (2003년 제4회 1950년 미국 이리폭격 희생자 추모제 자료집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그리고 순직비 뒤에 쓰인 비문입니다.

    幽玄에 떠는 歲月
    역사는 되돌릴 수 없다
    역사는 피울림에 젖고
    한에 얼룩진 피바다, 이 유현(幽玄)에 떠는 광장에 섰다.

    삶으로 앓는가
    죽음을 안아 눕는가
    결코 씻을 수 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우리는 허망의 세상을 보았노니
    무차별 사살의 폭격투하를 보았노니

    천연히 내려꽂은 비극의 광장,
    양민의 죽음을 보았노니 누가 이 자리에 서서
    그들의 영혼 앞에 서서 경건하게 죽음을 애도할 것인가

    역사를 되돌릴 수 없듯이
    비극의 재연은 다시 연출될 수 없다.
    오십 해 긴 세월,
    있어서는 아니 될 통한의 세월인데|
    여기 유현(幽玄)에 떠는 숨결을 본다.

    시인 : 채규판

    이리역

    이리역 폭발사고(사진=나무위키)

    폭발사고

    폭발사고 희생자 위령탑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또 하나의 순직비는 이리역 폭발사고로 1977년 11월 11일 21시 15분경에 일어난 사고로, 개요는, 사고 이틀 전인 11월 9일 11시 인천시 남구 고잔동에 있는 한국화약주식회사 제1공장에서 상기 화약류를 싣고 9시 43분 광주를 향해 출발했다. 화약열차는 그날 밤 11시 31분에 15량의 다른 화차와 함께 이리역에 도착했고 1605호 화물열차에 의해 중개되어 목적지인 광주로 출발하기 위해 사고지점인 4번 입환대기선에 머물러 있었다.

    사고 당시의 철도수송규정 제46조를 보면 화학약품의 수송은 되도록 도착역까지 직통하는 열차를 이용 수송할 것을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의 화약열차는 광주로의 연계수송을 위해 무려 22시간여 동안이나 대기 중에 있었다. 한편 한국화약주식회사의 수송원이던 신무일(38세)은 화약류의 직송 원칙을 무시하고 수송을 지연시키는 데 대해 이리역 측에 항의를 하였으나, 묵살되자 이리역 앞 식당에서 2홉들이 소주 한 병을 곁들인 식사를 한 뒤 다시 2차로 역전주점에 들러 막걸리를 마시고 얼큰한 취기에 초겨울의 한기를 느끼면서 화약열차에 들어갔다.

    화차 속이 어두웠기에 그는 논산역에서 구입한 양초를 찾아 불을 붙여 화약상자 위에 세워놓은 뒤 취기에 한기가 엄습해오자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잤다. 그 사이 촛불이 화약상자에 옮겨 붙으면서 폭발이 일어났다.

    당시 매스컴에서는 피해상황과 신무일 씨 행위에 대한 잘못에만 초점을 맞추었지, 왜 직송열차가 22시간을 대기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철도역의 화차 배정 직원들은 급행료를 챙기고 있었습니다. 목적지에 빨리 화물을 보내고 싶은 화주는 역 직원에게 늘 뒷돈을 주어왔습니다. 여름에 생선이나 제철 과일류 운송에 특히 부정이 많았는데 급행료를 지불하지 않으면 늑장운송으로 화물 값이 절반으로 떨어지기 일쑤였습니다. 이러한 관행으로 화약열차는 그저 마냥 대기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으며 호송원 신무일 씨는 이리 역에서 20시간 이상을 대기하게 되자 화가 나 역 밖으로 나가 술을 마시고 들어온 것입니다.

    물론 더 큰 문제는 한국화약에 있었습니다. 화약을 실은 화차 내부에는 호송원조차 탑승할 수 없는데도 이를 무시했으며 폭약과 뇌관은 함께 운송할 수 없는 점, 호송원은 총포화약류 취급면허가 있어야 하는 점, 화차 내에 화기를 들일 수 없는 점 등을 깡그리 무시했습니다.

    때문에 한국화약 사장을 비롯한 간부, 철도청 직원들이 속속 구속됐고 한국화약은 회장 이하 전 직원 이름의 사과문을 내고 ‘이리 복구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대 폭발참사인 이리 사고는 바로 부정과 부패, 적당주의가 팽배한 당시 사회의 치부가 갑자기 폭발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리역 화약열차 폭발사고의 드러나지 않은 실체입니다. 이로 인하여 다친 사람들은 아직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고인의 가족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민병욱 / 이리역 화약열차 폭발사고 취재기에서 발췌 후 편집

    필자소개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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