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 어디까지?
[아트살롱]Mirth and Girth 사건③
    2017년 05월 03일 11:3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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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냐 폭력이냐: 이분법을 넘어서

예술가들은 흔히 자신들이 사회와 일상으로부터 벗어나있고 격리되어 있다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 고립된 장소에서 자신의 창작물 그리고 거기에 담긴 진보적이고 참신한 생각에 대해 스스로 만족해하곤 한다. 이는 예술이 오직 예술만을 위해 기여해야 하며, 예술은 사회와 독립되어 있다는 모더니즘적 예술의 자율성과 그런 예술계 속에 특권적 지위를 가진 천재적 존재라는 낭만주의적 작가주의 탓이다. 그러나 “넬슨의 회화”는 그리 수준 높은 작업도 아니었고, 정치적으로 반동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동성애 혐오적 내용을 넘어 여러 가지 오해와 편견이 투입되어 있다.

물론, 예술가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작품을 제작하고 발표할 권리가 있다. 그렇다고 그 작품의 주제를 인정하고 수용하라는 것은 아니다. 작품의 내용이 비록 공격적이라 하더라도, 표현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할 때, 그 작품의 내용에 대해 침묵을 지켜야 할 이유는 없다. 예술가가 연출한 폭력적 상황에 대해 충분히 그를 비판(비평)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가 자신의 의도를 다시 생각하도록 권유하는 것이자 더 좋은 작품을 생산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가가 어떤 작품을 만들든지, 자신에게 맞는 작품을 만들 권리가 손상되지 않도록 지키면서, 예술적 작업과정과 내용에 자신의 작업이 갖는 사회적 함의를 인식하도록 격려할 필요가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 방향이 다른 곳으로 전환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거나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넬슨의 회화 사건은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이 사건과 관련하여 어떤 사람들의 발언과 태도는 너무 과격하고 무지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표현의 자유라는 추상적 권리 뒤에 숨어 숨죽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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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의 작품 철거에 항의하는 학생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검열의 폭력 vs 인종차별적 폭력’이라는 단순한 대립구도를 형성하는 데 그쳤다. 문제는 여기서 생겼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로는 넬슨의 회화사건을 도무지 해결할 수 없었다.

표현의 자유?

공공장소에서 “불이야!”라고 외친다면 이는 표현의 자유고, 이를 막는다면 검열일까? 표현의 권리의 무제한적 확장에 반대하는 제러미 월트론 같은 이는 표현의 자유권에 맞서 ‘막을 권리’를 주장하는 학자이다. 막을 권리는 내용에 기초하지 않는 표현의 자유 금지와 내용에 기초한 표현의 자유 금지가 있다. 공공장소에서 ‘불이야!’라고 외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내용에 기초한 금지이며, 이 내용이 일종의 패닉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금지된다. 그 외에도 혐오 표현 역시 내용에 기초한 표현의 자유 금지와 연결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표현이 금지되어야 할까? 월트론에 따르면, 표현의 자유를 금지시켜야 할 때는 표현의 방식과 내용이 주관적 충격, 불쾌, 분노가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보편적이면서 모종의 객관성을 띠는 해악이 있을 경우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객관적이며 보편적일까? 그는 특정한 표현으로 인해 어떤 한 사람이나 집단의 ‘존재 기반’이 허물어지는 경우를 사례로 든다. 예컨대 인종적 혐오나 여성 혐오는 일반적으로 특정 인종이나 인간 집단의 존재 또는 존립 기반을 허물 수 있다. 이에 더하여 막을 권리는 주로 어떤 표현에 의해 단순히 ‘야기된’ 해학이 아니라, 그 표현이 적극적으로 ‘구성’하려는 경우 작동되어야 한다. 즉 그 표현이 고의적으로 폭력을 조장하거나 선동하려는 것이라면 여기서도 막을 권리가 작동한다는 것이다.(『혐오표현: 자유는 어떻게 해악이 되는가』 16, 138, 208 참조) 그러나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반대로 검열의 무차별적 강화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표현권의 제한은 신중하게 그리고 최소한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예컨대 최근 홍성담의 <세월오월>사건이나 블랙리스트 사건처럼, 표현권이 잘못 적용되면 강력한 검열의 형식이 되고, 이는 시민의 기본권을 크게 침해할 수 있다.

넬슨의 경우에는 어떤 사람의 존재의 기반을 허물려고 의도하지 않았으며, 폭력을 선동하려 했던 것도 아니다. 물론 동성애에 대한 편견으로, 혐오적 표현이 들어 있었다는 점은 문제였지만, 그가 이 혐오를 구체적으로 의도하거나 이를 통해 폭력을 조장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이런 문제는 사건 당시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고, 오히려 이 혐오는 흑인의 거세 콤플렉스로 해석되어 인종적 혐오 코드로 변질되었다. 물론 넬슨은 인종혐오의 의도가 없었고, 그러한 혐오를 선동할 생각도 없었다.

넬슨이 그림을 건 사건 당일로 잠시 돌아가보자. 실제로 이 그림의 내용이 학교 외부로 알려진 것은 그림이 그려지는 과정 중이었던 듯하다. 그림이 오전 8시에 걸렸고, 9시 30분경 이미 이 그림에 대한 기사가 흑인 라디오 방송국의 방송을 탔다는 것, 그리고 그 사이 이미 시카고 디펜더(defender)지의 기자가 총장의 사무실에 방문해 있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이 사건이 꼭 넬슨 개인만의 문제에 그치는 것일까? 예술대학은 넬슨을 좋은 작가로 교육하고 좋은 작품을 생산할 더 좋은 기회를 제공할 수는 없었을까? 예컨대 시카고 예술대학교는 예술가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특정한 교육과정을 개설하여 진행해야 했던 것은 아닐까? 그림의 내용에 대해 사전에 알았다면, 작업 과정 중 다양한 사람들과의 논의를 통해 넬슨의 작업 수준과 감수성을 더 높일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러한 논의는 일종의 부드러운 비평이라고 할 수 있다. 비평이 늘 결과로 드러난 작품에 가해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검열과는 다르다. 공식적인 비평은 아니지만, 작업의 내용과 관련해 다양한 사람과 나누는 소통은 일종의 비공식적 비평으로서 작업의 내용과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 그러나 시카고 미술 대학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러한 환경을 갖추지 못했다.

넬슨의 작품 철거 후 총장을 면담하러 가는 시의원 스트리터

넬슨의 작품 철거 후 총장을 면담하러 가는 시의원 스트리터

여기에 시의원인 스트리터가 작품을 강제 철거한 일은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고 폭력적인 상황을 부추겼다. 그림을 강제 철거한 스트리터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명백한 불법이었다. 스트리터의 성급한 조치 덕분에 이후 벌어질 생산적인 비평의 장은 모두 닫혔다. 그런데 인종 갈등이 늘 잠재했던 시카고의 상황과 레이건 정부의 성향은 생산적인 비평의 장이 열릴 수 없을 정도로 경직되어 있었다는 게 더 문제였다. 그러면서 시카고의 백인, 흑인, 라틴계, 아시아계 그리고 원주민이었던 인디언 예술가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표현의 자유와 검열이라는 쟁점의 중요성과 인종차별주의라는 부수적인 이슈 사이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당했고, 그 사이 문제는 결국 흑/백 갈등으로 비화되었다.

사회에 무관심한 예술가?

낭만적 작가주의나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모더니즘적 모토는 예술을 사회와 격리시켰고, 덕분에 예술계는 오랫동안 사회나 정치에 무관심해질 수 있는 역사적 관성을 갖게 되었다. 예술가는 오랫동안 사회정치적 환경과 고립되어 작업할 수 있었다. 동시에 예술가는 일반적인 역사-사회적 맥락을 초월해서 자신의 입지를 특권화시킬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예술가들은 역설적으로 소위 “예술가입네”하는 지위를 사회로부터 얻을 수 있었다.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안락하게 불편할 수 있었다.

예술가들은 오직 이전에 있었던 예술만을 참고만 하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예술계는 점점 더 밀폐되었다. 예술학교 역시 예비 예술가들에게 굳이 사회나 정치를 가르치지 않아도 되었다. 예술의 무균실은 그렇게 완성되었고, 예술작품과 예술가 그리고 예술계의 담론은 닫힌 예술체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점점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사람들의 난독증 또는 거부감을 유발하면서 희희낙락하던 예술계는 광장공포증을 앓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전시’ 자체가 사회성을 띠는 것이었고, 작품을 걸 수 있는 권리로서 ‘표현의 자유’라는 말도 사회 속에서만 관철되는 권리였다. 이는 예술계의 대문이 완벽히 닫히지 않게 하는 걸림돌이다. 표현의 권리는 예술계가 사회-역사-정치적 맥락 속에서 작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결정적 스모킹 건(혐의)이었다.

예술학교와 예술교육

미술 학교는 미술계와 미술계 외부가 조화를 이룬 작은 사회다. 거기서 젊은 예술가들이 자신이 선택한 정체성으로 사회화되는 장소다. 좋은 예술학교는 학생들이 시각적으로 생각하는 법과 자신의 아이디어들을 최상으로 실현해내는 법을 배운다. 예술 학교는 학생들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잘 전달하고 있는지를 가르쳐야 하며, 학생들이 자신의 의도에 대해 사회적 책임을 지도록 가르쳐야 한다.

교수진은 때때로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내용의 작품, 포르노인지 예술작품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운 작품, 불필요하게 폭력적이거나 착취적인 내용의 작품, 반유대주의적인 작품 등을 본다. 이에 대해 학생들이 무의식적으로 또는 부주의하게 저지를 수 있는 일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바로 예술 학교의 정신이다. 작품에서 실제로 투입된 노력이 실제로 얼마나 의도한 대로 되었는지, 그리고 그들 작업에 대한 통제력이 부족한 부분은 얼마나 되는지를 평가하는 것이 학교뿐 아니라 예술대생들에게도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예술학교는 일종의 ‘실험실’이자, 작은 공론장이다.

이런 공적 상황이 반드시 의도적으로 연출될 필요는 없다. 예술대생이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의 장을 조성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예술학교가 좀 더 다양한 인종적 다양성과 성적 다양성을 갖춘 환경이었다면, 넬슨은 그런 작업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레이건 정부 때 그나마 주당 60분으로 주어지던 학교 예술 교육이 사라지게 되었고, 덕분에 중산층 이하의 가난한 사람들과 소수인종은 예술 교육을 접할 수 있는 남아 있는 기회마저 제거되었다. 이와 동시에 예술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인종적 편향성이 극심해지기 시작했다. 예술계는 인종적 단일함으로 근친교배되었고 철학적으로 빈곤해졌다.

실제로 시카고에는 인구의 57%를 차지하는 흑인, 라틴계, 아시아계,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인종적(racially), 민족적으로(ethnically) 섞여있었지만, 예술학교는 이를 고르게 반영할 수 없었다. 그나마 시카고 예술대학교는 다른 교육기관보다 소수민족의 인구비율이 높기는 했지만, 미미한 수준이었다. 사회적 상황이 소수민족에게 유리하지 않은 상황에서, 아무리 학교가 소수민족 학생, 교수진 및 교직원 수를 늘리기 위해 노력한다 한들, 그 효과가 제대로 드러날 수 없었다.

다행히 예술대학에 입학하더라도 소수민족이 겪게 될 장애물은 좀처럼 제거되지 않는다. 예술대학에 다니는 소수민족 학생들은 가혹한 경제적 사회적 현실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이들이 높은 학비를 보조받는다고 했을 때조차, 여전히 ​​식비, 의류비, 방세 그리고 여타 생활비의 부담을 떠안는다. 그들은 일주일에 40시간 이상을 일할 수 없고,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대부분 학자금 대출에 의존하기 마련이다. 예술학사과정에서 4년을 보내거나, 예술학석사과정까지 합하여 6년을 보내고 나면, 학생들은 대개 심각한 부채를 떠안게 된다. 이 상황은 레이건 정부 때 훨씬 더 악화되었다. 레이건 행정부가 많은 학생 지원 프로그램을 줄이면서 학생과 그 가족에게 더 많은 지불 부담을 전가하려 했고, 이런 정책이 저소득층 학생들과 소수 민족 학생들에게 심각하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졸업하자마자 대출금부터 갚아야한다. 그러나 의사나 변호사와 달리 예술가들은 고액의 월급을 받는 직업을 가질 수 없다. 심지어 명확한 전문적인 보상을 받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수도 없다. 이것은 아마도 예술대에 지원한 소수민족 학생이 직면하는 가장 힘든 현실일 것이다. (한국도 이와 다르지 않다. 심지어 취업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예술대가 폐과되거나 통폐합된다. 부산만 하더라도 미술대가 몇 개 남아 있는지 아는가? 아니 얼마나 많이 사라졌는지를 따지는 것이 더 좋을지 모른다.)

사건 이후

이 사건으로 인해 시카고 예술대, 시카고 미술관, 그리고 주로 도시의 백인 예술계가 더욱 소원해졌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관련된 이슈들에 관하여 공개 토론을 하려는 지역 시민단체의 활동가들과 문화다양성의 토대를 만들기 위한 “단결” 노력들이 무색하게, 백인들은 백인들끼리, 흑인들은 흑인들끼리 따로 만나서 그 사건에 대해 토론을 지속했다. 그러면서 양측은 “우리”와 “그들”이라는 용어법으로 서로에게 차별적 서사를 재생산하고 있었고, 그들이 서로 인종 차별적인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들지 않았다. 동시에 여기에 속하지 않는 제3의 인종들은 다른 곳에서 자신들만의 토론을 이어가고 있었다. 시카고는 거대한 크레바스를 품은 빙하였다.

물론 차별철폐 조치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몇몇 움직임도 있었다. 그래서 대학의 내부 및 외부 태스크 포스가 도시의 인구 통계를 반영하고 있고, 그러한 통계와 좀 더 종합적으로 연결된 인종적으로 통합된 예술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조치는 당장 드러나는 것이라기보다 장기적 전망을 요구하는 조치라서 급한 불을 끄기에는 부족했다. 하지만 예술학교가 이런 식으로 차세대 예술가를 양성한다면, 사람들은 장차 더 다양한 예술 작품을 접하게 될 것이며, 다양한 민족 및 인종 집단의 예술가들은 자신의 민족 역사에 헌신하면서도 지역 사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물론 예술계와 예술계 외부의 사회 사이에 있는 부자연스러운 균열에 다리도 놓게 될 것이다.

데이비드 넬슨의 사건은 특정 지역사회의 연속성 속에 있는 균열, 즉 숨겨진 모순을 드러내기에 충분하게 극적이었다. 동시에 통합과 변화의 필요성을 강렬하게 인식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균열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통합과 변화는 결과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어설픈 작품의 생산과 전시는 극적인 대립을 낳았을 뿐이고, 이에 대한 분노로 작품을 철거한 사건은 그 대립을 더욱 격화시켰으며, 공적 논쟁은 흑/백/제3의 소수인종 사이의 경계를 허물지 못했다.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특이성의 차원 그리고 인류의 공통성이라는 보편적 차원 중 어느 하나도 획득하지 못했다. 멸균실에서 행해지는 자기들만의 민간요법으로는 도시와 지역사회의 면역력, 즉 도시와 지역사회의 다양성과 보편성이라는 공적 역량을 증가시킬 수 없다.

스칼 타일러의 작품

스칼 타일러의 작품

이처럼 메워지지 않은 균열은 예견이라도 한 듯, 새로운 균열로 이어졌다. 시카고 미대에 엄청난 사고가 하나 더 터진 것이다. 9개월 후 스캇 타일러(Scott Tyler)라는 학생이 <미국 국기를 설치하는 적절한 방법이란 무엇인가(What is th Proper Way to Display th U.S. Flag?)>라는 작업으로 국가의 신성함을 모독했던 것이다.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자국(미국) 국기를 밟을 수밖에 없게 고안된 작품은 더 극심한 소요를 일으켰다. 만일 이런 작품이 한국에서 전시되었다면 어찌되었을까?

필자소개
<비아트> 에디터. 부산민주시민교육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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